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시대별 특징

  • 시대별특징
  • 1990년대

1990년대 문화영화의 제작 환경 및 경향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민주화와 세계화의 길을 걷게 된 1990년대에는 영화 분야에 있어서도 전방위적이고 획기적인 변화의 양상이 나타났다. 1980년대부터 지속되어 오던 자유화와 개방화의 물결이 영화 정책과 산업 전반에 파급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영화의 작품 경향 및 관련 제도 등이 크게 바뀌어 갔던 것이다. 우선, ‘문민정부’의 출범에 따라 기존의 영화법이 영화진흥법으로 대체되던 가운데 정책 당국의 규제는 완화되고 지원은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해외 지사의 설립과 기업 자본의 유입이 현실화되면서 영화 기획, 제작, 배급, 상영 과정이 보다 합리화, 체계화되었다. 다음으로, 여기에 제작 자금과 인력 확충이 더해져 한국영화는 소재의 다양성 확보 및 질적 수준의 향상을 도모하게 되었으며, 그러면서 영화제 개최와 대중문화 개방 등을 통해 영화계의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고 각종 미디어를 매개로 한 여론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 동시기 문화영화의 제작 환경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변화 속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문화영화의 경우, 그 변화의 흐름은 제작 여건이 개선되고 지평이 확장되어 가던 영화계 일반의 그것에 역행하고 있었다. 1990년대를 통과하며 문화영화에 대한 정책적 배려와 사회적 통념이 약화되어 갔으며, 종국에는 의무상영제가 폐지되고 법적 용어가 삭제됨으로써 그 개념적, 제도적 존재성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시 문화영화 생산 주체를 둘러싼 변화의 정도 또한 미미하지 않았다. 영상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라 1990년대에 진입하며 국민 계몽과 계도를 위한 문화영화의 텔레비전 정규편성이 종료되면서 국군홍보관리소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극장 의무상영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국립영화제작소 역시 1994년 국립영상제작소로 개명됨과 더불어 <대한뉴스>에 이어 1998년 6월 30일부로 문화영화 의무상영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됨으로써 그 원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영향은 민간 영화사들에도 적지 않게 파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까지는 영상 분야에서 문화영화라는 영역이 여전히 존립하였으며, 국립영화제작소와 민간 영화사의 제작 활동에 의해 그 특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 한국 문화영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향을 드러내었다. 먼저, 문화영화의 주요 제작처가 국립영화제작소, 국군홍보관리소, 민간 영화사에서 국립영화제작소와 민간 영화사라는 ‘이원 체제’로 전환되어 갔고, 이와 연동하여 작품들의 제작 목적 및 형식에 있어서도 생산 주체별로 변화의 유무와 그 정도가 달라졌다. 다음으로, 내용 상으로는 여전히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를 망라하는 소재와 주제가 다채로운 이야기 구조를 이루는 가운데, 1990년대의 역사적 환경과 시대적 상황이 다양한 방식으로 화면 속에 담겨졌다.

문화영화의 개념적, 제도적 변화

문화영화에 대한 법적 정의와 의무상영제의 존속

1990년대 영화 정책의 변화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기존의 영화법을 영화진흥법이 대체하였다는 점이다. 1962년 1월 20일 법률 제995로 제정·공포되어 1989년 12월 30일 8차 개정(법률 제4183호)과 1993년 3월 6일 9차 개정(법률 제4541호)을 통해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 오던 영화법의 폐지는, 30년 이상 지속된 국가적 통제 중심의 영화 정책에 대한 일대 전환을 포고하는 가히 상징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물론, 그 기저에는 “전 사회 분야에 대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고조되던 1987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1)“규제 위주의 영화법을 진흥을 위한 법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관련 업계와 사회 일각의 열의와 요구가 자리하고 있었다.2)

영화진흥법 공포(안)(제53회), 1995,
총무처, BG0001754(14-1)

1995년 12월 30일 법률 제5129호로 제정·공포된 영화진흥법은, 그러나 기존의 ‘제작신고제’가 폐지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곤 내용 상 이전의 영화법과 그다지 차별성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제1장 총칙’, ‘제2장 영화의 제작 및 수출입’, ‘제3장 영화심의’, ‘제4장 영화진흥공사’, ‘제5장 보칙’, ‘제6장 벌칙’ 등 총 35조로 이루어져 있던 9차 개정 영화법의 전체 구성이 ‘제1장 총칙’, ‘제2장 영화의 제작 및 수입’, ‘제3장 심의 및 영화 필름 등의 제출’, ‘제4장 영화의 상영’, ‘제5장 영화진흥공사’, ‘제6장 영화진흥기금’, ‘제7장 보칙’, ‘제8장 벌칙’ 등 전문 36조로 변경되긴 하였으나, ‘제4장 영화의 상영’ 부분은 기존 영화법의 보칙에 기재되어 있던 사항이므로 추가된 부분은 ‘제6장 영화진흥기금’ 항목 정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문화영화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변화는 없었다. ‘제2조 (정의)’ 조항 속 “5.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경제·문화등 제분야에 있어서 교육적·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라는 1966년 8월 3일 2차 개정 영화법 개정 시의 문장이 30년 가까이, 게다가 법 자체가 개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대통령령 제15085호로 1996년 6월 29일 마련된 영화진흥법 시행령에서도 ‘제10조 (수입추천 기준) ②’의 외국 문화영화 규정 역시 이전과 동일하였다.3)

하지만, 제2조에 있던 ‘국산영화’가 ‘1. 한국영화’로, ‘합작영화’가 ‘3. 공동제작영화’로 그 명칭을 교체하고 기존 영화법 내의 ‘6. 뉴스영화’4) 관련 정의가 삭제된 대신에 ‘6. 단편영화’(상영 시간 40분 이하)와 ‘7. 소형영화’(필름 규격 16mm 이하) 등의 새로운 용어와 설명이 부가되었다는 점은 이전과는 분명히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이와 함께, 영화법 ‘제5장 보칙’ 내에 명기되어 있던 “공연자가 극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 및 뉴스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제27조)라는 ‘동시상영’ 관련 서술이 새로 제정된 영화진흥법에서는 ‘제4장 영화의 상영’ 내 “공연장경영자는 극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제17조)라는 ‘문화영화의 동시상영’ 관련 서술로 바뀌었다. 뉴스영화의 경우와는 달리 문화영화의 극장 의무상영제는 계속 이어지게 된 것이었지만, 그 뒤에 부가된 ‘적용시한 1998. 6. 30.’이라는 문구를 통해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제의 유효 기간이 1998년 상반기까지로 한정되어 있음이 명시되기도 하였다.

