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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독립활동

주요독립활동

공산주의 이론에 의거하여 기존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실천운동.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코민테른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 일환으로 전개된 공산주의 운동을 흔히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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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배경]

공산주의 사상은 일제강점기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유입되었다. 일제 강점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국외로 탈출하여 투쟁을 계속하는 속에서 새로운 독립운동 이념으로 이를 수용하였다. 유학생들도 학문으로서 수용하는 가운데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한 방편으로 적극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

우리나라 최초 사회(공산) 주의 단체는 1917년 8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신규식에 의해 설립된 조선사회당이다. 그는 인재양성을 위한 조직한 동제사(同濟社)를 조선사회당으로 개칭하였다. 목적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한국독립을 지원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 6월 이동휘, 전일, 박진순, 김립 등도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동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추대됨으로써 1921년 당명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꾸고 본부도 상하이로 옮겼다. 이와 대립하던 오하묵,김철훈,최동순 등도 1918년 1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 지부를 결성하였다. 파벌 투쟁을 거듭하던 두 단체는 1922년 코민테른에 의하여 극동 총국에 속한 고려국 산하로 흡수되었다. 고려공산당에는 국내에서 망명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등이 함께 활동하는 등 명확하게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는 3.1운동 이후 유학생 귀국과 함께 국내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민족개량주의라 배격하면서 계급적 사회혁명에 의하여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모체는 1920년 1월 조직된 동경 조선고 학생 동우회로 주요 인물은 이기동, 김찬, 김약수, 박열 등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이듬해 흑도회를 조직하는 등 공산주의 이념 확산에 노력하였다. 이는 재일한국인 공산주의 운동단체의 효시이다. 이 단체는 구성원 간 이념적인 이질성으로 말미암아 곧 해산되고 말았다. 무정 주의자들은 풍뢰회를 조직한 후 흑우회로 개칭하는 한편 비밀결사체인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이에 맞서 김약수,변희용 등은 1923년 동경에 북성회를 조직한 후 서울에 건설사를 설치했다. 이후 국내 공산주의단체는 서울청년회계,화요회계로 양립하는 형국이었다. 수많은 조직체 결성,해체와 이합집산은 공산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공동목표는 일제 강점으로부터 벗어나 조국광복을 성취하는 문제였다.

[조선공산당 창건과 활동]

조선공산당 성립과 더불어 외형상 공산주의운동은 단일한 지도노선에 의하여 운영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코민테른은 화요회계 중심의 공산당을 인정하는 반면 1국1당 원칙에 따라 서울회계에 대한 입당을 종용하였다. 서울회계는 이 지령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채택하는 등 반발하고 나섰다. 4차례에 걸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과 분열책은 통일적인 공산주의운동을 좌절시켰다. 1928년 12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이 직면한 당면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공산주의운동 부진 원인은 미약한 자본주의적 발전에 따른 공장노동자 수적인 열세와 조직의 미숙성, 일제의 탄압에 따른 객관적인 제조건, 내부적 분열과 파쟁, 공산주의자의 객관적인 정세판단 부족 등을 꼽았다. 이는 대중운동으로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연합은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운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노선 대립은 상호간 불신을 조장시켰다. 이러한 제휴도 1930년대 초반 신간회 해소론 대두와 더불어 결별함으로써 일제 패망 때까지 상호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만주사변 이후 공산당재건운동도 일제 탄압으로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만주 등지 국외 공산주의운동은 민족해방운동 주류로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화북독립동맹 등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화북독립동맹은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전, 항일민족통일전선 확충,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무장부대 확충, 대중에 기반을 둔 조직화 시도, 동방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 및 일본 반전운동과 연계 등을 표방하였다. 이는 민족주의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역사적 의의]

우리 공산주의운동은 여러 제약적인 요인 등으로 정착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적지 않다. 소외계층의 불만과 요구 수용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일제강점기 농민,노동자들은 지주와 일제 관헌에 의한 2중적인 수탈에 직면하고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산미증식계획은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배제시키는 요인이었다. 이식된 공업화와 기형적인 산업구조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항상적인 저임금의 질곡에서 허덕이게 만들었다. 도시나 개항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빈민가인 토막민촌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1운동 이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념적인 기반은 공산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귀향운동이나 농촌계몽운동도 공산주의 이념에 입각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30년대 공산당재건운동,혁명적 농민조합운동 등은 일제강점하 민족운동을 견인하는 기반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민족해방운동의 주류로서 농민운동,노동운동 등을 부각시키는 요인이었다.

글: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