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 도면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분황사석탑(경주)’, ‘미륵사지석탑(익산)’과 ‘중원탑평리칠층석탑(충주)’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었으며, 이 글에서는 나머지 8개의 탑에 대한 도면 18매를 다루었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탑은 각각 경주시 소재의 석탑 4개소(8매), 안동시 소재의 전탑 3개소(9매), 상주시 소재의 폐탑지 1개소(1매)이다.
[도판1]은 '경주군마동탑준공도'로, 현재 경주마동사지삼층석탑의 당시 보존공사 준공도이다. 도면에는 탑의 단면과 정면이 기재되어 있는데, 단면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잡석과 자갈, 흙을 이용하여 지반을 튼튼하게 다져 탑의 보존을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판2]는 ‘옥산탑보존공사설계도’로 현재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의 보존공사 설계도이다. 도면에 ‘옥산탑(玉山塔)’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은 이 탑의 위치가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탑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조선 후기인 영조 41년(1765)에 이르러 처음 해체 수리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기인 1911년에 11~13층이 도괴되었고, 1922년 복원되었는데, 이 도면은 그 당시의 설계도로 보인다.
당시 실측도는 소장되어 있지 않아, 당시의 현황은 알 수 없지만, ‘조선고적도보’에 11~13층의 부분이 없어진 사진이 실려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도판3]은 ‘경주군남산사고탑보존공사설계도’로 현재의 경주남산리삼층석탑의 도면이다.
이 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동서로 두 개의 탑이 놓여 있는 쌍탑으로, 동탑은 모전석탑, 서탑은 일반적인 석탑이었다. 이 탑의 보존공사 역시 지반을 잡석과 콘크리트로 강화하고 수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도판4]는 ‘경주군감산사고탑보존공사설계도’로 현재 감산사지삼층석탑으로 불리는 탑의 도면이다. 이 탑은 이후 붕괴되어, 현재 탑신 1층부까지만 재건되어 있는데, 이 도면을 통해서 본래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쌍탑이었음도 확인된다.
[도판5]는 ‘경북안동군일직면오중전탑보존공사설계도’이다. 통일신라 시기, 안동 지방에는 전탑들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 도면은 그 중 현재의 안동조탑동오층전탑의 보존공사설계도이다. 이 탑은 화강석으로 1층을 만들고, 1층의 옥개석부터는 벽돌을 이용하여 탑을 구성하였다. 도면에서는 당시 지반의 변형으로 인하여 기단과 1층의 탑신 부분이 부분적으로 깨지고 갈라지는 등의 손상과 변형된 모습이 기재되어 있다.
[도판6]과 [도판7]은 현재 안동신세동칠층전탑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경북안동군부내면용상리칠중전탑보존공사설계도’이다. 이 탑에 관한 실측도 역시 현재 소장되어 있지 않아, 당시의 파손 정도는 알기 힘들지만, 이 도면을 통해서 당시 조선총독부가 어떻게 수리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설계도에 그려져 있는 모습이 현재 우리가 보는 신세동칠층전탑의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 탑의 보수 당시 기단의 윗부분에 둥글게 시멘트를 바르는 계획 또한 설계도에서 볼 수 있다. 일제시기 탑의 원형을 보수하지 못하고, 손괴된 부분에 시멘트를 사용하여 보수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신세동칠층전탑과 미륵사지석탑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도판8]은 ‘경상북도상주군외남면지사리탑동석탑지도’로 현재 완전히 멸실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탑으로 이 도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존재했을 당시에는 상병리탑(上丙里塔), 지사리탑(芝沙里塔) 등으로 불렸으며, 당시 남아 있었던 신라시대의 유일한 석심회피탑(石心灰皮塔)으로 돌로 탑의 몸체를 쌓고 그 바깥쪽에 회를 발라 만든 탑이었다.
이 탑의 존재 당시 모습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4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탑의 6층까지 남아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탑을 조사하고 사진을 촬영했던 세끼노 타다시(關野貞)는 그의 책 ‘조선의 건축과 예술(朝鮮の建築と藝術)’에서 이 탑이 신라시대의 석심토피탑(石心土皮塔)의 유일한 예이며, 아마 7중(重)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6중만이 남아있는데, 신라시대의 석심토피탑은 오로지 이 하나만이 남아 있어, 그 구조는 조(粗)하나 매우 진귀한 유구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후, 1917년 5년 도굴꾼 2명이 도청으로부터 관명에 의해 발굴한다고 주민들을 속이고 탑을 부수고 탑 내의 기물을 훔쳐 달아났는데, 당시 이 탑의 피해조사에 나섰던 기수(技手)키바 사이조(木場才藏)의 복명서(復命書)에는 이 탑이 붕괴되기 전에는 장정 키의 2배반으로 6층까지 있었는데, 초층의 4분의 1을 남기고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규홍, 앞의책, p.158
복명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도판8]은 이 시기에 작성된 도면으로 보이며, 도면에는 2층 이상의 탑신이 모두 사라져있고, 초층의 일부만이 남아 있음이 기재되어 있다.
이후 1930년경에는 초층탑의 동남부 일부만이 남긴 채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이후 완전히 부서져 국내 유일의 석심회피탑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도판>
도판1. 경주군마동탑준공도, 1910-20년대 추정
도판2. 옥산탑보존공사설계도/1, 1922년경
도판3. 경주군남산사고탑보존공사설계도/1, 1910-20년대 추정
도판4. 경주군감산사고탑보존공사설계도/2, 1910-20년대 추정
도판5. 경북안동군일직면오중전탑보존공사설계도/3, 1910-20년대 추정
도판6. 경북안동군부내면용상리칠중전탑보존공사설계도/3, 1910-20년대 추정
도판7. 경북안동군부내면용상리칠중전탑보존공사설계도/2, 1910-20년대 추정
도판8. 경상북도상주군외남면지사리탑동석탑지도, 1917년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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