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도로가 막혀 소방차량이 진입을 못해 소방관이 소방호수를 직접 들고 화재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전우용
11월 9일은 소방의 날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부터 정부가 불조심 강조기간을 정하여 매년 11월 1일 유공자 표창과 캠페인 등의 행사를 해오다 지난 1991년 개정한 소방법에 “시·도는 매년 11월 9일을 소방의 날로 정하여 불조심에 관한 기념을 할 수 있다.”고 정하면서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정부가 개정 소방법 이전 기념행사를 가졌던 매년 11월 1일은 대기가 건조해지고 화기사용이 늘어 화재가 빈번해지는 계절이 시작되는 날이어서 이해가 되지만, 왜 하필이면 소방의 날을 9일로 정했을까.
일반적인 추측과 달리, 화재가 발생하기 쉬운 계절이어서가 아니라 전화 서비스에서 유래되었다. 일제강점기이던 1935년 10월 1일 중앙전화국의 전화교환방식을 바꾸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각종 신고전화 10개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전환번호 안내 114와 화재신고 119도 그때 정해졌는데, 정부가 1991년 소방법 제14조에 소방의 날을 신설하면서 11(월)9(일)로 정한 것이다.
불은 인류와 영장류를 구분하는 기준이자, 오늘의 인류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자칫 방심하면 순식간에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가장 위험한 재난이기도 하다. 소방의 필요성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였겠지만, 조선시대만 살펴보면 소방제도가 본격적으로 마련된 것은 세종 때부터이다.
일반적으로 세종 8년인 1426년 설치된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관서로 알고 있으나, 국민안전처 중앙소방본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 보다 34년 앞선 태조 원년인 1392년 무비사(武備司)가 최초이다. 이 관계자는 “우리나라 소방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병조에 무비사(武備司)를 두어 개화(改火), 금화(禁火), 부신(符信, 중요 문서의 전달), 순작(巡綽, 순찰) 등의 업무를 맡게 했으며, 전서 2인, 의랑 2인, 정랑 2인, 좌랑 2인으로 구성하여 화재를 예방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했다.”며 “이로 보아 무비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였으나 화재사고가 많지 않자 유명무실해진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로 실록에도 무비사의 임무에 대한 기록이 있다. 『태종실록』 9권 1405년 3월 1일 두 번째 기사는 예조가 육조의 직무분담을 보고한 내용이다. 병조에는 무선사, 승여사, 무비사를 두는데, 무비사는 무예의 훈련, 지도의 고열(考閱), 성보(城堡), 봉화, 출정, 고첩(告捷, 승전을 알림) 등을 맡으며, 정랑 1명, 좌랑 1명으로 구성한다. 주요 임무가 화재 진압과 예방에서 훈련과 보급. 통신 등으로 전환되었으며, 책임자도 정3품에서 정5품으로 격하된 것이다.
화재의 예방과 진압을 소방(消防)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 32년인 1895년이다. 신설된 경무청 총무국이 수재, 화재, 소방에 관한 사항을 관장토록 한 이때가 첫사용이다. 이전에는 금화(禁火) 또는 멸화(滅火)로 표기했다.
