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을미년(乙未年) 청양(靑羊)의 해다. 미(未)는 12지(十二支) 동물 중 여덟 번째인 양(羊)이며, 육십갑자 순으로는 을미(乙未, 청색), 정미(丁未, 적양), 기미(己未, 황양), 신미(辛未, 백양), 계미(癸未. 흑양) 중 첫 번째에 해당되어 올해는 푸른 양의 해이다.
한국인들에게 양은 착하고, 의롭고, 참을성 있고,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모습에서 은혜를 아는 동물로 여겨져 왔는데, 올해는 활동성과 희망의 색인 청색이 더해진 청양의 해여서 여느 양띠 해보다 더 큰 행운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선명한 청색은 보호색이 되기 어렵기 때문에 청색을 가진 동물이 흔하지는 않은데, 그나마 양은 면양, 산양을 모두 합쳐도 청색은 지구상에 없다. 굳이 옅게나마 푸른색이 섞인 양을 꼽는다면, 히말라야와 파키스탄 고원에 살고 있는 산양이 가장 가깝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금나라에서 들여 온 것과, 근래 수입한 면양, 자생종 산양 등이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217호로 백두대간 기암절벽에 살고 있는 토종 산양이 청(乙), 적(丁), 기(己), 백(辛), 흑(癸) 중 청(乙)에 해당된다. 몸 길이가 약 130㎝로 히말라야 산양 165㎝ 보다는 많이 작은 편이다.
속죄양(贖罪羊)이나 희생양(犧牲羊)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이었다.
고려 때 금나라에서 들여 온 것도 식용이기 보다는 제사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제례에 관한 고서 대부분이 양을 제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의 기록에 나오는 양은 면양(綿羊)이 아니라 염소 또는 산양일 것으로 추측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양의 해를 맞아 마련한 <행복을 부르는 양> 특별전에 양정(羊鼎, 양을 담는 그릇)을 전시 중이며, 『세종실록』『오례』에도 양정 그림이 나온다. 전시품과 그림을 보면, 양머리를 본떠 만든 3개의 다리가 이 그릇을 받치고 있는데, 그 모양이 면양 보다는 염소 또는 산양에 가깝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양의 쓰임새나 수량에 대해 정하고 있는 제사의식이 수 없이 많다. 『정종실록』 3권 1400년 1월 24일 다섯 번째 기사는 지금까지 나라제사에 소, 양, 돼지를 모두 올렸는데, 봉상시 소경 김첨이 양 3마리만 올리자고 건의한 것은 경솔한 판단으로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태종실록』 7권 1404년 6월 9일 첫 번째 기사는 예조에서 제사의식을 상정한 것으로 양을 노루나 사슴으로 대용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양정(羊鼎)
조선 초기에는 양이 제수용으로 쓰기에도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 24권 1412년 8월 14일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이 "양은 제물로 쓰기 위해 기르는 것이니 궁중의 잔치에는 쓰지 말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세종실록』 51권 1431년 3월 26일 두 번째 기사는 신하들이 임금의 치료를 위해 건의하는 내용이다. 대언들이 "신들에게 갈증 치료약을 명하셨기에 알아 본 바, 먼저 음식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흰 장닭, 암꿩, 양고기가 좋습니다."라고 아뢰자 임금이 "꿩을 바치는 자야 있겠지만, 양은 본국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니, 더욱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신하들이 약용이니 한 마리씩 바치게 하여 치료에 시험하자고 청했으나 끝내 사양했다.
이때까지는 중국 황제의 선물이나 무역을 통해 소량으로 들여왔기 때문에 임금의 약으로 쓰기에도 망설일 만큼, 부족했던 것 같다. 『태종실록』 16권 1408년 9월 28일 첫 번째 기사는 중국 황제가 상을 당한 태조에게 보내는 부조품목과 부의를 전하는 것으로 견·포 각 500필, 양 100공(중국 계량단위), 술 100병을 보내니
영수하라는 내용이다. 이후로도 양은 황제가 조선 임금에게 주는 단골 선물이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살아 있는 양과 함께 양고기 포가 추가되었다.
조정에서 양을 제수용으로 쓰기 위해 직접 수입해 온 것은 태종 11년인 1411년이 처음이다. 『태종실록』 21권 4월 15일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이 "제사에 쓸 양이 필요하니 요동에 사람을 보내 사오라." 명했다는 내용이다.
『태종실록』 28권 1414년 12월 13일 두 번째 기사는 양 무역을 정례화하라는 것으로 임금이 "앞으로는 별도의 지시가 없더라도 중국에 갈 때는 현금화할 수 있는 포목을 가져가 암양을 사오라"는 명이다.
황제의 선물이나 무역만으로는 왕실에서 쓰는데도 크게 부족하자 예빈시에서 직접 사육했으나 부담이 커지자 각도에 분산시켜 사육했다. 『태종실록』 31권 1416년 5월 7일 세 번째 기사는 염소, 양, 당저(중국산 수입돼지), 오리, 닭을 사육하는데 쌀과 콩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 각 도로 보내어 사육하게 하자는 내용이다. 세종 10년인 1428년부터는 제사에 숫양을 쓰도록 했다. 4월 6일 예조는 전구서(典廐暑)의 요청을 받아들여 암양은 번식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숫양은 많이 길러도 소용이 없으니 종묘의 제사에 숫양을 쓰라고 지시했다.
