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전설이 된 명의(名醫) 허준의 빛과 그림자
『조선왕조실록』 - 서자에서 정1품 정승까지, 전국에 설화만 10여 가지
『동의보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의보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지난 9월 22일(1610년 당시 음력 8월 6일)은 동양 최고의 의서 『동의보감』이 완성된 날이다. 이에 앞서 6월 22일은 우리나라 보물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동의보감』이 국보로 승격한 날이다. 또 이 보다 앞선 5월 20일은 중동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 환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진된 날이다. 올해로 서거 400주년을 맞은 의성(醫聖) 허준을 생각나게 하는 이유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전염병의 치료와 예방체계를 정립한 의사여서 더욱 그렇다.

허준 영정

허준 영정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조선시대, 서자로 태어나 중인계급의 영역이던 의술 하나로 정1품 정승에 오른 극적인 생애와 의학적 업적은 설화가 되고,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에 대한 감사와 흠모가 오죽했으면, 설화가 되었을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허준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가 전국에 10여 가지에 이른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편찬한 『한국구비 문학대계(1983)』 에 의하면,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중국의 천자를 치료하기 위해 가던 중 호랑이를 만나 치료해 주었는데, 의술에 감복한 호랑이가 커다란 금침(金針)을 주었고, 이것으로 황제를 고쳐 중국까지 소문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설화에 나오는 인물은 대체로 건국영웅이나 무속의 대상인 최영 장군 같은 신화적 인물, 역사 속에 나오는 성공한 실존인물이 주인공인 전설적 인물, 호랑이를 타고 신출귀몰했던 민담적 인물 등으로 나뉜다. 당연히 허준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어의가 된 이후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거의 폄훼에 가까운 평가를 내리고 있다. 선조실록 9권 1575년 2월 16일 안광익과 함께 상을 진맥했다는 첫 등장부터, 사후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로 추증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기록이 있지만, 대부분은 승급에 반대하거나 논죄에 관한 내용이다.

유희춘(1513~1577)이 남긴 『미암일기』

유희춘(1513~1577)이 남긴 『미암일기』

36세에 처음으로 실록에 등재되는데, 그 이전의 과정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일부를 엿 볼 수 있다. 선조 대에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을 지낸 유희춘은(1513~1577) 허준이 어의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라도 장성에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과 무인가의 서녀인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허준은 청년시절부터 해남 출신인 유희춘과 교류할 수 있었다. 서자이지만 부유한 가문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고, 외당숙 김안국과 문인(門人) 사이인 유희춘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유희춘은 중종 33년인 1538년 문과에 급제하여 25세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명종 2년인 1547년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무려 19년의 유배생활을 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복직된 1567년부터 그가 타계한 1577년 5월 13일까지 11년간 작성한 기록이 『미암일기』인데, 여기에 허준과의 관계, 내의원에 천거한 배경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유희춘의 부탁으로 1569년 윤6월 이조판서 홍담(1509~1576)이 내의원 천거를 부탁하여 출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종4품의 직급으로 당시 의과 초시와 복시를 1등으로 합격해야 받을 수 있는 직급이 종8품이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대단히 파격적인 발탁인 셈이다.

내의원이 된지 6년 여만인 1575년 2월 16일 수의(首醫) 안광익을 도와 임금을 진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상당히 실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2년이 지난 1587년 12월 9일 2번째 기사는 임금의 치료에 공이 큰 어의 양예수, 안덕수, 허준 등에게 녹피(鹿皮) 1영(令)을 상으로 내린다는 내용인데, 이때 이미 상당한 직위에 오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날 이후 허준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이 승급을 둘러 싼 논쟁과 탄핵이다.

선조실록 24권 1590년 12월 25일 두 번째 기사는 허준이 왕자를 치료한 공로는 있지만,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줌)를 특명했는데 이는 지나치다. 전하께서 한때의 기쁜 마음에 종전에 없던 과한 상전을 내린 것이니 정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명한다.