최초의 소방서 무비사는 유명무실해 졌지만, 화재예방의 중요성과 불을 낸 사람에 대한 처벌규정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태종실록』 13권 1407년 4월 20일 첫 번째 기사는 소방도로에 관한 보고이다. 한성부가 4건의 개선사항을 보고했는데, 첫 번째 건의가 큰 길 이외의 여리(閭里, 여염집)의 각 길도 본래는 평평하고 곧아서 차량(車兩)의 출입이 편리하였는데, 무식한 사람들이 자기 주거를 넓히려고 도로까지 침범하여 울타리를 치거나 집을 지었고 심지어는 길을 막아 화재가 두려우니 도로를 다시 넓혀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600여 년 전에도 요즘처럼 소방도로 무단점용이나 불법주차로 골머리를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기록에는 없지만, 조정이 한성부의 건의를 받아 들여 소방도로 개설에 착수한 것으로 보여 진다. 20여년이 지난 세종실록 40권 1428년 4월 24일 세 번째 기사는 소방도로 개설에 관한 내용이다. 찬성(贊成, 종1품) 권진이 “금화도감이 도로개통을 위해 인가를 많이 헐고 있다.”고 보고하자 임금이 “헐지 못하게 하라. 태종 때도 도로를 내는 것이 좋겠다하여 개설하려 했으나 관리들이 이숙번을 두려워하여 그의 집 앞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도로를 낸 적이 있다. 이번 도로개설도 반드시 민원인이 있을 것이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명했다. 한성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소방도로를 개설하긴 했지만, 당시 실세 중에 한사람이던 이숙번의 집이 편입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도로를 내는 바람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처벌규정도 명문화 되었다. 『태종실록』 34권 1417년 11월 10일 첫 번째 기사는 실화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보고한 것이다. 이날 호조가 실화와 방화 구분 없이 자기 집을 태운 자는 볼기 40대, 남의 집을 태운 자는 볼기 50대, 종묘나 궁궐을 연소시킨 자는 사형, 능(陵) 경내에서 실화한 자는 장 80대와 도(徒, 노동형) 2년, 임목을 태운 자는 장 100대와 1천리 밖 유배에 처해야 한다고 보고하자 임금이 그대로 정했다. 이밖에도 화재대상이나 피해규모에 따라 처벌내용을 세분화하고 있는데, 실수로 자기 집을 태운 것도 억울한데 볼기까지 40대를 맞아야 했으니, 중형인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 소방기관인 금화도감이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 최악의 화재사고인 1426년 한성부 대화재 수습대책의 일환이었다. 『세종실록』 31권 2월 15일 세 번째 기사는 이날 화재에 대한 보고이다. 점심때쯤 서북풍이 강하게 부는 가운데 한성부의 남쪽에 사는 인순부의 종 장룡의 집에서 불이나 경시서(京市署, 시전 관리기관) 북쪽의 행랑 106간, 중부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연소되었으며, 남자9명, 여자 23명이 사망했다는 것. 완전히 소사(燒死)하여 형체가 없는 희생자는 제외된 숫자로 실제 사망자는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날에도 잔불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화재가 발생해 인가 200여 호가 연소되었다. 이틀간의 화재로 총 2400여 호가 불탔는데, 이는 한성부 전체가구의 17%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화재가 있던 날 임금은 강무(講武, 임금이 참관하는 군사훈련 겸 수렵대회)를 떠나 강원도 횡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궁궐에 남아 있던 사람 중 최고 윗전이던 중전은 “돈과 식량이 들어 있는 창고는 포기하더라도 종묘와 창덕궁은 온 힘을 다하여 지켜라”명했다. 중전은 이날 저녁 화재진압을 보고 받고 “오늘의 재변은 말로 다할 수 없으나, 종묘를 보전한 건 다행한 일이다.”며 녹사 고상충에게 밤을 달려 임금에게 보고토록 했다. 보고를 받은 임금은 몹시 짜증을 냈다. “이번 강무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경들이 굳이 가자했고, 어제도 바람이 심하고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자고 했으나 경들이 반대해… 이런 재변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이 후회한다. 내일 궁으로 돌아갈 터이니 준비하라” 세종답지 않은 책임전가와 부실한 조치였다.
