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루 ⓒ 문화재청
1434년 8월 6일(음력 7월 1일)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자격루를 경복궁 보루각에 설치한 날이다. 정부는 이날을 기념하여 지난 1990년 <한국인 재발견운동> 두 번째 인물로 장영실을 선정하고, 그 해 8월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각종 학술대회와 기념공연을 가졌다. 또한 KBS는 지난 2일 종영된 역사드라마 <징비록(懲毖錄)> 후속으로 <장영실>을 방송하기로 했다.
타고난 명민함과 노력으로 노비의 신분을 극복하고 종3품 대호군에 오른 그였지만 말로는 쓸쓸했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임금의 수레를 잘 못 만든 죄로 직첩(職牒)의 회수와 곤장 80대의 수모를 겪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올해로 573년이 되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장영실은 왜 아직도 회자되는 것일까. 물론 뛰어난 업적 때문이지만, 성공신화의 주인공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 비운의 주인공까지 가장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역사인물이지만, 그를 주인공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KBS는 <징비록>이 끝나는 대로 공백 없이 <장영실>을 방송할 예정이었으나, 주인공 캐스팅 등에 공을 들이다 제작 일정이 늦어져 내년 1월에나 첫 방송이 시작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주말사극은 대부분 50부작 이상으로 편성되었으나, 이번은 관련기록이 워낙 부족해 24부작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연출을 맡은 김영조 PD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허구적인 요소를 넣어 늘릴 수도 있지만, 사실에만 입각하여 만들 계획이다.”며 “자료가 많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으나 가계나 성장과정 등에 관한 기술은 거의 없고, 『아산장씨세보』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일부 찾아 볼 수 있다. 부친 장성휘(蔣成暉)는 중국 항주에서 이주한 장서(蔣壻)의 9세손으로 전서까지 지낸 양반이었으나, 그의 아들 영실이 어떤 이유로 관노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장영실의 조선왕조실록 첫 등장은 세종 7년인 1426년 4월 18일 세 번째 기사이다. 평안도 감사는 사직 장영실이 말하는 대로 석등잔 30개를 교체하라는 내용이다. 사직(司直)은 오위(五衛) 소속 정5품인데 일부 무관을 제외한 대부분은 무보직으로 녹봉을 정하기 위해 부여하는 직급이다.
『세종실록』 61권 1433년 9월 16일 세 번째 기사는 장영실의 호군(護軍) 승진을 논의한 것으로 임금이 그의 승진발탁 배경을 에둘러 설명한 대목이다. 임인(1422년)과 계묘(1423년) 무렵 상의원 별좌를 시키려 했으나 이조판서 허조 등이 기생의 아들임을 들어 심하게 반대하여 이루지 못했다는 것. 이때 임용하려 했던 상의원(尙衣院, 임금의 의복, 궁중의 일용품 등을 조달하는 기관) 별좌는 종5품으로 녹봉이 없는 무녹관(無祿官)인데, 360일 이상을 근무하면 일반직 임용이 가능한 자리이다. 장영실을 중용 하려는 세종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 태종 때부터 보호를 받아 온 그였지만,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매를 맞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세종실록』 28권 1425년 5월 8일 여섯 번째 기사는 뇌물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사헌부가 이간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대사헌 황현과 양주부사 이승직, 한을기, 황득수, 장영실, 구중덕, 조맹발 등에게 태형 20대를 구형하자 임금이 공신의 자손인 득수와 맹발은 면죄하고 나머지는 태형을 가하라고 명했다.
1430년 4월에는 상관을 잘못 만나 2계급 강등과 벌금형을 당하기도 했다. 종사관으로 북경에 다녀오던 중 사은사 이징의 불법사냥과 중국인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가담 정도에 따라 귀양, 직첩회수와 장형, 2계급 강등, 속전(벌금형) 등의 처분을 받았는데, 종사관 장영실과 장영은 2계급 강등과 속전에 처해졌다. 의안대군의 아들로 종친인 이징은 태조 2년인 1402년 동료의 첩을 빼앗고 싶으나 뜻대로 안되니 도와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 여성을 거의 죽을 정도로 폭행하여 구속되었으며, 1414년에는 속량한 노비의 코를 베어 구속되는 등 폭력적인 인물로 사은사를 잘못 만나 종사관들이 덤터기를 썼다.
일반직 임용이 가능한 별좌까지는 여러 차례 고배를 마셨지만, 그 후로는 고속 승진했다. 『세종실록』 55권 1432년 1월 4일 다섯 번째 기사는 사직 장영실을 청옥을 채굴하기 위해 벽동군에 보냈다는 것이며, 다음 해 9월 16일 세 번째 기사는 대신들의 반대로 어렵게 별좌가 된 장영실에게 호군(護軍, 정4품 무관)을 주겠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432년 1월 4일부터 1433년 9월 16일 사이에 사직에서 별좌가 되었으며, 일반직 임용 최소 근무연한인 360일이 지나자마자 승진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날 기사는 세종이 얼마나 총애했는지 보여준다.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태종이 보호하셨고 나 또한 이를 아낀다. 영실은 공교한 솜씨뿐만 아니라, 인간됨과 성질이 좋고 똑똑하기가 보통이 아니다. 내 가까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을 전하기도 했는데 이 정도는 공도 아니다. 자격궁루(물시계) 제작을 내가 지시하기는 했지만,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내가 듣기로 원나라 순제 때 만든 물시계도 정교하다고는 하지만, 영실의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극찬의 결론은 그래서 호군으로 승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의 의도를 간파한 영의정 황희는 태종 때 김인은 평양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함이 뛰어나 호군으로 특별히 제수 되었고, 이 같은 출신들이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은 자가 무수히 많은데 유독 영실만 안 될 이유가 없다며 출신에 대한 논란을 차단했다. 이날은 임금과 영의정이 손발이 척척 맞아 반대의견을 낼 겨를도 없이 일사천리로 승진심의를 끝냈다.