8일이 지난 다음해 1월 3일 사헌부가 왕자의 치료에 공이 큰 허준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최상의 은전인 벼슬을 높이는 일은 뒷날 폐단을 남길 수 있으니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역시 묵살 당하자 같은 날 사간원이 또 다시 건의했으나, 이번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했다.

3개월여의 논란 끝에 서자 출신의 허준이 당상관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1년 3월 3일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의 전교로 왕자의 치료에 공이 큰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에게는 말 1필을, 부제조 오억령과 조인득에게는 어린말 1필씩을 하사하고 허준은 가자하고, 김응탁, 정예남은 승직시키라는 내용이다. 이어 임금은 공자를 인용하여 자식의 병이 나으면 기쁜 것이 당연하고, 나는 그 기쁨을 말과 작위 승급으로 대신한 것이라며 더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처럼 오랜 동안 반대한 것은, 정3품은 중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직급인 당하관 종3품을 넘어서는 것으로 양반의 입장에서 보면, 신분질서의 파괴였기 때문이었다.

허준은 당상관 통정대부에 오른 1591년 3월 3일 이후부터 군(君)에 봉해진 1604년 6월 25일까지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데, 이 기간 중에 임금의 명으로 동의보감 편찬을 시작했다.

먼 훗날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자 국보 제319-1, 2, 3호 지정된 동의보감이 시작된 것은 허준이 57세이던 1596년이다. 선조는 여러 의서들이 있지만, 어렵고 번잡하여 의약이 없는 시골에서는 많은 사람이 요절하고 좋은 향약(鄕藥)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알기 쉬운 책을 편찬하라고 명했다. 이에 허준을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명의인 정작,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이 참여하여 편찬을 시작했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정유재란으로 의관들이 모두 흩어지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591년 선조는 허준을 불러 의서 500여권을 내어주며 의서편찬을 계속 하도록 했다.

이처럼 임금의 지대한 관심과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허준과 의서편찬에 대한 기록이 실록에 오르지 못한 것은 전란 중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책의 서문은 편찬취지와 과정 등을 상세히 적고 있어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허준의 의술과 동의보감의 가치가 설화가 아닌 사실로 살아서 전해지고 있다.

선조실록 175권 1604년 6월 25일 일곱 번째 기사는 공신책봉에 관한 것으로 임진왜란 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호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전공을 세우거나 군사와 양곡을 내놓은 사람은 선무공신으로 하고, 이를 각각 3등급으로 나우어 작위와 군호를 내린다는 것이다. 허준은 호성공신 2등급을 받은 총 86명 중 한사람으로 충군정량호성공신의 작위와 군(君)에 봉해졌다.

드라마에서는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신체의 원리를 깨달은 해부학의 대가로 소개되지만, 허준의 전공과는 너무 다른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결과물이다. 1604년 7월 2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의 인후증과 실음증(失音證) 치료에 관한 것으로 약방(藥房)이 의관들이 약을 잘 못 처방하여 임금의 쾌차가 늦어졌다고 아뢰자, 임금이 허준은 의서와 약 처방에 능한 의관인데, 무슨 말이냐며 일축했다. 같은 해 9월 23일 네 번째 기사는 임금의 갑작스런 편두통에 침을 맞을 것인지 여부를 판단한 내용인데, 허준은 자신은 침을 놓을 줄 모른다며 침의(針醫)를 부르자고 건의했다. 이로 보아 외과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품계가 높아질수록 견제와 질시가 심해졌다. 1605년 9월 17일 두 번째 기사는 고향에 다녀 온 허준을 파직시키라는 내용이다. 어의는 잠시라도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되는데, 사사로운 일로 고향에 다녀 온 것에 모든 사람이 분개하고 있으니 파직해야 한다는 것. 이에 임금은 공신에 봉해졌는데 소분(掃墳, 경사가 있을 때 조상 묘를 찾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림)은 당연하며, 내가 이미 허락한 일이라며 더 이상 논의하지 말라 명했다. 그 이후로도 거듭되었지만, 선조는 듣지 않았다.

