이 기록물철은 1909∼11년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 객사(客舍)에 관련된 문서들을 편철한 것이다. 이 기록물철은 성균관 학칙·성균관 예산·성균관 활동 등 성균관에 관련된 문서, 향교 직원(直員)·향교재산 등 향교에 관련된 문서, 객사(客舍)의 사용·불하·소실 등 객사에 관련된 문서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록물철은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기 직전 성균관 및 향교의 실태 및 이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정리 방침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 성균관에 대한 관리가 장예원(掌禮院)에서 학무국으로 이전되고 각종 비품비, 인건비 등 성균관에서 사용하는 예산이 제대로 편성, 지급되지 않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성균관의 지위를 격하시켜 유림의 구심점을 제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부군(府郡)의 통폐합에 따라 각 부군(府郡) 소재 향교를 통폐합하여 향교를 지방제도의 일부로 귀속시키고 향교의 향사(享祀)를 양력으로 시행하도록 하는 등 향교재산의 지방관청 귀속 이후 향교에 대한 정리와 개편을 시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기록물철은 성균관 및 향교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정리 방침이 그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직접적인 반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유림의 구심체로 만들기 위하여 여러 차례 청원을 올렸으며, 지방에서도 향교의 향사(享祀)를 양력으로 시행하도록 한 것에 대하여 전례에 따라 음력으로 시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유림의 반대에 대하여 총독부에서는 유림의 요청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이들을 회유하고 있다.
향교에 관련된 건
성균관에 관련된 건
객사에 관련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