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탑평리칠층석탑은 충주시 가금면 남한강 상류의 강가 언덕 위에 건립된 통일신라 시대의 유일한 7층 석탑으로 그 높이가 14.5m에 달하며, 한반도의 중심에 있다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탑의 연혁에 대해서는 신라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12년 이전이라는 의견이 있으며, 그 이전으로 봐야한다는 의견 또한 있다.
일제시기인 1916년에 중앙탑의 경사가 심하여 총독부의 토목국장에게 탑의 수선을 의뢰함으로써 1917년 11월부터 1918년 1월까지 탑의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는 탑의 붕괴를 막기 위한 공사를 실시하였는데, 이 때의 잘못으로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많다. 특히, 기단(基壇) 각 면의 탱주의 간격이 고르지 않은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탑은 2중의 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5층까지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6층부터는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도판1]부터 [도판5]까지는 당시 탑의 현황을 기록한 실측도로 순서대로 평면도, 남측면도, 동측면도, 서측면도, 북측면도이다. [도판3]의 동측면도를 보면 탑의 북쪽 상층 기단이 붕괴되어 전체적으로 북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도판4]에는 서측면 기단의 면석(面石)과 탱주가 모두 떨어져나가 내부의 잡석이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 기재되어 있다. [도판5]에서 탑의 북측면을 볼 수 있는데, 탑이 서쪽으로도 기울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북쪽의 이중계단은 모두 붕괴되어 대부분의 기단 면석이 떨어져 나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기단부에 비교하면 탑신부는 일부 부재가 부서진 것 외에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반대로 상륜부의 옥개석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의 모습으로 기재되어 있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이 탑의 보존을 위하여 해체 수선 공사를 실시하였다. [도판6]에서 탑의 기초 보강을 위한 계획을 볼 수 있는데, 이 계획은 공사 도중에 한번 변경되었다. 초기 계획에서는 탑의 지반을 전부 고르게 흙을 다져 강화하는 것이었다. 변경된 계획에서는 탑의 중앙부에 큰 돌을 깔아 지지석으로 삼고, 그 주위는 흙을 다져 강화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반을 보강한 이후, 기단부를 새로 쌓고, 서북쪽으로 기운 탑신부를 바로 세웠는데, 이때 엄밀한 수선 공사 계획이 수립되지는 못하였다. [도판7]은 탑의 동측면 수선공사설계도인데, 상층 기단부의 탱주의 간격이 좌우대칭의 간격으로 계획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같은 부분의 실측도인 [도판3]을 보면, 비록 붕괴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각 탱주가 좌우대칭으로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정작 수선 계획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 당시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수선의 졸속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도판8]은 탑의 단면도로, 상륜부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중앙에 심을 박아 각 부재를 고정시키려는 계획이 기재되어 있다.
<참고도판>
도판1.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실측도 / 기일, 1917년 추정
도판2.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실측도 / 기이, 1917년 추정
도판3.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실측도 / 기삼, 1917년 추정
도판4.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실측도 / 기사, 1917년 추정
도판5.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실측도 / 기오, 1917년 추정
도판6.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수선공사기초변경도 / 10, 1917년 추정
도판7.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수선공사설계도 / 7, 1917년 추정
도판8. 충청북도충주군중앙탑수선공사설계도 / 9, 1917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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