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400년 전에도 병선 兵船 빼앗겨, 선조 “말하기도 창피” 격분

「조선왕조실록」 - 중국 해적 서해안 출몰 체포과정서 수십명 사상자 내기도

뉴스 썸네일
해경, 불법조업 중국 어선에 공용화기 첫 사용(사진출처: 2016. 11. 1. 18:00 ytn뉴스)

한국 해경이 지난 1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소청도 남서방 91km 해상에서 불법조업을 한 중국어선 2척을 나포하는 과정에서 해경 고속정을 들이 받는 등 저항하는 중국어선 수십 척을 기관총 700여 발을 발사해 제압했다. 이는 지난 10월 7일 중국어선이 우리 해경정을 고의로 들이받아 침몰시킨 것과 관련, 우리 해경이 필요하면 함포사격과 선체충돌 등으로 강력히 대응한다고 경고했음에도, 여전히 불법조업과 물리적 도전을 계속한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2일 화춘잉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한국 측의 무력을 사용한 폭력적인 법 집행 행위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시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우리 외교부도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이번 법 집행의 근본 원인은 중국어선의 불법조업과 중국어민들의 조직적, 폭력적, 고의적 도전행위에 있음을 강조한다”며 “공용화기를 포함해 우리 해경의 법 집행에 대한 중국 측의 문제제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같은 날 외교부는 또 주한중국대사관 총영사를 불러 “중국 정부가 중국어선의 불법조업과 폭력저항 근절을 위한 실효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이에 앞서 우리 외교부는 해경정 침몰과 관련, 채증자료를 전달하고 도주선박과 어민에 대한 수사와 검거 등 가시적인 조치를 촉구했으나, 중국은 아직까지 이렇다할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양국이 성명전을 벌이며 일촉즉발의 대립을 벌인 이날도 중국어선이 제주 해상에서 불법조업을 벌이다 나포되는 등 중국 당국의 미온적인 대처와 방조 속에 중국어선의 불법조업과 우리 연안 싹쓸이어로가 계속되고 있다.

수세기 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왜구들에 가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 해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 도서 주민들의 해상 노략질이 본격화 된 것은 1600년대 초부터 이다. 해금(海禁)정책을 펴던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요동반도 앞바다 군도(群島)를 근거지로 하는 해적들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 해안에 출몰하여 온갖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다.

「선조실록」 1607년 3월 13일 일곱 번째 기사는 우리 해경정을 침몰시킨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는 무용(武勇)도 기세도 없는 나라구나. 변방의 장수라는 것들이 용렬하기 짝이 없다. 회초리로 잡을 수도 있는 해랑도(海浪島, 요동반도 앞 해역 군도 중 하나로 해적들의 주요 근거지여서 훗날 중국 해적을 해랑적이라 함)의 두건 쓴 도적도 감당하지 못하다니, 이것이 산 송장이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말하기도 부끄럽다. 병사(兵使) 권준과 군졸들은 물론, 그 지방의 관원들까지 모두 잡아 들여 처벌하라” 선조가 이처럼 크게 화를 낸 것은 해랑적 소탕에 나선 수군이 병선(兵船)을 빼앗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4년 전부터 단속강화를 명했는데도, 이처럼 무기력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지도 썸네일 이미지
해랑도 (출처 : 구글지도)

선조 36년인 1603년이다. 「실록」 7월 1일 네 번째 기사는 비변사가 해랑도 해적에 대해 보고한 내용이다. 해랑적이 강화도 미곶(彌串)에서 양곡 실은 배를 약탈하여 큰 이익을 본 이후로 해적들의 출몰이 크게 늘었다. 우리 병선의 무기를 강화하고, 어선이나 화물선으로 위장하여 해적들을 유인하는 방법으로 체포하자고 건의했고, 임금이 흔쾌히 이를 윤허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강조해 왔었다.

1607년 3월 14일 두 번째 기사는 해랑적 피해현황을 중국 측에 통보하자는 내용이다. 선조는 “일찍이 듣건대 해랑도는 서해의 경계에 있어 중국 범법자들의 소굴이다. 이대로 두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조곡선까지 넘볼 것이 틀림없다. 해랑적의 출물현황과 피해 규모 등을 상세히 알려 중국 당국이 체포 또는 단속할 수 있게 하라”고 비변사에 명했다.

해랑도의 존재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성종 23년인 1492년이다. 같은 해 8월 4일 두 번째 기사는 선전관 신은윤의 발고로 의금부가 해랑도를 무단 출입한 고익견을 문초한 내용이다. “지난 5월 마포를 출발해 평안도 선천을 거쳐 3, 4일 후에 도착했는데, 섬에는 중국인이 다섯 가구, 제주 주민이 20여명 살고 있었으며 화전을 일구거나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의금부에 의견을 물었다. “당연히 쇄환(刷還,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백성을 데려옴)해야 하는데, 중국인들과 섞여 있어 불상사가 있을 수 있으니, 중국에 먼저 통보하자” 이에 의금부는 쇄환계획이 구체화 되면, 그때 하자는 의견을 냈다.