문화영화 관련 행정 지원과 업계 조직의 개편

1990년대를 경유하며 영화 산업의 기본 구조가 재편됨으로써 한국영화의 체질 개선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1980년대 말부터 UIP(United International Pictures)를 시작으로 할리우드 배급사의 직접 배급(직배)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고 1990년대 초중반 삼성, 대우, 현대, 선경 등의 대기업이 영상 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 일신창투, 삼부파이낸스 등 창업투자회사의 금융 자본이 영화계로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5) 그러면서 영화의 기획, 제작, 배급, 상영 시스템이 보다 체계적으로 갖추어지고 뛰어난 전문 인력도 더욱 확충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토대는 선결적으로 정책적 차원에서부터 제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93년 2월 25일 출범한 문민정부 집권 기간 동안에 괄목할 만한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1995년 7월에는 공업기반기술개발사업에 영상 기술이 포함되었고 1996년에는 산업용 영상 기기에 대한 특별소비세가 인하되었다. 한편, 이미 1993년 7월 2일 신경제5개년계획을 통해 영상 산업에 대한 제조업 수준의 금융 및 세제 혜택이 적용된 바 있었고, 1994년에는 외국 자본의 국내 진출 허용과 맞물리며 1989년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영화 프린트 벌수 제한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1993년 8월에는 외국인 영화 출연에 대한 사전승인제가, 1994년 하반기부터는 영사기사 면허제가 폐지되기도 하였다.6) 이러한 탈규제 정책과 더불어 경제적 부양책 또한 마련되었다. 영화진흥금고 설치 및 운용 관련 조항을 담은 영화진흥법의 제정부터가 그러하거니와, 이보다 앞선 1995년 1월 5일에는 영상산업진흥기본법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한편, 1997년 11월 5일에는 착공 6년 7개월여 만에 경기도 남양주에 서울종합촬영소가 완공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문화영화를 대상으로 한 행정적 지원은 거의 진행 혹은 추진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나마 1984년부터 대종상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문화영화 관련 영화상(映畫賞)으로 자리해 오던 금관상(金冠賞)마저 “문화영화에 대한 유일한 진흥책이라”는 7) 당초의 취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순수 문화영화’만을 대상으로 하다가 1988년 문화영화, 홍보영화 등 2개 부문으로, 1989년부터는 문화영화, 홍보영화, 청소년영화 등 3개 부문으로 범주를 넓힌 바 있던 금관상 영화제는, 그래도 1993년까지는 문화영화 및 홍보영화를 포함하며 기본 틀이 유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4년 제11회 때에는 명칭 자체가 ‘금관단편영화제’로 변경되었을 뿐 아니라 시상의 구성 역시 대상(1상금 2,000만원), 감독상(500만원), 심사위원특별상(2편, 각 300만원), 장려상 (10편, 각 100만원) 등으로 바뀌었다.8) 이어 1996년부터는 다시 ‘금관청소년영화제’로 명칭 변경된 채 대상(상금 1,000만원), 우수작품상(700만원), 감독상(500만원), 심사위원특별상(300만원), 장려상(15편, 제작비 보상금 각 100만원) 등으로 시상 구성이 재조정되었다.9) 기에 영화진흥공사가 주관해 오던 ‘영화 소재 및 시나리오 공모’에서 문화영화 부문을 포함하고 있던 소재 공모까지도 1990년도부터는 빠지게 됨으로써,10) 문화영화 제작 및 창작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그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정책 당국의 관심사가 어디까지나 상업적 장편 영화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영상 방송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대중 매체로서의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점이 원인으로 자리하였다고 볼 수 있다.11)

한편, 이러한 흐름 속에 문화영화 관련 조직 역시 새로운 변모를 시도하였다. 1977년 6월 17일 기존의 한국문화영화제작자협회를 확대·개편하여 창립된 뒤 문화영화 제작 업계를 망라한 가장 유력한 이익단체로서 자리를 지켜 오던 사단법인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가 1996년에 이르러 ‘한국영상문화제작협회’로 그 외양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 조직은 적어도 1990년대까지는 회원사의 구성이나 임원진의 구조, 사업 내용 등에 커다란 변동 사항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협회는 회원간의 상호협동과 친목을 도모하여 문화, 광고영화의 질적 향상 발전과 연구 및 제작기술을 육성하여 문화창달에 이바지”(강조-인용자)한다는12) 내용의 설립 당시의 목적이 2년여 만에 “이 법인은 회원간의 상호협동과 친목을 도모하며, 영상문화(영화, 비디오)의 질적 향상 발전과 연구 및 제작기술을 육성하여 문화창달에 이바지”(강조-인용자)한다는13) 것으로 수정되었다는 점은, 영상 산업 환경이 급변하고 있던 1990년대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였다고도 할 만하다.14)

문화영화에 대한 법적 정의와 의무상영제의 폐지

우여곡절 끝에 1995년 말 제정·공포된 영화진흥법은 1990년대 동안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기존의 사전 심의제도는 존속될 수 없었고 심의에 관한 영화진흥법 규정은 개정이 불가피”한 상황 하에15) 1997년 4월 10일 법률 제5321호로 공포된 1차 개정 영화진흥법은 ”제정 영화진흥법의 틀이 그대로 유지된 상태에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에 따라16) ‘제3장 심의 및 영화 필름 등의 제출’ 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수정 및 여타 일부 항목에 대한 개정과 신설의 과정을 통과하며 완성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문화영화 관련 조항에는 변동 사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1997년 10월 2일 대통령령 제15494호로 마련된 2차 개정 영화진흥법 시행령에서는 외국영화의 ‘수입추천 기준’ 가운데 문화영화 관련 내용을 담은 제10조 ②항에 대한 삭제가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98년 2월 25일 출범한 ‘국민의 정부’ 하에서 1년여 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99년 2월 8일 법률 제5929호로 영화진흥법 2차 개정이 단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부 개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체적인 법(령) 구조와 기본적인 항목들이 상당부분 바뀌”면서,17) 존의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공연예술진흥협의회가 영상물등급위원회로 개편되고 영화업에 대한 등록제가 신고제로 변경됨과 동시에 독립영화제작 신고제가 폐지되어, 영화 정책의 무게중심이 통제에서 진흥으로 현저히 이동하게 되었다. 특히, 영화법 제정 이래로 무려 37년 넘게 명문화되어 있던 문화영화에 대한 법적 용어 자체가 각종 영화의 정의를 일괄한 조항에서 삭제됨으로써, 공식적인 차원에서 그 개념적 존재성을 둘러싼 일대의 변화가 생기기도 하였다.

영화진흥법 개정법률 공포(안)(제4회), 1999,
총무처, BG0002081(50-1)

문화영화 생산 주체의 변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국립영상제작소’로

문화영화 관련 행정 지원과 업계 조직이 개편되고 그 법적 정의 및 의무상영제마저 폐지되기에 이른 1990년대에는, 5.16 직후인 1961년 6월 22일 제정된 법령 제632호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과 각령 제22호 ‘국립영화제작소직제’에 근거하여 탄생한 뒤 30여 년간 국가적 차원의 영화 제작 활동을 견인해 오던 국립영화제작소에 있어서도 전에 없던 커다란 변화 양상이 펼쳐졌다. 단적으로, 1991년 2월 1일 대통령령 제13271호로 기존의 ‘국립영화제작소직제’가 폐지되었다.18)

그렇다고 국립영화제작소의 활동이 일거에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자체 제작으로 만들어진 문화영화의 편수가 1990년 53편, 1991년 66편, 1992년 65편, 1993년 57편, 1994년 48편이었던 바,19) 1990년대 중반까지는 문화영화의 존재성과 더불어 그 최대 생산 기관인 국립영화제작소의 위상이 어느 정도 유지되어 있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1994년 5월 4일 대통령령 제14241호 ‘공보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중 개정령’에 의해 국립영화제작소의 공식 이름이 ‘국립영상제작소’로 바뀐 일은 시대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이었다.20) 이러한 명칭 변경의 배경에, 본격적인 케이블·다채널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에 따라 “지금까지의 필름영화 제작 위주에서 케이블TV 공공채널 제작 기능 전담 및 비디오 제작 기능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정책 당국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러하다.21) 이를 반증하듯, 국립영상제작소에서는 1995년 3월 1일부터 케이블TV 채널14를 편성받아 KTV(한국영상)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뉴스영화 극장 의무상영제가 폐지되고 이전까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전담해 왔던 <대한뉴스>의 제작이 종료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었다.22)