수요가 계속 증가하자 의정부가 확대에 나섰다. 『세종실록』 81권 1436년 4월 18일 세 번째 기사는 각 도와 제주도에 각각 암양 4마리, 숫양 2마리를 보내 착실한 농가 2가구를 선정하여 분양하게 하고 3년 후 회수하되 그동안 번식한 양은 농가에서 갖게 하자는 건의이다. 요즘으로 치면, 시범보급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13년 후인 1449년 4월 14일 세 번째 기사는 각 고을에서 양을 사육하는 농가는 말 목장의 경우처럼, 최소한 어미 양 10마리, 새끼 양 5마리 이상을 유지하게 하고, 그 이하의 농가는 처벌하자는 내용이다. 시범사육에 성공하여 양 목장의 규모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양 사육이 증가하면서, 이로 인한 폐해나 부실관리, 비리가 잇따랐다. 『세종실록』 29권 1425년 8월 22일 두 번째 기사는 양 사육으로 인해 경기도에 끼친 피해를 구제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날 호조에서는 예빈시가 고양현에 양과 돼지농장을 설치하여 많은 비용과 인력을 부담하고 있으며 운반까지도 백성들이 맡고 있는데, 고양현 백성들만 이런 피해를 보아야 하느냐며 구제해 주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양을 잘못 관리했거나, 비리가 드러나 파직 당한 관료도 무수히 많았다. 태종 14년인 1414년 8월 28일 상호군 허권은 전구서 소유 이엉 3천여 속을 무단으로 주었고, 사가에서 허락 없이 양 2마리를 사육하다 적발되어 직위해제 되었다. 세종 2년인 1420년 5월 7일 한성부윤 서선은 사돈의 종이 양을 길러야 할 전구서 마당에 채소를 심은 것이 발단이 되어 파면 당했다. 양 사육과 관련한 비리로는 세종 3년인 1421년 5월 21일 우정언 이옹이 양과 돼지사료 구입비로 쌀 10석을 과다하게 지급한 것이 적발되어 장 90대의 처벌을 받았으며, 성종 7년인 1476년 12월 6일에는 김주가 양을 구입한다는 핑계로 관고(官庫)에서 면포 40필을 빼낸 것이 적발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사조치 없이 포탈한 재물을 모두 환수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양 사육이 증가하면서 부산물을 이용한 장식품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다. 『세종실록』 97권 1442년 9월 25일 두 번째 기사는 문란해진 의복과 장식물을 바로잡자는 건의이다. 의정부는 "조정의 신료들은 물론, 지방의 향리들까지 옥으로 갓끈을 만들고 양각(羊角)으로 띠를 만드는 등 제멋대로 장식물을 사용하고 있어 예절과 신분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있다."며 "양각대와 백옥은 당상관까지 사용하게 하되 꽃무늬를 조각한 흰 양각대(花白羊角帶)는 정2품 이상도 이용할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사치스러운 양각 장식품의 착용을 금지하는 조치가 여러 차례 내려졌으며, 성종 9년인 1478년 12월 21일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 온 한치형이 황제가 요구하는 물목(物目)을 보고했는데, 여기에도 오를 만큼 화려해지고 고급화되었다.
전구서 예빈시가 제수용으로 양 사육을 시작한지 60여 년이 지나면서 양이 식용뿐만 아니라, 의복소재로도 사용되었다. 『성종실록』 81권 1477년 6월 24일 두 번째 기사는 호조에서 평안도 백성들의 곤궁한 형편을 감안하여 공물을 품목에 따라 경감해 달라는 건의이다. 호조는 품목에 따라 향후 3년, 5년, 20년간 경감해 주고 일부 품목은 영구면제를 요구했는데, 산양피는 3년 경감품목에 해당된다. 『성종실록』 232권 1489년 9월 23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이 영돈녕 이상에게 야영 시 덮으라며 산양피 이불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양의 반전도 있다. 조정의 적극적인 보급으로 나라 제사의 제수나 임금의 약으로나 쓰이던 귀하신 몸에서 전국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가축이 되면서 욕에도 쓰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인간 이하의 죄를 지었거나 파렴치한 사람에게 금수(禽獸)만도 못한, ×·돼지만도 못한 ×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개·양 같은×이라고 표현했다. 『세조실록』 19권 1460년 3월 8일 첫 번째 기사는 전날 열린 명나라 사신연회에 관한 것이다. 공식연회를 마친 뒤 장녕과 박원형이 사신만을 위한 2차로 기녀와 음악이 있는 술자리를 준비했는데, 장녕이 "이 자리는 대인이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마련했다. 털끝만치라도 여색을 가까이 한다면 개나 양과 다를 게 무엇이요?"라며 사신의 엉큼한 생각을 에둘러 차단하자, 머쓱해진 그도 어쩔 수 없이 "나도 같은 생각이오."하며 숙소로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임금의 기록인 만큼 많이 순화되었겠지만, 오늘날처럼 심하게 상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세조실록』 24권 1467년 5월 10일 두 번째 기사는 신숙주와 한명회가 변방의 방어계책을 의논한 것으로 "의주가 여러 번 견(犬)·양(羊)의 욕을 당한 것은 백성들이 자주 월경해 밭을 경작하기 때문이다."는 설명이 있다. 『성종실록』 127권 1481년 3월 11일 첫 번째 기사는 사신이었던 신순효의 보고로 "나라가 저 개나 양 같은 더러운 무리와 승부를 겨루려면 대비책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언어는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양이 들어가는 표현도 개체수가 줄고 쓰임이 줄면서 점차 사라지고 사육두수가 크게 증가한 돼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기후와 풍토가 양을 사육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조정의 적극적인 보급에도 개체수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오히려 점차 감소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 온 이후 한때 임금도 못 먹던 귀한 고기에서 욕에 쓰이는 하찮은 동물로 전락하는 영욕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양은 여전히 착하고(善), 의롭고(義), 아름다운(美) 동물이다.
희망과 행운의 청양의 해를 맞아 우리 모두에게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한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