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 이후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에 조선 정부는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유생들은 외세 배척을 위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이에 호응하였다. 그런데 외국과 통상조약 체결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이어지는 등 농촌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를 내걸고 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으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내정 개혁을 구실로 본격적인 한국 침략에 나섰다. 갑오왜란, 단발령, 을미사변 등에 반발한 유생들은 적극적인 항일운동인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춘천 이소응, 제천 유인석, 이천 김하락 등은 초기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과 정부 회유로 의병진은 해산하였으나 전 민족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직접적인 항일투쟁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는 을사늑약 체결, 광무황제 강제 퇴위, 구 한국군 해산시 전 국민적인 의병전쟁으로 발전하는 기반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해산된 군인의 의병진 참여는 전술, 전략적인 발전을 가져와 일본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13도창의군은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되자 이들 중 일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반면 내수자강에 기초한 계몽운동도 전개되었다. 개화사상을 계승한 자강론자들은 자주독립,민권신장,개화혁신,외세배격 등을 목표로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기관지로 순한글판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국민의 자주의식을 고취시켰다. 1904년 이후 조직된 보안회,헌정연구회,대한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와 서북학회,기호흥학회,교남학회,관동학회,호남학회 등은 민지계발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요 영역은 교육구국운동,언론운동,종교운동,한글보급운동,국채보상운동 등이었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경향신문』 등은 일제침략상을 보도하여 국민적인 경각심을 일깨웠다. 을사늑약에 체결에 대한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제강점 직후 국내 독립운동은 외형상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황이었다. 안악사건,105인사건 등 일제의 거듭된 탄압에도 애국적인 인사들은 독자적인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를 도모하였다. 또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실시된 민족교육은 애국적인 청년들을 배출하는 기반이었다. 한편 만주,연해주 등지에는 한인촌(韓人村)을 중심으로 독립군기지가 건설되는 등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독립군기지는 삼원포, 북간도 용정촌, 봉밀산 한흥동 등이었다. 이곳에 설립된 무관학교는 독립군 양성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민족지도자 양성에도 노력하였다. 독립군은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거나 국내진공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1910년대 독립운동은 3.1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종교계 인사 33인으로 조직된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동시에 탑골공원에 운집한 학생과 시민들도 독립만세를 외치는 가운데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이는 1919년 3월 1일부터 4월말까지 2개월간 전국 200여 군에서 200만 명 이상 참가하는 등 거족적인 만세운동이었다. 일제는 평화적인 시위에 무력을 사용하여 최소한 학살 7,500명과 부상자 16,000명, 피검자 46,000명이라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3.1운동은 자주독립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더욱이 국외 독립운동 단체는 무저항적인 노선을 비판하는 가운데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무쟁투쟁을 채택하는 계기였다.
192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과 더불어 부분별 민족해방운동을 확산시켰다.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로 식민정책 전환은 제한적이나마 합법적인 활동 공간을 확대하는 계기였다. 민족주의 계열의 입장을 대변한 『동아일보』,『조선일보』 발간은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발전시키는 기반이었다. 실력양성운동의 주요 영역은 민립대학설립운동,국산품애용운동,문맹퇴치운동,농촌계몽운동 등이었다. 산미증식계획은 농민들을 아사 직전 상태로 내몰았다. 더욱이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대공황은 노동자나 농민들 생존권을 위협하였다. 언론사,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촌계몽운동과 1920-30년대 만주로 대량 이주는 이를 반증한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맞선 조선학운동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대대적인 타격을 받았다. 한편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독립운동은 학생운동을 비롯한 노동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형평운동 등을 확산시키는 요인이었다. 부산부두노동자파업과 원산총파업, 각지에서 전개된 소작쟁의 등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진전을 의미한다. 이는 지식인 사회에 급속하게 보급되는 등 사회운동을 지도하는 이념으로 정립되어 나갔다. 1925년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이러한 사회운동을 지도하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였다. 순종 인산일을 계기로 전개된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사회주의 이념 확산은 민족주의 세력과 갈등,대립을 초래하는 등 민족적인 역량을 반감시켰다. 이를 극복한 통일전선체로서 신간회(新幹會),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본부는 전국적인 대회조차 개최할 수 없었다. 160여 개에 달하는 신간회 지회는 사실상 지역별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는 중심단체로서 기능하였다. 1930년대 초반 신간회 해소론 대두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회주의자들은 공산당재건운동과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등을 통하여 사회운동을 관철시켜 나갔다. 학생운동은 1920년대 이후 국내 민족해방운동 주류로서 부상되었다.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단행하는 등 식민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섰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독서회, 사상연구회, 사회경제연구회, 문예회 등을 통하여 일제 패망 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국내 독립운동 전반의 침체로 이어졌다. 모든 운동단체는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공화제를 정체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통제 실시와 외교론에 치중하였다. 연통제는 국내 독립운동 세력과 연결은 물론 군자금을 조달하는 창구로서 활용되었다. 외교론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가 하면 국제회의나 국제연맹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서 승인받으려는 의도였다. 임시정부 독립운동 노선에 반발한 무장세력은 독자적인 독립전쟁론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만주나 연해주에 근거지를 두고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홍범도(洪範圖)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金佐鎭) 청산리대첩은 대표적인 전투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으로 분열된 무장세력은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일시적인 통합운동이 모색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교한 분할 책동,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 등에 의하여 부분적인 통합에 그치고 말았다.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거 이후 국제정세 변화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지원은 독립전쟁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조선 의용대와 조선 독립동맹 등은 대표적인 무장단체였다. 중일전쟁을 이후 임시정부는 이청천(李靑天)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결성하였다. 광복군은 연합군 일원으로 인도-미얀마전선에 투입되었다. 또한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국내진공을 위한 활동도 마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이 예상외로 쉽게 항복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은 결실 맺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하와이와 멕시코 이민간 한인들도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와 사관학교 등을 운영하는 등 민족교육을 시행하였다. 독립군자금을 위한 독립공채도 발행하였다. 이들은 매달 일정한 세금을 거두어 임시정부에 보내었다. 이는 임시정부를 유지하는데 주요한 재원으로서 활용되었다. 그 밖에 해외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면 조국독립을 위한 군자금 모집하는 등 독립군 활동을 지원하였다.
50여 년간 걸친 독립운동은 한국근대사를 움직인 요인이었다. 일제 침략에 항거한 불굴의 저항정신은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기반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자주적인 노력에 의하여 독립은 쟁취되지 않았다. 독립운동 중심세력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타산에 의하여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국토분단은 외세의 역학적인 관계에 따라 결정되고 말았다.
글: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