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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대장금 비정규직 9년, 임금이 직접 정규직 지시

「조선왕조실록」 - 장영실·허준도 비정규직, 다문화 출신 동청래 위장 올라

드라마 대장금 (출처: imbc.com)

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현장방문으로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듣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해결과 일자리 증대 방침을 밝히며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각 부처는 올 하반기 내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실태를 전면조사하고 비정규직 문제해소를 위한 로드맵을 작성해 달라.”고 당부하고, 기획재정부에는 “하반기부터 공공기관 운영평가 기준을 전면 재조정하여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가점을 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주문했다.

드라마 대장금 (출처: imbc.com)

  •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일자리 상황판 (출처: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일자리 상황판 (출처: 청와대)

이어 문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동 여민관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한 뒤, 이를 직접 조작하면서 “비정규직을 많이 사용하는 기업들의 추이도 드러나야 한다.”며 “공공부문 중에서도 비정규직이 많은 분야는 어떻게 비정규직 문제가 개선되는지 월 단위로 파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비정규직 문제가 민간으로 확대되면서, 일부 경제단체가 애로를 호소하기도 했던 것처럼, 고용주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중종 19년인 1524년 12월 15일에 있었던 일이다. 임금이 성종 조 이후 의술(醫術)이 제자리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며, 발전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이 자리에서 임금은 먼 훗날 한류 촉발의 주요 계기가 된 드라마 「대장금」의 실존 모델 장금의 정규직 전환을 직접 주문했다.

  • 대장금 비정규직 9년, 임금이 직접 정규직 지시

    “의녀의 요식(料食, 급료)에는 전체아(全遞兒, 상근직으로 규정된 급료 전액을 받는 정규직)와 반체아(半遞兒, 일이 있을 때만 입궐하며 급료의 반액을 받는 비정규직)가 있는데, 요즘 전체아에 빈자리가 발생해도 이를 보고하지 않는다. 아마도 전체아 전환을 아뢰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 같은데, 장금(長今)은 무리 중에서 의술이 나으니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할 수 있도록 전체아를 주어라.”

장금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중종 10년인 1515년 3월 21일로 내의원의 상벌을 논의한 내용이다. 따라서 실록으로만 보면, 비정규직(반체아) 9년 만에 정규직(전체아)으로 전환된 셈인데, 임금이 신료들의 소극적 업무태도까지 들먹이며,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급여를 비롯한, 각종 처우 때문에 공공부문에서조차 정규직을 꺼린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날 임금은 “사람의 사생(死生)이 어찌 의약에만 달려 있겠느냐. 의녀 장금은 왕후의 호산(護産)에 공이 있어 큰 상을 받았어야 했는데, 마침 대고(大故, 어버이의 사망 또는 큰 사고)가 있어 받지 못했다. 상은 베풀지 못할지언정, 형장을 가할 수는 없다. 이런 연유로 장금의 장형(杖刑)을 속바치게(죄를 면하기 위해 돈을 바침) 한 것이다.”며 감형이유를 설명했다. 이로 보아 장금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근무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록으로 확인된 기간이 9년이고, 실제로는 훨씬 오랜 기간 비정규직 의녀로 근무했음이 확실하다.

장금은 정규직 전환 이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띠는 대목이 호칭이다. 이름 앞에 대()를 붙여 대장금(大長今)으로, 의녀 대신 내의녀(內醫女)로 불렸는데, 이로 보아 지위가 상당히 격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대장금은 여러 차례 상을 받았는데, 중종 재위 말년에는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중종 39년인 1544년 10월 25일 세 번째 기사는 임금의 병세에 대해 보고한 것이다. 장금이 나와서 말하기를 “상께서는 어제 삼경에 잠이 들었고, 오경에 잠깐 깨어 소변은 보았으나, 대변은 3일째 불통이다.”라고 했다. 26일 기사 역시 대장금의 임상보고이다. 문안 온 내의원 제조에게 임금은 “내 증세는 여의가 잘 안다.”며 장금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내의원 제조조차 임금의 증상과 처방을 장금에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변비 7일째인 10월 23일 배변에 성공했는데, 이날의 기록이 실록에 나타난 대장금의 마지막 흔적이다. 지난 밤 배변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승정원과 내의원은 물론, 육조와 한성부 당상들까지 앞 다투어 문안을 드리려 하자 임금은 손을 가로 저으며, 장금에게 듣도록 했다. “하기가 비로소 통하여 기분이 매우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날 증세가 호전되자 임금은 “내가 지금은 하기가 평소와 같으니 제조와 의원, 의녀는 더 이상 입직하지 말고 해산하여 돌아가라.”고 직접 전교하는 것으로 내의원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호전은 일시적이었던 것 같다. 중종은 22일 만인 11월 15일 57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장금은 중종의 38년 2개월 재위기간 중 30여년 이상을 함께 했다. 말년의 기록에서 보듯이 어의들은 물론, 내의원 제조까지 임금의 증세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할 만큼,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밖에도 실록에는 장금이 조선 최고의 의녀였음을 보여 주는 여러 기록이 있다.