공보처와 그 소속기관 직제 중 개정령(안)(제16회), 1994,
총무처, BG0001591(9-1)

그러면서 국립영상제작소의 문화영화 제작 규모 역시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연도의 『한국영화연감』을 들여다보건대, 국립영상제작소에서 만들어진 문화영화는 1995년 26편과 1996년 16편에 불과하며 1997년부터는 아예 관련 자료가 집계되어 있지도 않다. 문화영화에 대한 극장 의무상영제가 폐지되고 영화진흥법 상에서 문화영화 관련 용어가 사라지게 된 1990년대 말 이후,23) 국립영상제작소는 기관의 명칭을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1999.5.24), 다시 ’영상홍보원‘(2004.8.14), 또 다시 ’한국정책방송원‘(2007.8.22)으로 바꾸어 가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청사 역시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에 위치해 있던 영화진흥공사 사옥에서 1991년 9월 1일 강남구 역삼동으로 이전한 뒤, 2014년 12월 15일에는 세종특별자치시로 옮기게 되었다.24)

국군홍보관리소와 민간 영화사의 입지 축소

1990년대에는 국군홍보관리소와 민간 영화사에서의 문화영화 제작 활동 또한 크게 위축되었는데, 이 역시도 그 배경에는 한국 영화계 및 미디어 환경 변화라는 시대적 상황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국립영화제작소직제가 폐지된 1991년 2월 1일에 대통령령 제13280호로 ‘국군홍보관리소직제’ 또한 폐지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한국영화연감』에 따르면 국군홍보관리소의 연간 문화영화 제작 편수는 1990년에 1980년대의 평균치와 비슷한 52편을 기록한 뒤 1991년 19편, 1992년 17편, 1993년 21편, 1994년 48편, 1995년 20편 등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20편 내외를 오고 갔다. 이듬해부터는 『한국영화연감』 내 문화영화 제작 통계에서 국군홍보관리소의 작품이 포함되지 않았기에 정확한 통계치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1990년대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국군홍보관리소 제작 문화영화 가운데 필름 대비 비디오 촬영 작품의 비중이 커졌음을 고려하면, 역시 국립영화제작소의 경우처럼 1990년대 중반 이후 전통적 개념의 문화영화 생산 주체로서의 국군홍보관리소의 위상과 역할이 현저히 좁아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90년대 민간 영화사의 문화·광고영화 제작 편수는 1990년 28편, 1991년 32편, 1992년 74편, 1993년 58편, 1994년 50편, 1995년 48편, 1996년 69편, 1997년 134편, 1998년 114편 등인 바,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오히려 증가세를 보였다고 할 만하다. 이를 두고 국립영상제작소와 국군홍보관리소의 빈자리를 영화사들이 메워 갔다고 볼 여지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민간 영화사에서 만들어진 작품 대부분이 공공기관, 기업, 학교, 재단 등 외부 단체의 의뢰를 통해 기획된 홍보/광고 영화에 속하고 그 편수와 비중이 갈수록 커져 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불어, 동시기 문화·광고영화제작사 수는 1990년 79곳, 1991년 96곳이던 것이 1992년 36곳, 1993년 39곳, 1994년 39곳, 1995년 40곳, 1996년 40곳, 1997년 40곳 등 대체로 일정한 수치를 유지하다가 1998년에는 211곳으로 급증하였으나 문화영화 제작을 행한 회사가 실제로는 소수에 불과하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2000년대 들어 국군홍보관리소의 명칭이 ‘국방홍보원’(2000.8.28)으로 다시 변경되고 국군방송TV(KFN-TV, 2005.12.1)가 개국됨으로써 이곳의 영상 제작 활동은 기존의 영화 작품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바뀌었고, 예전에 사단법인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에 속해 있던 문화·광고 영화 제작 업체들도 대부분 광고CF 혹은 뮤직비디오 등을 제작하는 것으로 ‘변신’을 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일정부분 현재와도 맞닿아 있다고도 하겠다.

1990년대 문화영화의 특징

제작의 흐름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급격한 변화가 일었던 시기였던 1990년대의 경우, 그 제작 경향에 있어서도 시간의 경과에 따른 특징적 흐름이 존재한다.

우선,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가 국립영화제작소, 국군홍보관리소, 민간 영화사 등지에서 국립영화제작소와 민간 영화사의 이원 체제로 전환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특히 국립영화제작소가 국립영상제작소로 바뀌고 국군홍보관리소의 영화 제작 활동이 둔화되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심화되었다.

이어서, 문화영화 제작 목적에 있어서는 생산 주체별로 변화의 유무와 그 정도가 다소 상이하였다. 1970년대부터 KBS와 MBC의 텔레비전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어 주 1회 방영됨으로써 국민적 생활 문화의 일부로 자리해 오던 <배달의 기수> 시리즈가 1989년 3월 TV에서 자취를 감춘 뒤, 1990년대 들어 국군홍보관리소의 문화영화 제작의 활기도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이후에도 대민 홍보를 위한 문화영화가 만들어졌으나,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스레 군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용 영상 콘텐츠 제작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국립영화제작소와 민간 영화사의 경우 기존의 제작 목적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즉, 민간 영화사에서의 문화영화 제작은 정부와 지자체, 기업 및 학교, 여타 공공 또는 사설 기관 등의 의뢰를 받은 뒤 해당 ‘발주처’에 대한 홍보 또는 교육 효과를 거두어 그 대가로 경제적 이윤을 취하는 것과, 보는 이로 하여금 지적이고 예술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순수’한 성격의 작품을 만들어 영화제 등에서 수상함으로써 금전적 보상을 받는 것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문화영화 영화상으로 자리해 온 금관상 영화제가 1994년부터 금관단편영화제로 변경되는 등의 환경 변화에 따라, 1990년대 중반부터는 제작 목적의 방점이 전자 쪽으로 더욱 쏠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영화제작소 역시 주로 제작1과에서 뉴스영화 <대한뉴스>를, 제작2과에서 국내 홍보용 문화영화를, 제작3과에서 해외 홍보용 문화영화를 담당한다는 기본 틀 위 에서 문화영화 제작의 목적이 크게 국내 홍보와 해외 홍보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대한뉴스>의 입지의 요동과 폐지를 겪은 1990년대 들어서는 문화영화 제작을 둘러싼 제작 부서 간의 경계가 다소 모호해지는 양상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문화영화 극장 의무상영제가 폐지된 1998년을 기점으로 그 제작의 동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연감』 내 통계 자료를 검토하건대, 문화영화 형식에 있어서도 제작 주체와 시기에 따른 특징적 양상이 발견된다. 1990년대에도 <배달의 기수> 시리즈와 여타 홍보 및 교육 등을 위한 문화영화 제작을 이어간 국군홍보관리소의 경우, 1992년까지는 주로 16mm 필름이 사용되었으나 1993년부터는 거의 비디오 제작으로 그 기록 방식이 바뀌었고, 그러면서 러닝 타임도 비교적 다양한 상태에서 1시간(혹은 2시간) 정도로 규격화되었다. 민간 영화사는, 통계 자료에 기록 방식이 표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35mm 및 16mm 필름과 비디오 방식이 혼재되어 있었고, 러닝 타임은 10분 미만에서 60분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도 10분대와 20분가량의 작품들이 주류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영화제작소의 경우, 16mm 필름 및 비디오가 쓰이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35mm 필름 사용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며, 러닝 타임에 있어서는 여러 시간대를 포함하는 가운데 10분 전후와 20분 전후의 작품이 주종을 이루다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국내 홍보용은 10분에, 해외 홍보용은 20분에 다소 못 미치게 완성되는 추세를 보였다.25) 한편, 1980년대의 경향을 이어받아, 1990년대 문화영화의 화면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컬러로 구성되었고, 소재나 주제가 겹치는 사례는 있었으나 아예 시리즈물로 기획되는 예는 많지 않았으며, 기록영화나 계몽영화의 스타일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단막극 양식이나 애니메이션 효과 등이 활용되기도 하였다.

