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가 1960년대 추진한 저미가(低米低) 정책이 비록 물가 안정에 기여하였으나 주곡(主穀) 생산의 정체와 외곡(外穀)도입의 만성화, 미곡(米穀)의 편중소비 조장, 외채의 누적 등과 같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미국이 시장 개척을 위해 원조라는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농산물을 수출하자 저곡가 정책과 함께 미국의 원조가 맞물리면서 우리나라에는 많은 미국산 양곡이 들어왔다. 이로써 보다 싸게 곡식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대량의 밀가루가 수입된다고 해서 우리 국민들의 입맛이 금방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밀소비를 촉진시키는 이른바 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62년 가을, 추곡 생산 600만석 감산이라는 대흉작이 기록되면서 쌀값이 한때 가마당 1961년 대비 400%나 상승한 5000원 선까지 솟구쳤다. 그리하여 1962년 11월, 정부는 ‘혼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미곡 판매업자는 잡곡을 2할의 비율로 섞어서 팔고, 음식점에서도 2할 이상 잡곡을 섞는 혼식을 시행하며, 학교나 관공서의 구내식당에서는 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 가정에서도 잡곡을 섞어 먹도록 적극 권장한다는 것 등이었다.
1963년에 여름 농산물 흉작까지 겹치자 정부는 외국 곡식의 도입량을 급격히 확대하는 한편, 분식 장려 운동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였다. 7월 들어 정부는 점심시간에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하고, 7월 11일을 첫 ‘무주일(無酒日)’로 정하여 술의 판매마저 금지하였다.
이러한 혼분식 장려 운동으로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 등을 실시하여 이를 지키지 못한 학생들은 혼줄이 날 정도였다.
70년대 초기에는 학생들의 도시락에 30%이상의 혼식이 되어 있지 않으면 도시락을 먹지 못하게 하였다.
식당에서도 혼식을 실천해야 했다. 특히 ‘분식의 날’을 정하여 일반 식당에서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분식만을 팔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식 장려 운동에 따라 밀가루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라면·빵·과자 등의 분식이 많이 생겨났다. 라면이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거부감으로 라면을 먹으려 하지 않았지만 국가에서 시행한 분식장려 정책과 맞물려 라면·빵·과자 등의 품목이 많이 팔리게 되었고, 이와 관련된 사업을 시작한 기업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