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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육군관련훈련소
 현재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시기 건축도면 중에는 육군관련 훈련소에 대한 것들이 213매이며, 상세한 내용은 다음의 표와 같다.
번호 시설명 공식명칭 도면수
1 제일육군병지원자훈련소 서울 102
2 제이육군병지원자훈련소 시흥 40
3 가설평양육군병지원자훈련소 평양 53
4 제일군무예비훈련소 서울 4
5 제이군무예비훈련소 평양 5
6 제삼군무예비훈련소 시흥 9
총계 213

 일제는 1937년 개전한 중일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됨으로써 발생한 병력부족문제를 조선인의 동원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1938년에 지원병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황국의식을 온전하게 주입시키려는 방법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때 시행된 지원병제도는 17세 이상의 제국신민(帝國臣民)을 기준으로 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서 6개월의 훈련 과정을 거치면 육군병역에 복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8년 6월 15일에 제1기 육군병지원자훈련소가 개소하였으며, 그 위치는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의 제생원양육부로 정하였다.
 그러나 지원병제도의 ‘지원’이란 단어에 불과하였다. 1938년부터의 지원자 및 입소자 통계를 살펴보면, 자발적 지원자는 35%에 불과하고, 관청의 종용에 의한 지원자가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 기간에 걸쳐 일제가 기대한 이상의 지원자를 확보하였다. 이것은 조선인들의 애국열의 표현으로 선전하기에 충분한 결과로서 일제 스스로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였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제는 지원병제도를 폐지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 1943년 3월에 관련 법률을 개정하여 조선인들도 모두 병역의무를 지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1944년부터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다만 징병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반감을 갖지 않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었다.
이것은 온전한 황국신민이 되는 길을 제시하며, 조선인들이 일본인과의 차별철폐라는 반대급부를 기대하도록 조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원활하고 신속한 군사훈련을 대비하여 의무교육을 선행하도록 하였다.
  징집제로의 전환을 위해서 총독부는 그 동안의 육군병지원자훈련소를 군무예비훈련소로 변경하고 훈련기간을 2개월로 단축하였다. 군무예비훈련소는 3개소에 설치되었다. 제1훈련소는 경성, 제2훈련소는 평양, 제3훈련소는 시흥에 조성되었고, 기존의 육군병지원자훈련소는 폐지되었다.
  징집제는 단순히 조선인을 병력자원으로 이용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들이 일본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칠 정도로 황민화가 진척되었다는 확신의 시험무대가 되었다.

 [도판1][도판2]는 경성에 개설된 제일육군병지원자훈련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치도이다. 제일육군병지원자훈련소는 부지의 중심에 본관을 위치시켰고, 그 남쪽으로 대강당, 무도관, 숙사를 위치시켰으며, 북쪽에도 대규모 숙사와 취사장 등이 배치되었다. 훈련소는 훈련병의 숙식과 교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로 운영되었음을 볼 수 있다.
 [도판3]은 대강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계도이다. 조적조 단층 건물로 계획된 대강당에는 대규모 인원이 모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둥이 없는 넓은 홀을 계획하였으며, 여러 곳에 출입구를 계획하여 출입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도판4]는 훈련병들이 숙박하는 병사(兵舍)의 설계도이다. 병사는 조적조와 목조 혼용의 2층 건물이었으며, 내부에는 중앙 복도 좌우로 침실이 반복적으로 배치되었다. 외벽과 주요 내력벽은 벽돌로 쌓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목조로 계획되었다. 침실의 바닥은 나무 판자로 되어 있었다.
 [도판5]는 교사(校舍)의 설계도이다. 교사는 목조 단층 건물로 매우 간이하게 만들어졌으며, 목조트러스를 사용하여 경사지붕을 계획하였다. 후면에 복도를 두고, 전면으로 교실들이 위치하였다.
다른 건물들 역시 [도판4][도판5]에서 볼 수 있는 정도로 간이하게 계획되었음을 다른 도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판6]은 1944년 평양에 개소된 제이군무예비훈련소의 배치를 보여주는 도면이다. 도면의 작성 목적은 각 건물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 공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제이군무예비훈련소의 부지는 남북으로 긴 대지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계획되었다. 중앙에는 운동장이 위치하였으며, 운동장의 북쪽으로 사무실과 직원들의 관사가 배치되었고, 남쪽으로는 경사지에 축대를 쌓아 병사(兵舍)와 취사장, 세면장, 변소 등을 계획하였다.
평양의 제이군무예비훈련소의 전신은 가설평양육군병훈련소였는데, 이 훈련소의 배치도를 [도판7]인 ‘가설평양육군병지원자훈련소배치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판7][도판6]과 동일 지역의 배치를 그리고 있으며, [도판6]에서 보이는 건물들 중 일부만 계획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배치도의 비교를 통해, 제이군무예비훈련소가 가설평양육군병지원자훈련소를 계승하여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도판7]에는 평양 시내의 지명인 ‘경창리(京昌里), 신양리(新陽里)’라는 지명이 기재되어 있어, 훈련소가 설치된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도판8]은 ‘시흥군무예비훈련소변소기타신축공사설계도’로, 시흥에 설치되었던 제삼군무예비훈련소의 일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훈련소에 대해서는 전체 배치가 기재된 도면이 남아 있지 않아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도면에는 각 병사(兵舍)들이 경사지에 축대를 쌓고 병렬적으로 계획되었음이 기재되어 있다.
 제삼군무예비훈련소의 전체적인 모습은 [도판9]인 ‘제이육군병지원자훈련소전기설비공사설계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제이육군병지원자훈련소는 제삼군무예비훈련소의 전신이었다. 이 도면에서 [도판8]에 기재되어 있는 병사들의 모습 외에 전체적인 배치를 볼 수 있는데, 경사지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각종 병사와 교실 건물을 배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지의 위쪽에는 총 8개의 병사가 계획되었으며, 아래쪽에는 운동장과 교실, 대강당(太講)이 위치하였다.

<참고 도판>
도판1. 제일육군병지원자훈련소제육호사신축기타공사설계도/ 배치도, 1938~1940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2. 육군병지원자훈련소가변소급정호건물신축배치도, 1938~1940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3. 육군병지원자훈련소신축기타공사설계도/ 강당지부, 1938~1940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4. 육군병지원자훈련소신축기타공사설계도/ 병사일호지부, 1938~1940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5. 지원병훈련소건물신축공사설계도/ 교사, 1938~1940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6. 조선총독부제이군무예비훈련소급수공사설계도, 1944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7. 가설평양육군병지원자훈련소배치도, 1938~1944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8. 시흥군무예비훈련소변소기타신축공사설계도/ 목책지부, 1944년 추정 상세보기
도판9. 제이육군병지원자훈련소전기설비공사설계도/ 가공배선로평면도급배치도,1938~1940년 추정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