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가 창건될 당시 같이 건립된 탑으로,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이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1669년 간행된 ‘동경잡기’ 고적조에 의하면, ‘분황사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허물었는데 그 뒤 승려들이 탑을 쌓기 위해서 해체하다가 또 일부를 무너뜨렸다’라고 기록되어, 원래 9층석탑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3층만이 남아 있다. 그 후, 일제시기인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를 하였으며, 당시 탑 내부에서는 석함이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는 숭녕통보(崇寧通寶)가 들어 있어 분황사석탑이 12세기 초 또는 그 이후에 전면 해체에 가까운 개탑(開塔)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판1],[도판2],[도판3]은 1913년에 작성된 분황사석탑의 실측도이다. 이 도면을 통해 당시 분황사 석탑의 현황을 알 수 있는데, 탑의 옥개석(屋蓋石)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으며, 탑 전체에도 균열이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판2]에 보이는 탑의 북측면은 거의 전체의 부재가 떨어져나가 내부의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언제 추가 붕괴가 일어날지 모를 심각한 상황임을 볼 수 있다. 탑의 기단 또한 대부분 붕괴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북쪽의 일부분에만 장대석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자연석으로 마감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붕괴된 탑의 북측면으로 인하여 내부의 토사가 흘러내리는 상황을 막기 위하여, 조선총독부는 우선적으로 파손방어공사를 실시하였다. 이와 관련된 도면이 [도판4]이다. 붕괴 위험이 심각한 탑의 북측면 1층 부분에 가설벽을 설치하고 지지대를 보강하여 탑의 붕괴를 막기 위한 공사내역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본격적으로 분황사석탑에 대한 개수공사설계가 시작되는데, 그 내용을 [도판5], [도판6], [도판7]에서 볼 수 있다. [도판5]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분황사석탑의 개수공사는 탑을 해체하고, 탑신의 부서지고 균열된 부분을 모두 수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탑의 구조적 안정성을 위하여 기단부분을 새롭게 보강하였다. 그 내용을 [도판6]과 [도판7]에서 볼 수 있는데, 탑신의 바로 아래 부분에 콘크리트 기초를 만들어 지반을 보강하고 그 아래쪽에는 잡석을 촘촘하게 깔아 지반을 보강하였다. 탑의 기단부의 자연석 석축 하부에도 더 바깥쪽까지 잡석다짐을 하여 보강하는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도판8]과 [도판9]는 당시 개수공사의 방법을 보여주는 도면이다. 도면에는 탑의 1층 전체를 둘러싸면서 1층의 옥개석 이상을 지지할 수 있는 가설 구조물이 계획되어 있어, 당시 보수공사를 위한 가설물 설치의 방법과 그 모양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도판>
도판1.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재래지도 / 1, 1913
도판2.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재래지도 / 2, 1913
도판3.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재래지도 / 3, 1913
도판4.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파손방어공사도 / 4, 1913-14년 추정
도판5.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개수설계도 / 5, 1913-15년 추정
도판6.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개수공사설계도 / 6, 1913-15년 추정
도판7.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개수공사설계도 / 9, 1913-15년 추정
도판8.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개수공사설계도 / 10, 1913-15년 추정
도판9. 경상북도경주분황사구층탑개수공사설계도 / 11, 1913-15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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