작품의 주제 및 내용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문화영화는 거의 모두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기획·제작된 것들인데, 이 가운데 동시기 급변하는 시대상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며 199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들의 주제 및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정치 면에서는 이전 시기처럼 대통령의 외국 방문이나 국제 행사 참여 등의 동정을 기록하거나 1992년에 있었던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1997년에 있었던 제15대 대통령 선거의 의의 및 유의 사항 등을 알리는 작품들이 주가 되었다. 또한 1995년과 1998년에는 각각 광복 50주년과 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작품들도 기획·제작되었다. 반면에 북한과의 대치 국면 상황에 대한 경각심과 국가 안보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은 그 비중이 줄어들게 되었다.

둘째, 경제 면에 있어서는 한국 산업의 발전상 및 우수성, 국민 개개인의 근면과 절약의 필요성 등을 담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가운데, 영종도 신 공항 건설이나 서울 지하철의 노선 확장 공사 등의 경과 및 효과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작품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특히, ‘IMF 사태’가 발생한 1997년 11월 이후에는 이로 인한 경제적 파급이나 국가적, 국민적 대처 방안 등을 설명하는 작품들도 기획·제작되었다.

셋째, 사회 면에서는 여전히 공공 질서의 준수 또는 범죄 및 화재 예방, 노사 화합이나 청소년 계도의 중요성 등을 피력하는 여러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시대적 변화상을 반영하듯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자연 보호의 시급함을 역설하거나 정보화 사회의 생활 변화와 적응 사례를 제시하는 작품들도 기획·제작되었다.

넷째, 문화 면의 경우, 한국 특유의 자연 환경이나 고유의 전통을 문화재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적 요소들을 통해 소개하는 사례가 변함없이 주를 차지하였는데,26) 그 성격 상 이러한 부류의 작품들은 해외 홍보용으로 기획·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울러, 국제적 규모의 체육대회를 둘러싼 기본적인 사항 및 여기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의 활약상이나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행사의 준비 과정, 진행 상황 등을 요약하여 전하는 작품들도 만들어졌다.

1) 함충범, 「1990년대 영화진흥법의 제·개정 과정 및 양상 연구: IMF사태 전후 신자유주의 제도화 경향을 중심으로」, 『한국예술연구』 11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2015, 36쪽.
2) 유지나 외, 『한국영화사 공부: 1980~1997』, 한국영상자료원, 2005, 177쪽.
3)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외국영화에 대하여는 문화영화로서 수입을 추천할 수 없다. 1. 주된 소재나 구성에 있어서 극적 요소가 있는 영화 2. 순수기록물 또는 준기록물이 아닌 영화 3. 영화의 주된 내용을 해설이 아닌 대사로 처리한 영화 4. 교육적·문화적인 효과가 없는 단순한 오락위주의 영화”
4) 관련 항목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6. "뉴스영화"라 함은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제분야에 있어서 시사를 신속·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
5) 정종화, 『한국영화사: 한 권으로 읽는 영화 100년』, 한국영상자료원, 2007, 212~214쪽 참조.
6) 영화진흥공사, 『1995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새한정판사, 1995, 200쪽 참조.
7) 김재웅, 「한국 문화영화의 제문제: 제작과 유통을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석사논문, 1989, 11쪽.
8) 영화진흥공사, 앞의 책, 164~165쪽 참조.
9) 영화진흥공사, 『1997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집문당, 1997, 194~195쪽 참조.
10) 영화진흥공사, 『1991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새한정판 외, 1991, 158쪽 참조.
11) 참고로, 1991년 12월 9일 SBS가 개국하고 1993년 전국 컬러TV 수상기가 1,000만대를 넘어선 이래, 1995년 3월 1일에는 종합유선의 본 방송이 전파를 탔고 동년 5월 1일에는 케이블TV의 유료 방송이 개시되었으며 1996년 7월 1일에는 KBS 시험 방송을 시작으로 위성방송 시대가 개막되었다.
12) 영화진흥공사, 『1997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집문당, 1997, 207쪽.
13) 영화진흥공사, 『1999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집문당, 1999, 210쪽.
14) 이와 관련하여, 1990년대 중반 기존의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와는 별도의, 혹은 이로부터 일부 분리된 성격의 영화계 조직이 새로이 결성되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1994년 2월 28일 “한국영화산업의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회원간의 친목과 이익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국영상제작가협회’가 발족되고(영화진흥공사, 앞의 책, 211쪽) 1995년에는 “침체돼 있는 CF제작산업을 활성화하는 한편 대외시장 개방에 공동으로 대처하”려는 차원에서 가칭 ‘한국광고영상제작사협회’가 결성 움직임을 보였던 바,(「국내 방송 CF제작사 광고영화제작협 설립」, 『매일경제』 1995.5.8, 13면) 이를 통해 동시기 영상 문화 산업의 동향과 문화영화의 입지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15) 김동호 외, 『한국영화 정책사』, 나남출판, 2005, 313쪽.
16)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김문희)는 영화사 ‘장산곶매’ 대표 강헌 등이 제기한 영화법 12조 1항 및 13조에 대해 “공윤(‘공연윤리위원회’의 약자임-인용자)의 심의 제도는 사실 상의 사전검열 제도로 언론 출판의 사전검열을 금지하고 있는 헌법 21조 2항에 위배된다.”면서 위헌임을 결정한“ 바 있었다. 함충범, 앞의 논문, 40~41쪽.
17) 위의 논문, 47쪽.
18) 1990년대 들어 국립영화제작소직제는 한 차례 개정된 바 있었는데, 1989년 12월 30일 정부조직법의 개정에 따라 문화공보부의 공보 업무가 신설된 공보처로 이관됨에 따라 관련 내용을 반영한 개정안이 1990년 1월 3일 대통령령 제12898호로 공포·시행된 것이었다.
19) 이 수치는 해당 연도의 통계 자료를 담아 영화진흥공사에서 매년 발간된 『한국영화연감』(영화진흥공사 편)의 관련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아울러 자료를 통해, 외부 기관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작된 문화영화의 편수도 1993년의 경우 15편, 1994년의 12편 등이었음이 확인된다.
20) 이에 따라, 국립영상제작소의 부서명 역시 영상1과, 영상2과, 영상3과, 영상편집과 등으로 변경되었다. 영화진흥공사, 『1995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새한정판사, 1995, 399쪽 참조.
21) 「행정 정보 CA 통해 제공」, 『매일경제』 1994.2.28, 3면.
22) <대한뉴스>의 폐지를 둘러싼 움직임은 1980년대 초부터 있어 왔는데, 특히 문민정부 출범 직후 “그동안 일방적으로 정부 홍보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집권당인 민자당 차원에서 관련 논의가 다시 부상하게 되었고 이듬해에 종영되기에 이르렀다.(영화진흥공사, 『1994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새한정판사, 1994, 196쪽) 이에 공보처에서는 “산하 국립영화제작소를 국립영상제작소로 개편해 케이블텔레비전 방속에 주력”하는 한편 “문화영화제작을 계속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영화진흥공사, 『1995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새한정판사, 1995, 191쪽)
23)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2월 28일 문화체육부가 문화관광부로, 공보처가 국정홍보처로 개편됨에 따라, 국립영상제작소의 소속 부처가 기존의 공보처에서 문화관광부로 이관된 일도 있었다.
24) KTV국민방송 홈페이지(http://www.ktv.go.kr) 참조.
25) <대한뉴스>의 폐지가 결정되어 있던 1994년 시점에서 이미 “그 상영시간 또한 종전 8분에서 6분으로 단축”되었던 바,(영화진흥공사, 『1995년도판 한국영화연감』, 새한정판사, 1995, 200쪽) 이러한 추세가 문화영화 러닝 타임의 단축과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6) 해당 연도 『한국영화연감』의 내용에 따르면, 민간 제작 업체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심사의 대상으로 삼아 1993년까지 존속하였던 금관상 영화제에서의 ‘문화영화 부문’ 주요 수상작의 경우도 다음과 같이 여전히 이러한 종류의 것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1990년 제7회: 최우수작품상-<대자연속에 살아 숨쉬는 지리산>(대정프로덕션), 우수작품상-<금루>(현프로덕션), <한국의 춤 승무>(한국영상), 1991년 제8회: 최우수-<하늘새 마을지기>(현프로덕션), 우수-<한국인의 뿌리, 족보>(한일홍보), <전통식문화, 음청류>(서울영상), 1992년 제9회: 최우수-수상작 없음. 우수-<짚내림>(현프로덕션), <반야용선>(대정프로덕션), 1993년 제10회: 기획상 외 수상작 없음. 한편, 금관상 ‘홍보영화 부문’에서의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90년 제7회: 최우수작품상-수상작 없음. 우수작품상-<귀향>(태평양미디어), 1991년 제8회: 최우수-<건강한 사회 행복한 생활>(중앙영화사), <철판을 수놓는 어머니>(태평양미디어), <제17회 세계 잼버리>(희보영상), 1992년 제9회: 최우수-<천수만의 풍년가>(중앙영화사), 우수-<인간, 기술, 미래>(서울영상), 1993년 제10회: 우수작품상 <금강지구 농업종합개발>(김순식) 외 수상작 없음.

