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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을 건립한 목적은 조선인을 ‘동화’하여 일본의 통치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을 강점한 직후인 1911년부터 조선신궁 건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예산의 조달과 당시 일본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본격적인 건립의 준비는 1915년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생각했던 조선신궁의 건립후보지는 경성부 안의 한양공원, 왜성대(남산공원), 장충단, 효창원, 사직단, 삼청동, 북악산 기슭(경복궁 신무문 밖) 등이었는데 1915년경 남산 왜성대공원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1920년까지 조선신궁을 완공하려는 계획에 착수하였다. 이 때 조선신궁을 일반신사처럼 남면(南面)한다는 계획을 바꾸어 서북면(西北面)하게 하기로 변경하였다. 이는 예산상의 문제 외에도 일본 민족은 장래 서북쪽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1918년에 이르러 당시 한양공원(현 백범광장과 남산식물원, 남산도서관을 포함하는 일원)에 건립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는데, 왜성대공원 부근은 사유지가 많아 토지구입자금이 너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 5월 28일 기공식이 열리고 신궁 건립이 시작되었다. 총부지 127,900여 평 위에 일본의 신사 견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배전(拜殿)·신고(神庫)·참배소(參拜所) 등 15개의 건물을 배치하였다. 여기에 오르는 돌계단과 참도(參道)를 조성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던 1925년 6월 27일 일본 내각고시에 의해 사격(社格)을 높여 신사의 명칭을 종래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개칭하였고, 동년 10월 15일 진좌제(鎭座祭) 행사를 시작으로 신사가 운영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조선신궁은 그 다음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 행사를 통해 철거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시기 건축도면 중 조선신궁에 관련된 도면은 총 125매이다. 조선신궁의 배치 등에 대해서는 ‘조선신궁조영지(朝鮮神宮造營誌)’, ‘조선신궁기(朝鮮神宮紀)’ 등의 기록을 통해 이미 그 모습이 알려져 있지만, 이 도면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더 상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물 중에서는 서원문·축사사의 설계도를 제외한 조선신궁의 조영에 관련한 주요 도면, 특히, 정전, 배전 등의 설계도는 남아있지 않으며, 계획당시의 배치도 또한 일부만이 남아 있다. 또한 대다수의 도면은 철조책, 하수도 등의 설비에 관련된 도면들이다. 하지만, 이들 도면들을 통해 당시 조선신궁 계획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도판1]은 ‘조선신사설계도’로 신궁 건설 계획의 초기의 것으로, 1918년 신궁의 부지가 한양공원으로 바뀌기 이전 남산 왜성대공원 부지에 계획된 도면으로 추정된다. 이후 도판들과 각종 관련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신궁은 한양공원 터에 일자형 배치로 건립되었다. [도판1]에는 본전(本殿)영역이 배전(拜殿)영역에서 90도 틀어져 배치하는 계획이 기재되어 있고, 부근의 지형 또한 다르게 표시되어 있어 한양공원을 조선신궁의 부지로 정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도판5]와 [도판6], [도판7]은 조선신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던 정전(正殿)의 입구에 건립되었던 서원문·축사사(瑞垣門·祝詞舍)의 평면, 입면, 단면 설계도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신궁 관련 도면에서 유일하게 그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며, 전형적인 일본 신사 건축 양식으로 계획되었음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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