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 |
존립기간 |
1967.02.07
~
1980.10.27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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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치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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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관연혁 |
신민당은 제3·4 공화국하의 제1야당이었던 보수정당으로 1967년의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중당?신한당 등 보수야당 세력을 통합, 1967년 2월 7일 창당되었다. 전통보수야당의 맥을 이어받은 신민당은 반독재와 평화적 정권교체 등 2대 투쟁목표를 내걸고, 여당인 공화당을 상대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전에서 패배한 윤보선이 당 일선에서 물러나 유진오 총재의 영도 아래 구 민중당계가 주도권을 잡았다. 1969년 9월 7일에는 3선개헌안 부결을 위하여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자동상실을 노리고 당 해체를 결의하였으나 14일 만인 9월 20일 다시 창당절차를 밟아 원상회복했다. 1969년 말 유진오 총재가 사퇴하자 1970년 1월 유진산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겨냥하여 ‘40대 기수론’이 대두되면서 1970년 9월 김대중이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여당의 박정희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다. 그 후 당은 진산계와 반진산계로 양분되어 당권의 정통성 문제로 법정투쟁을 벌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된 뒤, 1973년 1월 반진산계의 양일동·윤제술·유청 등이 탈당, 민주통일당을 창당함으로써 통합야당은 분열되었다. 1974년 4월 유진산이 죽자 8월에 김영삼이 총재가 되었으나 당내 파동으로 실권하고, 1976년 5월 이철승이 당권을 장악, 집단지도체제로 대여 온건노선을 지향했다.
1978년 12월 12일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신민당이 유효득표수에 있어 여당인 민주공화당보다 1.1%나 앞서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약 3년 만에 다시 당권을 잡은 김영삼은 대여 강경노선을 취하여 국회의원 제명처분을 받았다. 이로써 부마민주항쟁이 촉발되기도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의 사망으로 김대중이 복권되자, 신민당 내부는 김영삼계(상도동계)와 김대중계(동교동계)로 분열 대립하는 와중에서 12.12사태 후 권력을 잡은 신군부의 등장을 맞았으며,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정 헌법에 의하여 다른 정당과 함께 자동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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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관장 |
유진오 총재
(
1967.02.07
~
1970.0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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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산 총재
(
1970.02.17
~
1971.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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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총재권한대행
(
1971.05.12
~
1971.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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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총재
(
1971.10.16
~
1972.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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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산 총재
(
1972.09.28
~
1974.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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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택 총재권한대행
(
1974.05.08
~
1974.0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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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총재
(
1974.08.27
~
1976.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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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총재
(
1976.09.21
~
1979.0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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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총재
(
1979.06.07
~
1980.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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