  •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입신양명한 인물, 장영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입신양명한 인물로는 동래부 관노에서 대호군(종3품)에 오른 장영실도 빼놓을 수 없다. 장영실은 세종이 발탁한 것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관노였던 그를 찾아 낸 것은 태종이었다. 세종 15년인 1433년 9월 16일 기사는 임금이 장영실의 호군(護軍, 정4품 무관직) 승진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태종이 보호하셨고, 나 또한 아낀다. 영실은 솜씨뿐 아니라, 인간됨과 성격이 좋고, 똑똑하기가 보통이 아니다.” 이로 보아 태종 때부터 대내(大內)에 들어와 일한 것으로 보인다.

    장영실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세종 7년인 1426년 4월 18일인데, 이 때 직급이 사직(司直, 정5품 무관직이나 무보직으로 녹봉 책정을 위한 직급)이었다. 1433년 9월 16일 세 번째 기사는 별좌(종5품 녹봉이 없는 무관직) 장영실을 호군(정4품 무관직)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장영실은 10여 년의 논쟁 끝에 정규 조정직제인 호군에 올랐다.

이날 임금은 “1422년과 1423년에도 별좌에 임명하려 하자 ‘기생의 아들에게 어떻게 벼슬을 주느냐’며 반대 했었는데, 이미 별좌에 오른 사람에게 호군을 준다는데 또 반대하느냐.”며 신료들을 압박하는 대목이 있다. 장영실이 별좌가 된 것은 이보다 1년 앞선 1432년으로 처음 거론된 이후 10년 만이다. 사직과 같은 5품이며, 더군다나 녹봉마저 없는 이 자리 때문에 왜 그토록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을까. 별좌는 녹봉이 없는 대신 1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임금은 장영실이 별좌가 된지 1년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4품에 임명했다.

이후 장영실은 자격루,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 최첨단 관측기구를 설치한 흠경각(欽敬閣) 완공에 기여한 공로로 1438년 1월 7일 대호군(大護軍, 종3품)에 올랐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나라에서 그를 받아 준 것은 임금뿐이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음모로 짐작되는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사고로 제조감독을 맡았던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은 1442년 4월 26일 곤장 80대와 직첩마저 빼앗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벽면에 걸린 ‘대장경 이운벽화’

    서자 태생으로 정1품에 오른 허준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허준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가 전국에 10여 가지에 이를 만큼, 그는 전설의 명의이다. 그가 처음 실록에 등장한 것은 1575년 2월 16일로 어의 안광익과 함께 상을 진맥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내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의과 초시와 복시를 거쳐 종8품으로 임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허준은 30세이던 1569년 6월 이조판서 홍담(1509~1576)의 천거로 파격적인 조건인 종4품으로 특채되었다.

서자 출신의 허준이 이조판서의 천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의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청년시절부터 교류했던 「미암일기」의 저자이자, 이조참판을 지낸 유희춘(1523~1577)의 힘이 컸다. 허준의 가계와 성장과정이 일부나마 전해지는 것도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서이다. 실록의 기록은 대부분은 허준의 승급을 놓고 벌인 임금과 신하들의 대립이다. 1591년 3월 3일 첫 번째 기사도 허준의 정3품 통정대부 승진에 대한 논의이다. 요즘의 기준으로 보아도 군신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격렬했다. 당시 중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급이 종3품이었으니, 허준의 당상관 발탁은 신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질서의 파괴여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이후 승급이 있을 때마다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종1품 숭록대부를 거쳐 1605년 1월 3일 드디어 성공신화의 정점인 정1품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미 병약해진 임금이 신하들을 꺾지 못한채 병석에 눕는 바람에 생전에는 정1품에 오르지 못하다가, 사후에 추증되었다.

요즘의 다문화가정인 귀화인 2세가 장군에 오르기도 했다. 연산군 재위 때 위장(衛將, 종2품)을 지낸 동청례 장군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세종 때 귀화한 여진족 등소로가무의 아들로 성종 4년인 1473년 무과에 급제했다. 실록 같은 해 9월 14일 네 번째 기사는 향화(向化, 귀화) 2세인 동청례가 자신의 형 청주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무과에 부시(赴試, 응시)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인데, 성종이 흔쾌히 허락했다. 출중한 무예로 여러 차례 상을 받았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급제 20여년 만인 1493년 종6품부터 종9품까지 임명할 수 있는 습독관(習讀官, 전문교관)에 제수되었으나, 그나마도 신료들의 반대로 같은 직급의 다른 관직을 받았다. 연산군 즉위 이후 변방의 야인들을 잘 다스린 공로로 1497년 통정대부(정3품)로 당상관 반열에 올랐으며, 1503년 군 고위 지휘관인 위장(衛將, 종2품)이 되었다.

역사 이래로 신분과 제도의 한계를 극복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이 같은 성공신화는 본인의 타고난 재능과 노력도 중요했지만, 위정자의 의지와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 가능했다. 일하고 싶은 사람, 일할 수 있고 일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큰 욕심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비정규직 해소와 일자리 창출에 대한 새 정부의 의지와 공감대가 뜨거운 만큼, 머지않아 실현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