우리는 정보 가족 (1991)

문화영화 <우리는 정보 가족>은 재단법인 정보문화센터로부터 재료비와 제작 수수료를 제공받아 국립영화제작소 제작1과에서 만들어졌다. 연출은 김금동이 맡았으며, 촬영에는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되었다. 당시 「영화제작지시서」의 기록에 따르면, 제작 기간은 1991년 5월 20일부터 6월 30일까지였다. 보급 대상은 전국 극장이었던 바, 문화영화 의무상영제에 따른 일괄 배급을 상정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35mm 필름 156벌과 16mm 필름 2벌에 대한 복사가 계획되어 있기도 하였다.

러닝 타임 7분 정도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기획 목적은 “정보화시대의 정보통신기기 이용과 정보활용을 통해서 우리생활을 보다 편리하고 윤택하게 이끌어 준다는 내용”을 홍보함으로써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토록” 하려는 데 두어졌다. 이를 위해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서는 내레이션 설명이 포함된 기록영화 형식을 취하고 그 중간 부분은 단편적인 서사를 담은 짧은 극영화 1편으로 채움으로써 그 교육적, 계몽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화면에는 서울 시청 앞의 풍경이 펼쳐지며 “바야흐로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라는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깔려 나온다. 이후 신문사 윤전기, 거리의 포스터, 서점의 진열대, 거리의 전광판,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속 다양한 이미지가 각각의 쇼트를 장식하는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의 정보의 중요성과 편리한 생활을 위한 통신망 활용의 필요성이 계속해서 차분하고도 또랑또랑한 톤의 음성으로 강조된다. 이렇게 1분여가 지나면, 영화의 제목이 화면에 뜨고 곧이어 한 ‘정보 가족’의 사례가 소개된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간단명료하다. 슬하에 7살 유치원생 딸 하나를 둔 37세의 무역회사 부장 ‘정보통 씨(길용우 분)’가 자신의 아내인 33세 주부 ‘김옥자 씨(견미리 분)’의 생일 기념으로 주말 제주도 여행을 약속하였으나, 회사 일로 인해 이행이 어려워지자 여행을 보류하는 한편 아내가 제안한 저녁 외식과 음악회 관람도 사양하는 대신 꽃 배달 서비스를 통해 장미꽃 다발을 선물함으로써 결국에는 아내와 딸을 웃음 짓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극중 인물의 이름에 반영되어 있듯, 정보통 씨는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주요 정보를 주로 컴퓨터를 통해 습득한다. 아울러 업무뿐만 아니라 꽃 배달 서비스 등 일상에서도 편리함을 영위한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주부 김옥자 씨 역시 전화 서비스를 통해 주말 날씨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고 컴퓨터를 사용하여 제주도행 항공권을 예매하는 등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들 부부의 대화는 다름 아닌 컴퓨터 전자 메일로 이루어진다.

서울 아파트에 거주하는 3인 구성의 한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짜인 단막극이 종결되면, 나머지 1분 10여초 동안 영화의 흐름은 다시 처음 1분여와 같이 유지된다. 영화는 전화를 이용한 ARS(음성정보서비스)나 컴퓨터를 이용한 PC(정보통신)서비스를 통해 스포츠나 레저, 날씨, 각종 문화행사, 시간, 국내외 주요뉴스, 증권이나 부동산, 금융 및 상품유통, 관광 및 교통 정보 등을 얻을 수 있음을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알기 쉽게 정리하고, 이후 다양한 장소에서 각종 사례를 찍은 실사 장면들을 통해 누구라도 “정보 사회의 주인공으로서 새로운 정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한다.

1990년대는 컴퓨터의 보급과 발달이 가속화되고 무선호출기를 거쳐 휴대폰 등 개인 통신 장비가 상용화되며 PC통신에 이어 인터넷 구축이 보편화되어 가던, 정보통신의 혁신적 변화가 일던 시기였다. 문화영화 <우리는 정보 가족>에는, 이미 1990년대 초 시점에서 이렇듯 급변하게 될 새로운 환경을 예측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하고 적극적인 대응 태세를 갖추도록 함으로써 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려 한 정부 당국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고 할 만하다.