화재발생 4일 만인 19일 오후 3시쯤 환궁한 임금의 첫 번째 조치는 피해상황 파악과 구제책이었다. 이날 네 번째 기사는 의정부와 병조에 내린 명이다. “의정부는 화재를 당한 집 수와 인구를 조사하고 어린이와 장년을 나누어 구제하여 굶주리거나 곤란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라. 병조는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죽은 소나무를 베어 주어라” 지극히 합당하고 훌륭한 조치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병조에 내린 명에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있다. 왜 하필이면 죽은 소나무를 베어 주라고 했을까. 무분별한 남벌로 소나무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었거나, 일명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는 재선충병이 퍼져 고사한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기록으로만 보면 특별히 소나무가 남획 당했다거나 병충해가 심했다는 내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로 보아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세종이 과학적 업적이 가장 큰 임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가장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학적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목재 중에 하나지만, 건조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생나무를 사용하면 얼마 못가 뒤틀리고 갈라져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병력을 동원해서 라도 이미 잘 건조된 죽은 소나무를 하사하여 복구기간을 단축하고, 소나무도 보호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추정해 볼만한 근거나 기록은 없지만, 백성을 지극히 아끼고 보살폈던 세종의 평소 성품과 과학적 사고로 보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화재 이전에도 세종 5년 의무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방기구와 화재 발생 시 업무분장, 대응절차 등을 상세히 정한 금화조건(禁火條件)을 제정하는 등 다양한 정책이 있었는데, 전담기구의 설치와 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2월 26일이다. 이날 다섯 번째 기사는 이조가 금화도감 설치를 보고한 내용이다. 도성 안에 금화를 전장(專掌)한 기관이 없어 지각없는 무리들이 화재를 발생시켜 백성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생명을 위협하여 애석하다. 제조 7명, 사(使)가 5명, 부사와 판관 각 6명으로 구성된 금화도감을 상설기관으로 설치하여 순찰 등 화재예방업무를 담당하게 하자고 건의해 임금이 이를 수용했다.
금화도감 설치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수습대책과 제도개선이 이루어 졌다. 3월 3일 세 번째 기사는 금화도감이 소방관의 신분증 발급을 건의한 내용이다. 야간 통행금지 시간에 불이 나 소방관이 출동하다 순찰 중인 포졸에 검거되어 구류되면 안 되니 신패(信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례가 있어 건의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임금이 직접 챙길 사안은 아닌 것 같다. 같은 해 6월 16일 수해(水害) 관련업무가 추가된데 이어, 19일에는 성곽의 유지·관리, 2년여가 지난 1428년 4월에는 소방도로 개설까지 추가되었다.
출범 3년만인 1429년 3월 6일에는 책임자가 처벌을 받는 위기도 있었다. 이날 다섯 번째 기사는 임금이 형조에 내린 명이다. 금화도감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화재를 방비하기 위함이거늘, 이제 화재가 이와 같으니, 이는 반드시 방화의 제구가 미진한 까닭이다. 책임 관리를 국문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다. 당시 실록에는 큰 화재기록이 없었고, “이제 화재가 이와 같으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단일사고 보다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화재사고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해석된다. 금화도감 설치와 각종 제도의 정비 이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끊이지 않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요즘도 한식날은 성묘객들이 버린 담뱃불로 곳곳에서 산불이 발생해 큰 피해를 입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실록』 51권 1431년 3월 27일 첫 번째 기사는 상정소(詳定所, 법규 제정이나 정책수립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 보고이다. 한식날부터 3일 간은 아침 일찍 밥을 짓고 그 외의 시간에는 불을 사용하지 말도록 전교하였으나, 이는 선량한 백성들을 범법자로 만들 수 있다. 실화(失火)는 따로 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화기사용 금지를 법으로 정한다고 백성들이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 법은 전과자를 양산할 뿐이니, 법으로 정하기보다 금화도감이 순찰을 강화하여 화기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근무 중이던 위장이 금화순찰 별감을 폭행해 임금이 발끈한 사건도 있었다. 『광해군일기』 147권 1619년 12월 18일 네 번째 기사에 의하면 날이 추울 때는 대전장무내관이 별감을 거느리고 금화순찰을 하는데, 어제 저녁도 춥고 바람이 거세 화재가 발생하기 쉽다고 판단해 내관이 금화순찰을 지시했다. 명을 받은 별감이 순찰 중 위험요소를 발견하면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데, 동소위장(東所衛將) 이유서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별감을 잡아들이고 빰까지 때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임금은 이유서를 당장 체직한 뒤 추고하고 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
조선시대 소방제도와 기구는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었다. 화재가 빈번하지 않을 때는 성곽보수공사나 하천정비 같은 막일에 동원되고, 번번히 정원과 예산이 깎이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아무리 소방제도나 기술이 발전해도 인류가 불을 사용하는 한 화재사고를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는 없지만, 현격히 줄일 수는 있다. 국민 각자가 조심하여 화재 없는 따듯하고 행복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