우리 백성이 해랑도를 약탈해 온 사건도 있었다. 「성종실록」 1494년 10월 17일 두 번째 기사는 의금부의 보고로 양민 장잉질동(張芿叱同) 등이 법을 어기고 해랑도에 들어가 육포 2,070첩(帖), 가죽 101장, 곡물 80석(碩)을 빼앗아 왔다.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이지만, 바다에서는 경계를 구분할 수 없고, 살려 준 전례도 있어 사형은 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양민 몇몇에게 재산을 탈취당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세력이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죄를 짓거나 세금을 피해 해랑도로 들어가는 조선인이 크게 늘자 조정이 대대적인 쇄환계획을 세웠다. 연산군 6년인 1500년 3월 20일 첫 번째 기사는 강제쇄환 시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회의였고, 4월 3일 첫 번째 기사는 우리 쇄환계획에 대해 중국이 자신들의 입장을 밝혀 온 것이었다. “귀국이 불법 거주자가 더 늘기 전에 강제쇄환하기로 한 것은 적절한 조치이다. 특히 우리 백성이 다칠까 염려하여 관원을 파견하여 달라고 요청한 것은 대국에 대한 성의를 다한 것으로 본다. 따로 관원을 파견하지 않겠으니, 무고한 백성들이 살육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하고, 혹시라도 중국 백성이 납치되면 속히 송환하라.” 오만방자한 칙서이긴 하지만, 양국의 협조 속에 쇄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이다.

이처럼 중국의 동의를 얻어 같은 해 6월 초무사 전임(田霖)과 부사 이점(李坫)을 지휘관으로 포작선(鮑作船, 해산물 채취용 어선) 26척에 나누어 탄 수색대가 해랑도와 인근 도서에서 101명을 체포해 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 극렬하게 저항하던 중국인 두목 이경(李敬)이 쏜 화살에 수색 중이던 갑사 평자중(平自中)이 희생되었다.

이날의 쇄환작전 기록은 100여년 후 유용한 정보로 활용되었다. 1607년 3월 선조가 해랑적 단속을 중국에 요청하려 하자, 비변사가 이때의 기록을 인용하며 반대했다. 선대에도 이들 도서를 수색했는데, 잡힌 자 중에는 중국인이 64명 우리나라 사람이 48명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병선을 공격한 자들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가 난처해 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결국 중국의 협조를 포기하고, 해랑적을 유인하여 체포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때부터 위장 유인하는 방식이 해랑적을 체포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는데, 이는 해랑적의 특성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는 해랑적의 위세가 변변치 않아 10여 명씩 작은 배를 나누어 타고 떼를 지어 다니다가 자신들 보다 약한 선단이나 배를 골라 공격했다. 따라서 요즘의 고속정처럼 기동력이 좋은 작은 배를 어선이나 화물선으로 위장해 유인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랑적이 날로 흉포화 해져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낸 충돌도 있었다. 같은 해 6월 19일 두 번째 기사인데, 철산군수 유민(柳旻)과 미관첨사(彌串僉事) 강효업(姜孝業)이 수적(水賊)과 전투를 벌여 적 13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도 10명이 전사하고 군수와 첨사가 생사를 단정할 수 없을 만큼 중상을 입었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도 병선을 빼앗겼는데, 이전 보다 더 큰 수모였다. 같은 해 9월 2일 두 번째 기사는 법성포 소속 조곡선의 호송임무를 담당하는 장수의 배가 해적선 8척을 만났는데, 중과부적이어서 배를 버렸다는 내용이다. 육지로 도망한 이들은 풀숲에 숨어 목숨은 구했으나, 적에게 배를 내주었다. 해적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일반 호송선도 아닌 지휘선이 배를 버린 것은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다.

불법어획과 인신매매를 하려다 적발된 해랑적도 있었다. 1609년 9월 28일 두 번째 기사인데, 평안도 서남쪽 해상 조압도(曺壓島)에서 불법조업과 이 지역주민 손응민을 납치하여 되돌아가던 중 썰물을 만나 좌초되었다. 출동한 우리 관군이 이들과 전투를 벌여 21명을 생포했는데, 이 배에는 손응민 외에도 어른들과 함께 나무를 하러 왔다가 잡혔다는 12, 13세쯤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연안을 활동무대로 하던 해랑적은 점차 남하하여 서해안을 거쳐 남해까지 영역을 넓혔으며, 흉포화, 대형화 되었다. 인조 18년인 1640년 1월 20일 두 번째 기사는 해적선에게 군량미를 빼앗겼다는 내용인데, 기록상으로는 최대 규모의 해적이었다. 충청도 비인현에서 서쪽으로 가던 양곡선이 홍원곶(紅元串) 앞바다에 이르렀을 쯤, 낫과 긴 창으로 무장한 200여 명이 탄 해적선 2척의 공격을 받아 군량미 전량을 빼앗기고 7,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지역을 담당하던 마량첨사 김극겸(金克謙)이 사전정찰과 경계를 게을리 한 죄로 처벌을 받았다.

이밖에도 수 없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늘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612년 12월 17일 황해병사(黃海兵使) 유형(柳珩)이 인근지역 4개 포구 변장들과 연합하여 이 일대 해적들을 섬멸했으며, 1615년 8월 7일 충청도 태안군 망도(莽島) 복병장 강굉립(姜宏立)이 해적선 1척을 나포하고 18명을 참수, 1622년 9월 17일 강화 정포(井浦) 만호가 해적 11명을 베었고, 1명은 익사, 9명은 생포, 1633년 1월 25일 충남 서산 앞바다에서 우리 어민을 살해하고 달아나던 해적선을 관군이 뒤쫓아 두목 김충렬 등 해랑적 여럿을 체포하는 등 전과를 거둔 경우도 많다.

하늘아래 새삼스러운 것은 있어도 참으로 새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중국어선의 불법조업과 우리 해경에 대한 폭력은 그 옛날 우리 수군과 어민을 죽이고, 심지어는 입고 있던 옷까지 벗겨 갔던 해랑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당국과 어민들이 국제법과 한중어업협정을 준수하여, 해상의 안녕과 어족자원 보호에 솔선수범하여 주길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