대전 너른 벌에 희망찬 기운 (1993)

이 작품은 대전직할시의 의뢰를 받아 “대전의 유구한 역사와 시대별 사건, 관광명소 및 대전의 발전상을 소개하여 ’93엑스포개최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엑스포를 맞는 시민들의 긍지와 결집력을 고취”한다는 취지 하에, 국립영화제작소 제작1과에서 이창호의 연출로 만들어졌다. 관련 문서를 확인하건대, 1992년 10월 제작이 개시되어 1993년 2월경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된 이 작품은 당초 20분 분량의 ‘대전, 오늘과 내일’이라는 제명으로 기획되었으나, 중간에 ‘엑스포와 대전’으로 바뀐 뒤 한 차례 더 변경이 이루어졌으며 최종 러닝 타임도 16분 15초 정도로 편집되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홍보용 문화영화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컬러 및 흑백 영상과 사진 이미지를 통해 대전의 과거와 현재가 전시되고 중심부와 주변부의 곳곳이 시각화됨과 동시에 남녀 두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정확하고 구체적인 해설이 어우러지면서, 그 면면에 대한 소개와 설명이 상세하고도 알기 쉽도록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제작지시서」 상의 수록 내용은 “1 교통, 관광, 문화, 교육, 관광의 요충지 대전의 상징(백목련, 까치) 2. 청동기 시대부터 대전의 유구한 역사와 시대별 사건 3. 교통안내, 관광명소와 문화재, 특산품 쇼핑산업 4. 대덕연구단지, 교육과 문화예술등 5. 에필로그(대전엑스포현장과 조감도, 엑스포개최의의등)”이었는데, 제작 과정에서 영화는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순서에 입각하면서도 구성에 있어 보다 체계성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완성본에서는 지구본과 세계 지도에 이어 나온 한국 지도 속에 대전의 위치가 표시된 뒤, 대전과 관련된 다양한 사진 자료 위에 제목 이미지가 나타나며 영화가 시작된다. (1) 대전의 지리적 위치와 지형, 자연 환경이 소개된 후, (2)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의 대전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때 유물 및 유적에 관한 사진과 영상, 근대 이후 대전의 모습이 담긴 과거 흑백 사진과 영상이 활용된다. 또한 대전역, 목척교, 유성과 신탄진의 옛 5일장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과거 흑백 이미지와 현재 컬러 영상으로 대비된 채 비추어진다. (3) 다음으로, 1989년 ‘직할시’로 승격한 대전의 면적, 인구, 신시가지에 관한 설명, 오정동의 농수산물시장, 동구인동의 공단, 평촌동의 한국담배인삼공사를 통한 대전의 농수산업 및 공업에 관한 설명, 북으로 대표되는 특산물과 시민회관, 보문산 공원, 시내 중심가, 유성온천, 대청호와 계룡산 국립공원 등 대전 시민의 문화, 여가, 휴식, 휴양, 관광 공간에 관한 설명, 대전국립묘지에 관한 설명이 관련 영상과 더불어 차례로 이어진다. 아울러 (4) 향교와 서원을 비롯한 옛 선열들의 교육 및 학술 기관들과 1917년에 세워진 관립 경성중학교 대전분교 등 근대 교육 기관에 이어 국립 충남대학교, 시립 한밭도서관 등 현재의 교육 및 학술 기관들이 소개된다. 특히 국립 중앙과학관, 대덕연구단지 등을 통해 ‘과학 도시’로서의 대전의 면모가 강조되는데, 그러면서 (5) ‘대전 엑스포 93’을 계기로 2000년대 미래 도시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엑스포 부지와 공간 조감도, 마스코트 등의 영상 이미지를 통해 역설된다. 그리고 대전 시민들의 표정과 대전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주지하다시피,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대전에서는 세계박람회(EXPO)가 개최되었다.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세계 108개국과 33개의 국제기구가 참가하였는데, ‘새로운 도약의 길’이라는 주제가 붙은 대전 엑스포를 통해 정부는 서울 올림픽(1988)의 영광을 재연하고 첨단 과학을 주도하며 21세기 선진 산업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다. 이에, 대전직할시 측에서도 대전을 알리고 엑스포 행사를 홍보하려는 차원에서 국립영화제작소에 의뢰하여 문화영화 <대전 너른 벌에 희망찬 기운>을 내놓았던 것이다.27)

1990년대 한국에서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다양한 국제적 행사의 개최가 성사되었던 바, <광주 비엔날레>(1996)나 <국제의회연맹 서울 총회> (1997) 등과 같이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기획·제작된 여타 문화영화 내에도 이들 행사 관련 사항들이 종종 담겨지곤 하였다.2) 이미 1992년 말에 기획되어 1993년 초에 완성된 <대전 너른 벌에 희망찬 기운>의 경우 이들 작품보다 선행되어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울러 이들과는 달리 대전 엑스포 개최 이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특색을 보인다고 하겠다.

경복궁 (1994)

<경복궁>은 국립영화제작소 제작3과에서 해외 홍보용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관련 문서에 따르면, 작품의 목적은 “경복궁의 아름다운 전각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흔히 볼 수 없는 궁궐복원 과정도 수록하여 소개한다”는 데 두어졌고, 제작 기간은 당초 1994년 4월부터 11월까지로 상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촬영 과정 중에 국립영화제작소가 국립영상제작소로 변경되면서 담당 부서도 영상2과로 옮겨졌으며, 감독 역시 김성민에서 백용선으로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촬영은 정형준과 홍성주가, 해설은 우재근이 맡았고, 1994년 12월 완성 후 VHS 15벌이 복사되어 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 등에 배포되기도 하였다.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된 20분 분량의 문화영화로 기획된 이 작품의 「영화제작지시서」 상 수록 내용은 “1. 근정전, 경희루, 향원정 2. 단청작업 3. 목작업 등 복원공사”였으나, 「해외홍보영화 “경복궁” 제작 완료 보고」 공문 상에는 “o 서울전경 o 왕도로서의 서울 o 궁궐, 궁궐과 역사 o 서울의 궁궐 o 경복궁, 경복궁의 특징 o 경복궁의 훼손, 복원계획, 복원 o 경복궁의 의의”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를 토대로, 영화는 17분 30여초 동안 경복궁을 둘러싼 설명을 다채로우면서도 체계적으로 행한다.

근정전이 찍힌 사진 위로 한글과 영어로 영화의 제목이 표기된 뒤, 약 1분 동안은 한강, 중구 및 종로구의 도심, 여의도 일대, 암사동 선사 유적지 등의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한국의 수도 서울에 대한 소개 해설이 깔린 채 화면을 장식한다. 그리고 1분 30초가량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 등 조선 왕조 시대에 서울 지역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음으로, 관련 화면들과 어우러진 채 “조선의 대표적인 궁”인 경복궁의 역사와 공간에 관한 개괄적 소개가 50여초 동안 있은 후, 경복궁 내 주요 건축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5분가량 뒤따른다. 이때 광화문, 근정문, 일화문, 월화문 등의 주요 문, 근정전, 사정전, 천초전, 수정전 등의 주요 건물, 경회루, 정자, 취향교 등의 연못 주변 건축물, 자경전과 그 굴뚝 시설, 집옥재와 부속 건물들, 육상궁을 비롯한 칠궁 등이 차례로 다루어진다.

시작 후 8분 20여초가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해설의 초점을 달리한다. 먼저, 1분여 동안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경복궁의 훼손 사례를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이에 정부가 1990년부터 이를 바로잡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점을 만춘전의 복원 사실을 예로 들어 알려준다. 이어 약 7분간 ‘대목수’ 신흥수의 지휘 하에 진행되는 나무 골재 구축 작업, 기와 작업, ‘만봉 스님’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는 단청 작업 등을 통해 경복궁 복원의 과정과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로 인한 경복궁 이미지의 변화상을 이미지 특수 효과를 활용하여 제시한다. 이어 나머지 1분 정도는 경복궁의 가치와 의의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이와 함께 경복궁 복원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회루 사진 위로 제작 참여자들의 한글 자막과 국립영상제작소의 한글, 영문 자막을 표기하며 끝을 맺는다.