임진왜란 공로로 종1품 숭록대부가 된지 2년여 만에 성공신화의 정점에 오른다. 선조 39년인 1606년 1월 3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의 병이 낫게 된 것은 모든 신하와 백성이 경축할 일이지만, 양평군 허준(위인이 어리석고 미련하였는데 은총을 믿고 교만함-사관이 사초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평가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됨)은 이미 1품인데 보국의 자급으로 대신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조정의 수치라며 반대하는 내용이다. 이날 이후 탄핵과 상소가 거듭되다가 임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허준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명의들이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혼절하거나 병석에 눕는 날이 많아졌고, 그 때마다 허준의 논죄를 요구하는 측과 치료가 먼저라는 측이 팽팽하게 맞섰다. 허준을 둘러싼 조정의 논쟁은 선조 재위 41년인 1608년 2월 1일 승하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광해 즉위년인 1608년 3월 10일 네 번째 기사는 사간원이 허준의 처벌을 요구한 내용이다. 허준은 본디 음흉하고 외람스러운 사람으로 수의로서 망령되이 약을 써 천붕(天崩)의 슬픔을 초치하였으니, 국문하여 법에 따라 정죄(定罪)하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광해는 허준을 사지(死地)에 넣는 것은 정률(正律)이 아닌 것 같다며 불허했다.

거듭된 사간원과 사헌부의 요청에도 광해는 어릴 적 자신을 치료한 공로 등을 들어 삭직(削職)으로 마무리하려 했으나, 결국 귀양을 윤허했다. 의주 유배 중에도 가중 처벌하라는 요청이 계속 되었으나 모두 불허했다.

광해 1년인 1609년 11월 22일 1년 8개월여의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날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의 전교로 허준은 호성공신일 뿐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는 내가 병이 났으나 숙의(宿醫)가 많지 않다. 귀양살이도 1년이 넘었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석방하라 명했다. 대신들의 석방철회 요구가 빗발쳤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의보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의보감』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동의보감』 은 완질을 갖추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했던 허준은 석방된 지 1년, 선조에게 의서편찬을 지시받은 지 14년여 만에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광해실록 32권 1610년 8월 6일 세 번째 기사는 동의보감의 완성을 알리는 임금의 전교이다. 양평군 허준이 선왕의 명을 받들어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고, 유배지를 떠돌면서도 이를 멈추지 않아 책을 완성했다. 선왕께서 명한 것을 내가 계승하여 완성하였으니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말 1필을 내려 공에 보답하고, 내의원은 국(局)을 설치하여 속히 인출(印出)하고 널리 배포하라.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 겪어보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죽어갔다. 1613년 10월 25일 여섯 번째 기사는 예조의 보고이다. 염병이 재앙이 되고 있으며, 올 가을에는 천행반진(天行班疹, 전염성 피부병으로 당혹역이라고도 함)이 번져 백성들이 죽고 있으나 치료법을 몰라 쳐다만 보고 있다. 진실로 측은하니 서둘러 여러 처방을 책으로 출간하게 하소서. 이에 임금은 허준에게 속히 편찬할 것을 명했다. 허준은 즉시 동의보감 출간을 멈추고 새로운 의서편찬에 착수하여 세계 최초의 성홍열 치료서 『벽역신방』과 독자 개발한 급성열병 치료법을 담은 『신찬벽온방』을 출간했다. 이 의서들은 동의보감으로 편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여름 우리는 전염병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경험했다. 메르스 발생 초기에는 혼선을 겪기도 했지만,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지혜를 모아 극복했다.

『동의보감』 에 수록되어 있는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

『동의보감』 에 수록되어 있는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

17세기 초 질병극복의 역사가 우리 몸속에 유전자로 전해져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기록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언제, 어떤 질병이 또 출현할지 모르지만, 어제의 경험과 오늘의 지혜를 모아 대처한다면, 그렇게 두려운 일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