세종 16년인 1434년 7월 1일은 요즘의 자명종처럼 각 시간마다 소리를 내는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설치한 날이다. 이날 『세종실록』 네 번째 기사는 새로 만든 누기(漏器, 물시계)의 구조와 원리, 설치장소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새 누기는 과학적으로 만들어져 간의(簡儀, 장영실이 만든 천체관측기구)와 참고하여 사용하면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다. 또한 시간을 알리는 자가 차착(差錯, 앞뒤가 맞지 않음)할까 염려하여 호군 장영실에게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시간을 스스로 알릴 수 있도록 목인(木人)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장영실 영정사진 ⓒ 박영길 화백
이처럼 이날 기사는 자격루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말미에 뜬금없이 장영실의 신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실은 동래현 관노였는데 성품이 정교하여 항상 궐내의 공장(工匠)을 맡아왔다. 명문가 출신들이었을 승지와 사관들의 인식과 의도를 확연히 드러낸 대목이다.
장영실은 우리나라 활자본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의 주조에도 참여했다. 1434년 7월 2일 첫 번째 기사는 주조기술이 정밀하지 못하여 인쇄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에 지중추원사 이천을 감독으로 직제학 김돈, 직전 김빈, 호군 장영실 등에 새로운 주자를 만들게 했다는 내용이다. 『효순사실』, 『위선음즐』, 『논어』 등의 자형 (字形)을 자본(字本)으로 삼고, 부족한 것은 진양대군이 쓰게 하여 주자(鑄字) 20여만 자를 만들었는데, 하루 인출량(印出量)이 갑자자의 2배인 40여장에 이르고, 자체(字體)가 바르고 깨끗하여 일하기가 갑절은 쉬워졌다는 것이다.
세종의 명으로 온갖 신기술 개발과 전습(傳習)을 도맡았던 장영실은 호군이 된지 4년여 만에 종3품 대호군이 되었다. 1438년 1월 7일 세 번째 기사는 임금이 최첨단 관측기구들이 설치된 흠경각(欽敬閣) 완성을 기념하여 우승지 김돈에게 글을 쓰게 했다는 내용인데, 이글에 대호군 장영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흠경각의 건설과 이곳에 설치된 각종 기구의 자동화에 기여한 공로로 대호군으로 승진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승지 김돈은 이날 기념사를 통해 흠경각을 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했으나 규모와 제도는 임금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제했다. 당나라 황도유의, 송나라 부루표영, 원나라 앙의 등도 정교했지만, 각각 한 가지씩 설치되었고, 운용도 사람의 손을 빌려야 했는데, 흠경각은 여러 가지 관측기구를 한곳에 설치했으며 모두 자동화 했다. 하늘과 해의 돗수, 누수시간을 재는 여러 가지 기구가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울리고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란다. 측량도 털끝만큼의 틀림이 없어 기술이 기묘하기만 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장영실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라는 수식어와 어울리지 않게 초라한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었다. 관노에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종3품 대호군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은 고비를 넘기며 달려 왔지만, 몰락은 잠깐이었다. 그가 감독하여 제작한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수레)의 고장이 화근이 되었다.
『세종실록』 95권 1442년 3월 16일 두 번째 기사는 대호군 장영실이 감조(監造)한 안여가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니 국문한다는 내용이다. 한 달여가 지난 4월 25일 첫 번째 기사는 이천의 감독으로 행궁(行宮)을 제조하다가 기와가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임금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는 불경죄로 공사에 참여했던 박강, 이순로, 이하를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공사 중에 기와장을 떨어뜨린 것도 이 정도인데, 수레가 부서진 건 당연하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
이날 임금은 장영실 탄핵이 끝나면 다시 논의하자며 선고를 연기하는데, 사헌부의 구형대로 선고하면 장영실에게도 중형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알아채고 내린 조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다음날인 26일 장영실은 곤장 80대, 감독을 소홀히 한 임효돈, 최호남은 곤장 70대,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조순생은 무혐의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장영실의 비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월 3일 임금은 영의정 황희에게 장영실의 처벌에 대해 다시 논의토록 했는데, 곤장 80대의 확정과 함께 직첩회수의 처벌이 더해졌다.
그날 이후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를 두고 57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장영실을 제거하려는 사대부들의 주도면밀한 계략부터 혼천의 설치를 두고 조선을 못마땅하게 보던 명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한 세종의 배려까지,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
장영실은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지만. 그가 실존했었음과 남긴 업적은 영원한 우리의 자랑이다. 미래 100년의 먹거리는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에 있다. 얼마 전 아이돌 가수도 좋고 의사도 좋지만, 세상엔 선생님도 필요하고 기술자도 필요하다는 모기업의 TV광고가 있었다. 화려하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요즘의 세태를 담고 있다. 이번 KBS 드라마 <장영실>을 통해 좀 더 많은 청년들이 과학자를 꿈꾸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