경복궁의 곳곳이 담긴 다양한 영상 화면 및 과거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 이미지와 잔잔한 배경 음악 위로 남성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차분히 전해지는 친절한 해설이 조화를 이루는 <경복궁>은, 완성 후에는 4개 국어로 된 외국어 판이 제작됨으로써 해외 홍보용이라는 당초의 취지를 충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바탕에 1990년대 들어 본격화되어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1995년 8월 15일 중앙청, 즉 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대한 철거가 결정됨으로써 크게 부각된 정부의 경복궁 복원 사업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이 작품에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과 ‘한국 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기획·제작된 <서울 관광 안내> (1994) 및 <관광한국>(1996) 등 여타 작품들의 경우처럼, 개방화의 조류 속에 한국의 전통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한편 관광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한 1990년대 당시의 정책적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쓰레기 종량제 그 후… (1995)

문화영화 <쓰레기 종량제 그 후…>는 “’95년 1월 1일 시작된 쓰레기 종량제의 정착과정과 성과 및 자원 재활용을 통한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홍보”한다는 목적 하에 국립영상제작소 영상2과에서 국내 홍보용으로 기획되었다. 사용 필름은 35mm 컬러였고, 제작 기간은 1995년 2월부터 4월까지 약 2개월간이었으며, 연출은 박종철이, 촬영은 이상호가, 해설은 이명희가 담당하였다. 당초 제명은 ‘다시쓰는 자원’이었으나, 영화 제작이 마무리 단계에 있던 1995년 4월에 변경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작품 완성 이후에는 전국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해 35mm 필름 164벌을 복사 수량으로 마련해 둔 데다가, 9벌의 VHS와 별도로 케이블TV에 방영하기 위한 텔레시네(Tele-cine) 작업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영화제작지시서」 상에 러닝 타임은 10분으로, 수록 내용은 “o prologue o 쓰레기 매립지의 가득한 쓰레기들 o 종량제 실천 및 수범사례 o 자원 재활용 o 애니메이션 – 1인당 쓰레기량등 o 간편해진 쓰레기 수거 o epilogue”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 완성본은 시간 면에서는 5분 50여초로 단축되었음에도, 보다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관련 현안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갖도록 유도한다.

지구본 속 한국 지도 안에 가득 찬 쓰레기 사진이 한 가정의 분리 수거 장면 및 꽃밭 그림 이미지로 바뀐 뒤 그 위로 제목이 붙는다. 이어, 한 아파트촌의 전경이 비추어지고 한 가정에 모여 쓰레기 분리를 행하는 이곳 주부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쓰레기 문제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시작으로, 화면에서와 같은 주부들의 노력으로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순조롭게 정착되고 있음이 전해진다. 뒤이어 한 주부가 나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고, 그 음성이 자연스레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역할을 하면서 서울 상계동의 한 아파트에서의 쓰레기 분리 사례가 화면에 채워진다. 이렇게 1분여가 지나면, 이후 1분 20여초 동안 지역 주민들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일본 및 생활 속에서 자발적으로 분리 수거를 실천 중인 독일의 사례와, 쓰레기 매립지 화면 위에 애니메이션 효과로 자막이 등장하며 유럽, 일본, 한국의 ‘1인당 1일 쓰레기 배출량’ 비교 수치가 차례로 제시된다. 화면은 다시 서울 주택가와 아파트촌에서의 쓰레기 재활용 모습 및 애니메이션 글씨 효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약 1분간 쓰레기 배출 방법에 관한 기본 정보가 제공된다. 그리고 이후 1분 40여초 동안 재활용 쓰레기가 어떠한 공정을 거쳐 유용한 재료로 재탄생하는지가 종이, 유리, 음식물 찌꺼기 등의 순으로 재생 산업의 차원에서 소개된다. 그리고 나머지 약 1분간은 종량제 실시 후 ‘쓰레기 감량 및 경제적 효과’와 그 필요성이, 사람들의 분리 수거 모습, 애니메이션 자막, 숲 속의 풍경의 화면을 배경으로 하여 강조된다.

이처럼 <쓰레기 종량제 그 후…>는 1995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쓰레기 종량제’의 성공적 정착의 사례와 그 사회적, 경제적 효과, 그리고 지속적 유지의 필요성 등을, 다양하고 체계적인 화면 구성과 명확하고 논리적인 해설 전개를 통해 효율적으로 알린다. 1990년대에도 국립영화제작소나 국립영상제작소에서는 <맑은 물 맑은 공기>(1990), <아껴쓰는 전기>(1992), <선진 질서의 현장>(1993) <0.5초의 방심>(1995), <경주는 프로 운전은 초보> (1996), <여름 이야기>(1997) 등 생활 속 실천 사안을 다룬 문화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졌는데, <쓰레기 종량제 그 후…>의 경우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따른 생활의 변화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지닌다고 할 만하다.3) 다만, 화면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 그 중에서도 주부들로 설정되어 있는 바, 이를 통해 현재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1990년대 당시의 성역할에 대한 일반화된 통념이 엿보이기도 한다.

다시 뛰자! 코리아! (1997)

이 작품은 국립영상제작소에서 국내 홍보용으로 만들어졌으며, 「영화제작협조요청서」 등 관련 문서 상에는 영화의 제명이 ‘다시뛰자 KOREA’로 표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제작 목적이 “우리경제가 위기에 처한 원인을 진단하고, 위기극복을 위해서 정부, 기업, 국민모두가 고통을 분단(‘분담’의 오기로 보임-인용자)하고 이 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해야 함을 홍보”한다는 데 두어졌고, 형식적인 면에서는 ‘세미다큐멘터리’ 구성 방식을 취하면서 단편적 서사를 지닌 극적 연출을 가미한다는 특징을 띠기도 하였다. 감독은 강명준이, 촬영은 윤주환과 이상호가, 각본은 김지영과 상인숙이 담당하였다. 촬영에는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되었으며, 당초 9분으로 기획되었던 것과 비슷한 9분 40여초 분량으로 완성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 작품의 제작 기간이 계획 상 1997년 12월 6일부터 16일까지였고 실제로도 12월 17일까지 하루 정도 연장되었을 만큼 매우 짧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동년 11월 발생한 ‘IMF 사태’ 직후 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들의 협조를 구하려는 차원에서 ‘문화영화’로서 이 작품이 시급히 기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는 <다시 뛰자! 코리아!>라는 영화 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는 듯 보이는데, 결국 이 작품은 1997년 12월 18일부터 1998년 1월 24일까지 전국 극장에서 1, 2순위 동시 상영을 통해 관객에게 제공되었으며 계획 단계에서 K-TV 방영을 예정하고 있기도 하였다. 35mm 필름 복사 수량에 있어서도, 계획 당시에는 전국 극장에서의 상영을 위한 157벌 정도였으나 제작 완료 후 306벌로 크게 늘었다. 그만큼 이 작품의 메시지가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작완료보고」 공문 상의 수록 내용은 “기업체 면접을 앞둔 극중의 이유복과 자금난을 겪고 있는 아버지와 이유복을 통해 IMF자금지원을 받아야 하는 최근의 심각한 경제위기의 원인진단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각 경제추제(‘경제주체’의 오기로 보임-인용자)들의 노력 등을 나레이션과 세미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러 가지 산업 현장의 사진 이미지 위로 ‘다시 뛰자!’와 ‘코리아!’라는 자막이 띄워지고 힘차고 경쾌한 음악이 깔리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이어, 자연스레 배경음이 크리스마스 캐럴로 바뀌면서 장면 역시 전환된다. 화면에는 한 카페가 등장하고, 이후 나이트클럽과 포장마차, 대기업의 면접 시험장, 은행, 승용차 안, 거리의 벤치, 합격자 발표 장소, 공원 등의 순서로 공간적 배경이 변화한다. 그러면서, 20대 청년 유복(이상인 분)이 ‘IMF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망각하고 이전의 생활 습관을 버리지도, 별다른 문제 의식을 느끼지도 못하다가 아버지(최낙천 분) 회사의 자금난과 자신의 대기업 면접 시험 탈락을 경험한 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서사적 흐름이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향락 풍조에 젖어 있었음을 지적하며 IMF 시대에 걸맞은 올바른 생활 습관을 강조한다. 그리고 국민의 합리적 소비와 더불어 정부의 긴축 재정, 기업의 생산성 향상의 필요성도 역설한다.

