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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극동 아시아 고려사람

연해주시절~강제이주

독립국가연합은 1991년에 구소련이 해체된 후 그해 12월 21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중심으로 발틱 3국을 제외한 12개 구소련 공화국들이 결성한 정치연합체이다. 한인들은 이런 정치연합체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다.

현지에서 고려사람 또는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러시아·독립국가연합 한인의 이주는 제정 러시아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1860년에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조약으로 러시아는 우수리 강 동쪽 지역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러시아와 조선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인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근접성은 양국 간의 관계를 촉진시켰다. 1869∼1870년에 발생한 이북지역의 대기근은 러시아로의 대규모 이민을 일으켰다. 이민이 시작되고서 처음 10년 동안 이 지역 지방관리들은 한인 이민자들에게 관대했다. 이들이 거의 황무지와 같은 땅을 개간하고 소작인, 임차인, 또는 농업노동자로서 농업생산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짜르정부는 러시아인의 이주를 통한 개발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인과 한인의 인구증가는 경작할 토지를 둘러싼 경쟁을 일으켰고, 현지 주민들과 관료들은 경쟁으로부터 한인을 배제하기 위해 더 이상의 한인의 이주를 금지하고 이미 정착한 한인을 내륙지방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1884년에 체결한 ‘조로수호통상조약’에서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법적 지위와 이주를 통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한인에 의한 개발은 이후에도 계속 추진되어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즈음에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는 10만 명가량으로 증가하였다. 이중 81,825명이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였고 이 수는 연해주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했다.

연해주 지역으로의 이주는 처음에는 경제적 문제로 촉발되었지만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연해주 지역을 독립운동 전진기지로 삼기 위한 이주가 시작되었다. 독립운동가, 지식인들이 고국 땅을 넘어서 이 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망명, 독립운동 성격을 띠는 이주는 조선에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1900년을 넘으면서 27,880명이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54,076명으로 거의 두 배로 증가하였다. 가장 큰 규모의 이주는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발생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연해주 지역에서 정착하였다.

한인은 연해주 지역에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고 만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논농사를 이 지역에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이들은 소규모의 가족을 중심으로 파종에서부터 수확에 이르기까지 영농의 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물론, 비록 적은 토지일지라도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단위 면적 당 수확량을 높여 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진적인 영농방법과 특유의 근면성으로 인해 한인은 연해주 지역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게 되었다.

한인은 이 지역에서 경제적 성장에 기초하여 민족문화, 교육을 장려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고국의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기지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28년 전로중앙집행위원회에 극동조선공화국의 수립을 청원하는 등의 자치주 건설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은 좌절되어, 고려사람은 다른 지역으로 강제 분산되었다. 특히 1937년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을 앞두고 한인이 일본의 첩자역할을 할 것이라는 군사적 우려와 중앙아시아의 낙후된 지역을 이들의 노동력에 의해 개간한다는 경제적 목적 하에 171,781명의 한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한인에게 있어서 1937년 8월 21일은 자신들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날이었다. 이날에 소련 지도부는 극동지역의 한인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집단 이주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주대상이 되는 사람은 소유물, 농기구, 동물 등을 소지할 수 있고, 이주민이 두고 간 동산, 부동산, 파종 종자 등은 가격을 계산하여 보상한다고 되어있었다. 그리고 원하는 경우 국외로 떠날 수 있게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인민위원회는 이주민을 위한 정주구역과 지점들을 빠른 시일 내에 선정하고, 이주민들이 새로운 장소에서 경제활동을 재개하도록 보장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명령은 말로는 상당히 인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이주에 필요한 충분한 준비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비좁은 차량에 연료, 의료, 식량 외의 다른 소지품을 가져갈 수조차 없었다. 두고 간 재산에 대한 보상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만주와 조선으로 이주하려고 할 경우에는 이적행위자로 간주되어 처벌받았다. 카자흐스탄 인민위원회는 1938년 3월에야 이주민에게 정주구역을 정해주었으며 경제활동 재개에 필요한 도움은 물자의 결핍으로 줄 수 없었다.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의 희생자였던 중앙아시아의 인민들은 수천 가구의 한인 이주민의 생활보장을 할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 후 한인의 정착은 이주 과정만큼이나 힘든 것이었다. 물자의 부족, 주거문제, 노동자, 공무원, 가내수공업자의 취업, 농기구의 부족, 의료시설미비 등의 문제가 당장 발생하였다. 이주민들은 주로 새로운 집단농장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는데 1939년 초 카자흐스탄 전 지역에 총 70개의 한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어 8,037가구 35,724명이 거주하였다. 이 중 13개는 어업 집단농장이었고 나머지는 농업 집단농장이었다.

  • 독립국가연합의 한민족(1996) 재생

    독립국가연합의 한민족(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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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러시아1(1997)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러시아1(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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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군의 수기: 러시아편2(1995)

    독립군의 수기: 러시아편2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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