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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진보당 사건이란 > 진보당사건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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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은 1957년 9월 서울특별시경찰국(이하 ‘서울시경’으로 줄임)이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의 불법성과 당수인 조봉암이 조총련계 간첩 정OO의 간첩활동을 방조하였다는 혐의를 인지하고 수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시경은 1958년 1월 12일 윤길중, 조규희, 박기출 등 진보당 간부들을 체포하였고, 1월 14일 조봉암은 자진 출두했다.
초기 수사단계에서 검찰과 서울시경은 조봉암이 거물 정치인이라는 점과 합법적으로 성립된 정당에 대한 전면 수사라는 점에서 그 중대성을 인식하고, 잇따른 다른 기자회견을 통해 진보당사건의 수사 동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서울시경 측에서는 여러 간첩사건과 진보당을 연결시키려고 했고 검찰 측에서는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위반된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서로 일치점을 찾지 못한 채 한동안 뒤죽박죽으로 사건결과가 발표되었다.
진보당 사건 처리과정을 살펴보면, 사건수사 초반에 서울시경이 기소하였던 간첩들과 진보당의 접선혐의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후반에는 검찰ㆍ서울시경이 일치된 방향으로 진보당의 수사방향을 ‘평화통일론’의 위법성 여부와 양이섭이라는 ‘이중간첩’으로부터 정치자금 수수라는 간첩사건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첫 번째 쟁점인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정부 측이 발표한 기소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골자로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통일론과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는 혐의였다.
두 번째 쟁점은 조봉암이 북한과 남한의 첩보조직 사이에서 이중간첩으로 활약하고 있던 양이섭을 통해 1955년과 1956년 사이에 북에서 온 약 2,500만환에 달하는 자금을 받아 진보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2가지 쟁점에 대해 1958년 7월 2일 1심에서는 진보당의 강령이 대한민국의 기본적 원리를 손상시키지 않았다고 규정하였으나 간첩죄 여부에 대해서는 양이섭의 ‘자백’을 토대로 하여 조봉암에게 5년을 선고하였다. 양이섭에게는 국가변란 혐의 죄로 5년을 선고하고 대부분의 다른 진보당관련 피고인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런데 1심 판결이 있는지 사흘 후인 7월 5일 ‘반공청년단’이라고 자칭하는 2~3백 명의 청년들이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간첩 조봉암을 처단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법원에 난입하는 재판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10일 후 또 다시 친공판사를 규탄한다고 대한문 앞에 모였다가 무장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로 인해 1심에 관여했던 법관 유병진, 이병용, 배기호 등은 한동안 피신해 있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배후조종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색출하여 엄단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난입난동으로 체포된 청년들을 일부 구속, 석방, 즉심회부 등 너그러운 처사로 흐지부지 처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유당은 국회에서 야측이 제시한 법원난동사건진상조사단 구성안을 거부했다.
사법부는 법원데모사건으로 확실히 위축되었다. 때마침 정계는 야당탄압의 도구로 등장할 국가보안법 개정파동으로 정국이 극도로 긴장과 불안에 휘말려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열린, 1958년 9월 김용진 판사가 담당한 2심판결에서는 검찰의 공소사실이 인정되어 검찰의 구형대로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검찰이 주장한 조봉암의 간첩죄 적용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1, 2심의 처리과정에서 조봉암은 양이섭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으나 그 돈이 북한에서 온 것이라는 점은 몰랐으며 북한과 내통했다는 검찰의 공소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인들의 진술은 조봉암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우선 HID(대북공작기구)에서 양이섭에 대한 감시감독을 책임졌다는 엄OO은 자신이 양이섭의 이북 왕래시 소지품 검사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북한과 주고받았다는 돈이나 약재 등은 자신이 아는 한 없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조봉암 간첩죄의 유일한 증인이자 피고인인 양이섭도 2심에서는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했다. 그것은 특무대의 고문과 협박, 회유에 못 이겨 한 ‘거짓자백’이었다고 번복 진술한 것이다.
상식대로라면 1심에서 양이섭의 자백으로 징역 5년의 유죄판결이 내려진 만큼 2심에서는 양이섭이 그 자백을 번복하였으니 검찰 측에서 그에 대한 반증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간첩죄는 백지화되어야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오히려 양이섭의 번복 진술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또 조봉암에게 유리한 진술들을 무시하고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러한 1심과 2심의 판결 차이에 대해 이승만대통령이 직접 국무회의 석상에서 “한 법을 가지고 판이한 재판을 하게 되면 국민은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판단하기 힘들다. 재판의 권위를 세워줄 것을 사법부에 요망한다.”라는 함축적인 발언을 하여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것은 그만큼 이 사건에 대한 이승만대통령의 관심이 크다는 것이었고 신문에 보도된 이 발언은 대단한 압력을 사법부에 가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었다.
1958년 12월 24일(24파동) 정당의 입을 막고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릴 속셈으로 내놓은 신 국가보안법이 국회의사당에 무술경관 200명을 불러들여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상태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곧 1959년 2월 27일 진보당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은 첫 번째 쟁점인 평화통일정책에 대해서는 ‘언론자유의 한계를 이탈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조봉암의 간첩죄 여부에 대해서는 양이섭의 1심 자백과 돈을 받은 사실 그리고 감방 안에서 양이섭에게 전하려 했다는 조봉암의 쪽지가 중요 증거가 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진보당을 불법단체로 판시하였다.
조봉암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었지만 바로 상고심을 맡았던 그 재판부가 다시 재심을 맡았다. 자기가 맡은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사람은 없을 것임으로 결과는 뻔했다. 1959년 7월 30일 재심은 기각되었고 다음날인 7월 31일 오전 11시에 사형이 전격 집행되었다. 유일한 증인이었던 양이섭은 이보다 이틀 앞서 이미 처형되었다. 그의 번복 진술을 뒤집을 기회조차 막아 버린 뒤였다. 대법원의 판결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탄생한 진보당이었지만 결국 완전히 불법단체로 규정되어 소멸되고 말았다. 그 뒤 1년도 못되어 4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승만 ·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진보당의 당세 확장을 저지하고 궁극적으로 제거할 필요성에서 진보당사건을 일으키고 법적 절차라는 합법적 요건을 갖춰 진보당과 조봉암은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이상 1심에서 대법원판결까지 이르는 재판의 진행과정은 법률적용이나 절차상의 공정성 여부에서 여러 가지 의혹을 남겼다.
법률상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은 첫째, 조봉암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유일한 증거가 되었던 양이섭의 자백이었다. 양이섭은 2심에서 1심의 자백을 번복했기 때문에, 검찰 측에서 1심 자백만 기초하여 뚜렷한 다른 보강 증거도 없이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한 것은 증거불충분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운 형벌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진보당사건은 진보당의 정강정책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다는 당 자체의 불법성을 주장하는 기소 건과 조봉암 · 양이섭이 간첩임을 주장하는 기소 건을 병합 심리한 것으로 두 사건은 구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 강령의 합법성은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행위를 토대로 당을 불법 판시한 것은 법률의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재판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의혹들이 진보당사건이 단순하지 않은 정치적 배경을 갖는 정치재판이며 따라서 재판과정에서 정치권력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진보당사건은 왜곡되고 이승만정권의 정치적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오유석, 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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