영화의 주인공 ‘유복’은, 이름처럼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성장해 왔으며 대기업 두 곳에서 1차 시험에 합격해 놓은 청년이다. 그러나 IMF 사태로 인해 그동안 물질적 기반을 제공해 준 아버지 회사의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자신마저 면접 시험에서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차를 팔아 아버지에게 금전적 지원을 하는 한편 아버지와 함께 힘과 용기를 내어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이와 같은 유복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IMF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바람직한 삶의 변화상을 제시한다. 그리고 유흥에 빠져 있는 유복의 모습이 담긴 ‘나이트클럽’ 신(scene)과 자금 사정이 크게 나빠져 궁지에 몰리게 된 아버지의 모습이 묘사된 ‘은행’ 신 다음에 여러 자료 화면들과 남성 아나운서의 음성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적 영상을 삽입함으로써, IMF 사태의 발생 원인과 현실적 여파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근검절약 실천하여 우리경제 살립시다.”라는 구호 풍의 문장을 제시하며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국립영화제작소 혹은 국립영상제작소에서 만들어진 문화영화 가운데는 절약 및 저축 생활을 권하거나 독려하는 작품들이 일정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건국 이후 최대의 경제적 위기’로 일컬어지는 IMF 사태를 통과하며 보다 더 당대의 현실을 제시하고 국민의 참여를 호소하는 방식의 <다시 뛰자! 코리아!>와 같은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아울러 그 경향이 (1998), <위기를 기회로>(1998) 등을 통해 1998년으로도 이어지는데, 이를 통해 1990년대 말 당시의 경제적 상황과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문화 영화 48년 (1998)

<문화 영화 48년>은 “1950년도부터 문화영화를 제작 전국극장을 통해 48년동안 상영되어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며 사랑을 받아온 문화영화가 금년 6월 30일부로 종영됨에 따른 추억의 영화를 제작 홍보”하려는 목적 하에 국립영상제작소에서 국내 홍보용으로 기획된 문화영화이다. 연출은 김상연이, 촬영은 장달용이 맡았다. 관련 문서에 따르면, 촬영을 위해 35mm 컬러 필름이 사용되었고 제작 기간은 1998년 5월 20일부터 1주일간이었으며 보급 대상은 ‘전국 극장’ 및 ‘K-TV 방송’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계획대로 35mm 필름 321벌이 복사되었다. 그런데 전국 극장에서 1, 2순위 동시 상영이 이루어진 기간이 1998년 6월 14일부터 30일까지였던 바,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 작품 자체가 극장에서 의무적으로 상영된 마지막 문화영화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계획 단계에서의 러닝 타임은 8분 정도였으나, 완성본은 10분 30여초로 그 시간이 늘었다. 「영화제작협조요청서」 상의 수록 내용은 “타이틀, 초기영화, 노천홍보영화, 이동영사, 명동시공관뉴스영화 상영, 역사의 기록, 세계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총51편의 문화영화가 작품상 수상작 등”이었다.

내용 상 이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단순하게 짜여 있다. 해방에서 “최첨단 대규모 멀티 영화 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립영상제작소와 그 전신인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문화영화 제작을 통해 영상 매체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음을 1958년 시공관에서의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무료 상영이 실시된 사례를 통해 주지시킨 뒤, 이들 기관에서 만들어진 문화영화의 전반적인 작품 경향에 대해 각 시기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을 예로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구성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연대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시대별 키워드가 제시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영역에서 한국이 어떠한 변화를 경험하였고 또한 그것이 당대의 문화영화 속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다양한 자료 화면과 뉴스영화 톤의 내레이션 해설을 통해 설명한다.

즉, 1940년대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록한, 1950년대의 경우 한국전쟁, 전후 경제 상황 및 대중 예술과 문화적 행사 등을 담은 문화영화가 만들어졌음을 밝힌다. 1960년대에 관해서는 4.19혁명,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한, 사회 재건 및 국토 건설, 산업적 발전, 일상의 변화, 베트남 파병, 1.21 사태 발발과 향토 예비군 창설, 고속도로 건설 등을, 1970년대에 대해서는 새마을운동, 원양 어업과 중동 건설, 100억 달러 수출 달성, 장발과 미니스커트의 유행, 지하철 개통, 저축·절약·이웃돕기·산아제한 등 사회 캠페인의 확산, 국토 개발 및 방위 등을, 1980년대의 경우 광주민주화운동, 환경 보존 운동, 이산가족 상봉, 서울올림픽 개최 등을 둘러싼 여러 문화영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1990년대를 대상으로 하면서는 이전 시기를 보다 광범위하게 포괄하며 설명의 범주를 넓힌다. 가령, 서울올림픽 개최(1988)와 바르셀로나올림픽 참가(1992)를 자연스레 연결하고, 남북한 UN 동시 가입(1991)에 관한 내용과 함께 이전까지의 남북 교류 상황을 제시하며, 대전 엑스포(1993)와 광주 비엔날레(1993) 개최를 동시에 다루는 등의 식이다.

이어 국립영상제작소 체제 하에서 교통 문화 및 공공 질서 정착을 기하거나 광복 50주년을 기념하거나 외환 위기 극복을 추구하거나 전통 문화의 중요성을 알린 작품들이 제작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그동안 국립영화제작소, 국립영상제작소에서 2700여 편의 문화영화가 제작되어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가 수상하였다는 사실과, 이렇게 48년 동안 만들어진 문화영화를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영상 실록’으로 철저히 관리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그러면서, “매달 한 편씩 극장에서 소개해 오던 문화영화가 이번 6월 30일로 막을 내린다“는 감사의 멘트와 더불어, 앞으로도 “국립영상제작소는 국민과 정부를 이어 주는 케이블 TV 채널 14 K – TV와 함께 수준 높은 문화 영화와 국가 영상 기록을 계속 해나가 겠습니다.”라는 문장과 국립영상제작소의 주소와 전화 및 팩스 번호를 자막에 띄우면서 막을 내린다.

이와 같이, <문화 영화 48년>은 국립영화제작소와 국립영상제작소의 제작 활동에 대한 기나긴 역사적 발자취를 자기 반영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것은 다시 한국 문화영화의 과거를 더듬어 보는 데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인 자료 중에 하나가 되어 있다.

1) 관련 문서를 보건대 이 작품은 35mm 2벌과 VTR 6벌이 복사되었던 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극장에서의 의무상영 대상물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2) 1990년에는, 1988년에 개최된 제24회 서울 하계 올림픽 관련 기록이 담긴 <세계는 서울로>가 약 65분 분량으로 완성되어 선보여지기도 하였다.
3) 1990년대에 기획·제작된 이러한 종류의 문화영화로는, 1993년 8월 12일 시행된 ‘금융실명제’를 배경으로 저축 생활을 권장하는 <밝은 내일>(1994) 등을 꼽을 수 있다. 시기적으로 앞서 만들어진 이 작품을 보건대, 시간적으로나 내용 구성적인 측면에서 <쓰레기 종량제 그 후…>와의 유사성이 발견되기도 한다.

35208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2동
© National Archives of Korea.

국가기록원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