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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기타 각종 고적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는 당시 한반도 내의 각종 고적에 대한 보수 또는 이전 공사를 시행하였는데, 이에 관련된 도면들이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각종 사찰, 탑, 고분, 문루 등의 유적에 대해서는 각각의 해제에서 별도로 다루었다. 그리고 도면이 소량으로 남아 있어 그 자세한 전모를 알 수 없는 유적들에 대해서는 현재 북한 소재의 유적들, 경주 지방 소재의 유적들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앞의 해제에서 다루지 않은 나머지 각종 유적에 관련하여 소장되어 있는 도면들을 다루고 있으며, 시설명과 해당 도면의 수량은 다음과 같다.
번호 시설명 지역 도면매수
1 서대문구락부 내 정(亭) 서울 1
2 석고전 서울 2
3 천연정 서울 1
4 수원성 화홍문 수원 1
5 강릉객사 강릉 2
6 영남루 밀양 4
7 작원관 밀양 1
8 촉석루 진주 1
총계 13

 [도판1][도판2]은 ‘이전건물(석고전)실측도’로 석고전을 이전하기 위해 작성된 실측도이다. 석고전(石鼓殿, 또는 石鼓閣)은 조선 고종이 옛 주나라 선왕(宣王)의 고사를 본받아 1902년 원구단의 동쪽 옛 남별궁 터에 건립했던 건물이다. 석고전은 석고단(石鼓壇)의 중심건물이었으며, 정문으로 광선문(光宣門)이 있었다. 1910년 일제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이 석고단의 부지에는 조선총독부 도서관(1923)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석고전은 조선총독부 도서관 건물의 뒤에 존치되었으며, 그 위치를 [도판1]에 포함된 배치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35년에 석고전은 장충단공원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설립된 박문사(博文寺, 1929-31년 건립, 현재 신라호텔 부지)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 건물을 해체하여 박문사의 종각으로 사용하였다.
 도면을 통하여 1935년 시행된 이전의 석고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석고전은 박문사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헐리면서 같이 멸실되었는데, 도면을 통해서 당시 석고전의 양식과 구조를 살펴볼 수 있어, 관련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고전은 벽체가 없는 대사 양식의 건물이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중앙에는 석고(石鼓)를 두고 사방으로 트여 있었다. 국가적인 제례 시설이었던 만큼 다포 양식을 채용하고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려 매우 화려한 자태를 뽐내었으며, 기둥 아래에는 원형의 높은 장초석을 사용하여 그 웅장함을 더하였다.

 [도판3]은 ‘수원화홍문배치도’이다. 화홍문(華虹門)은 1796년 조선 정조가 건립한 수원 화성(華城)의 수문이다. 화홍문과 그 석축은 일제시기인 1924년 홍수로 인하여 무너졌는데, 다음 해인 1925년에 석축은 다시 재건되었다.
석축의 복원과 함께 화홍문 또한 1926년에 재건할 계획이 진행되었으나, 예산의 문제로 인하여 화홍문의 문루는 1932년에 최종적으로 재건되었다.
화홍문은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와 그 위쪽의 누각으로 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방화수류정이 위치하였는데, [도판3]은 그 당시 주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위치, 주변 성곽의 모습들은 현재와 거의 비슷하지만, 현재는 방화수류정의 동북쪽 넓은 연못 안에 도면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섬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도판4]은 ‘밀양영남루배치도/2’이다. 밀양 영남루(嶺南樓)는 현재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건물로 손님을 맞이하거나 휴식을 취하던 장소였다. 이 영남루는 밀양강 절벽 위에 자리잡아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 속에 어울려 있는데, 현종 10년(1844) 개창된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매우 웅장한 건물이다.
 1918년 조선총독부는 밀양 영남루에 대한 대대적인 수선 공사를 시행하였다. [도판4]의 범례를 통해 보면, 영남루(嶺南樓)와 동쪽의 능파각(凌波閣), 서쪽의 침류당(枕流堂), 그리고 각 건물을 이어주는 회랑, 정문을 모두 수선할 계획임을 알 수 있으며, 영남루 주위의 기단도 수선할 계획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전 시기에 침류당과 정문에 덧붙었던 부속가옥들은 모두 철거할 계획임을 볼 수 있다.
 [도판5]에서는 영남루와 능파각, 침류당 및 정문과 부속시설들의 평면 수선 계획을 볼 수 있다. 영남루에 대해서는 마루청판 교체 공사만을 예정하고 있지만, 능파각에 대해서는 마루청판 수선과 일부 추가된 간살이와 벽체를 제거할 예정임을 알 수 있다. 침류당은 가장 변형이 심했던 건물이었는데, 침류당을 당시 관청의 숙사(宿ˆ)로 사용했었¸° 때문이었다. 침류당의 복구는 덧붙은 부속시설을 모두 제거하고, 방으로 변형된 건물의 뒷부분을 모두 다시 마루로 변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침류당이 복구되면서, 기존에 이 곳을 사용했던 숙사(宿舍)는 밀양읍내의 호적소 건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에 관련한 내용을 [도판6]에서 볼 수 있으며, 이 침류당에 대해서는 복구 공사 설계도가 따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도판7] 참조)

[도판8]은 ‘밀양군하동면작원관지도’이다. 작원관(鵲院關)은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동서와 남북을 잇는 요로의 역원(譯院)이었다. 작원관은 고려시대부터 왜적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지로,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이었으며, 나루터의 역할과 관리들의 숙박소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병마절도사 이각 등이 왜적을 맞아 항전을 펼치던 곳이었으며, 일제시기에 철도를 부설하면서 이전되었다. 작원관지(鵲院關址)에는 1939년에 밀양군에서 비(碑)를 설치하였으며, 1983년에 경남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 건물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면에는 작원관의 배치와 단면이 기재되어 있는데, 낙동강과 절벽 사이의 길에 작원관을 설치하여 검문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철도부설계획이 표시되어 있고, 이 철도가 작원관의 부지를 통과하게 되어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도판>
도판1. 이전건물(석고전)실측도/4, 1935 상세보기
도판2. 이전건물(석고전)실측도/2, 1935 상세보기
도판3. 수원화홍문배치도, 연대미상 상세보기
도판4. 밀양영남루배치도/2, 1918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5. 밀양영남루수선설계도/3, 1918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6. 밀양읍내/호적소배치/호적소평면/침류당/1, 1918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7. 밀양영남루내침류당복구수선설계도/4, 1918 상세보기
도판8. 밀양군하동면작원관지도, 1910년대 추정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