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지옥의 격전지 장진, 오죽하면 삼수갑산이라 했으랴
「조선왕조실록」 - 윤선도, 허난설헌 오빠 허봉 거쳐간 최악의 유배지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지난달 28일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첫 공식일정은 버지니아주 콴티코 국립해병대박물관에 있는 장진호전투기념비에 헌화하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장진호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라며, 참전 노병들에게 허리 숙여 위로와 감사를 표했다.
흥남철수는 한국전쟁 중 있었던 인도주의 작전의 위대한 승리로서, 문 대통령 부모의 북한 탈출과 영화 「국제시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장진호전투는 국민들에게 생소한 잊혀진 전투 중 하나였는데, 문 대통령은 왜 첫 공식일정으로 이 기념비를 택했을까.
장진호전투 기념비
이 전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장진호(長津湖,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중남·서한면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 일대에서 당시 북한의 임시수도이던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진격했던 미국 제1해병사단이 겹겹이 둘러싼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의 포위를 뚫기 위해 벌인 필사적인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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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작전 : 전차상륙함에 승선 중인 피난민들 [출처: 미 국립기록관리청]
장진호전투는 아군 병력의 9배가 넘는 12만 명의 중공군과 대적하여 성공적으로 후퇴한 위대한 승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군사(軍史)상 진주만 피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는 상반된 평가도 뒤따른다. 전자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혀 중공군의 남하를 2주간이나 지연시켰으며, 이로 인해 흥남철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후자는 이 과정에서 2,500여 명의 전사자와 219명의 실종자, 수천 명의 부상자를 냈기 때문이다. 1950년 타임지가 표지에 「가장 참혹한 전투」로 소개했을 만큼,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도 있었지만,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때문이었는데, 이 일대의 살인적인 추위는 조선시대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또는 죽기를 각오하고 할 말은 하겠다는 의미로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갈지언정 …’이라는 표현을 흔히 쓰는데, 바로 이 일대의 극한(極寒)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형벌 중 유형(流刑)은 종친이나 신료들에게 내리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가 정해졌다. 대체로 종친들이 가는 강화도부터 최고형인 3천리 유배까지 있는데, 제주도와 추자도, 삼수, 갑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 중에서도 장진의 옛 지명인 삼수와 갑산은 워낙 산세가 험하고 혹한이어서 많은 신료들이 동사하거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가장 두려워하는 유배지였다.
개마고원에 위치한 장진군은 장진강과 부전강이 가로지르고 있어 험준한 산악지대이면서도 수량이 풍부하고 비옥했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땅은 매우 기름지나 기후가 몹시 춥고, 356호 891명의 백성이 산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진호전투가 있었던 이곳은 태종 13년인 1413년 갑주에서 갑산군(甲山郡)으로, 1461년 삼수만호가 관할하던 지역을 독립시켜 삼수군(三水郡)으로, 1897년 삼수군 남부지역을 떼어내어 지금의 장진군이 되었다. 연 평균 기온이 2.5도, 1월 평균기온이 영하 20도로 중강진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삼수갑산에서 유배생활을 한 무수히 많은 신료들 중 비교적 많이 알려진 인물로는 본인보다 형제들의 유명세를 톡톡히 보았던 허봉과 인생의 절반을 유배와 은거로 보낸 고산 윤선도가 있다.
허봉은 젊은 나이에 유배되어 후대까지 길이 회자될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허난설헌과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그의 친동생이다. 6형제 중 둘째이던 그는 난설헌과 10살 터울로 여동생에게 한문과 시를 가르친 당시로서는 선각자이자 스승이었다. 그렇다 보니 오빠에 대한 정이 남달랐을 시인은 갑산으로 유배를 떠나는 오빠에 대한 심경을 한시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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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고원 길에 행색이 바쁘겠네
쫓겨가는 신하야 가태부 같다지만
임금이야 어찌 초회왕일까
가을하늘 아래 강물은 잔잔하고
변방의 구름은 석양에 물들겠지
서릿바람에 기러기 울고 갈제
걸음을 멈추고 차마 가지 못하리遠謫甲山客 咸原行色忙 臣同賈太傅 主豈楚懷王 河水平秋岸 關雲欲夕陽 霜風吹雁去 中斷不成行
귀양 가는 나그네가 바로 시인의 둘째 오빠인 허봉인데, 그는 21살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과 교리를 거쳐 창원부사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는 명문가 출신인데다, 타고난 문학적 소양과 적극적인 성격까지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였다. 급제 2년여 만인 1574년 명나라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왔는데, 셀프 추천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조사와 사행 길에 작성한 견문록을 바탕으로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저술했다.
허봉은 동생들(허균과 난설헌) 못지않은 문학적 재능이 있어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이 기행문과 여러 편의 시, 저서인 「하곡집」과 「하곡수어」, 편서인 「해동야언」, 「이산잡술」 등을 남겼다.
창원부사로 재임 중이던 1583년 허봉은 동인의 선봉장 중 한 사람으로 서인인 병조판서 이이(李珥) 탄핵에 동조했다가, 살아서는 돌아오기 어렵다는 삼수갑산에 유배되었다. 선조 16년이던 이 해 7월 16일 첫 번째 기사가 대사간 송응개가 이이를 탄핵한 상소이다. 성혼의 상소를 보니 신과 허봉을 지척(指斥, 지탄)했던데, 이는 파벌을 조장하려는 것으로 죽을지언정, 한마디 해야겠다. 이이는 원래 승려로서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는 인륜의 죄를 지었으며, 근래에 있었던 여러 일의 뒤에는 그의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이는 이미 그들이 대적할 상대가 아니었다. 상소를 들은 임금은 잠시도 지체 없이 명했다. “네 말이 설사 다 옳다고 해도 이제 와서야 말한 것은 불충이다. 본직을 체차(교체)하라.”
동인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달여가 지난 8월 28일 첫 번째 기사는 동인들을 귀양 보낸다는 내용이다. 임금이 정2품 이상 신료들을 선정전으로 불러 하교했다. “박근원, 송응개, 허봉 세 사람의 간특함은 내가 안다. 이들을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은 어떤가.” 이들은 모두 동인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서인들이 적극 구명에 나섰다. 이로써 동서분쟁이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정철(鄭澈)이 강력 처벌을 주장했고, 임금이 이를 전격 수용했다. “송응개는 회령, 박근원은 강계, 허봉은 종성에 유배하라.”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일격으로 동인들은 손도 써보지 못한 채 당여들을 잃었는데, 허봉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듣자하니 종성은 지금 적의 침입으로 어수선하다니 허봉은 갑산으로 보내라.”
이때가 그의 나이 33세로 2년여의 유배를 마치고 풀려나 전국을 방랑하던 중 금강산에 들렀다가 1588년 9월 16일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신료가 죽으면, 그에 대한 인물평과 업적 등을 졸기로 남기는데, 허봉의 졸기는 ‘전 부사 허봉이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금화역에서 죽었다.’라는 단 한 줄뿐이다. 갑산 유배의 후유증이 사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몇몇 기록은 과도한 음주 때문이라는데, 무게가 실리게 한다.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지는 고산 윤선도도 삼수갑산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8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시절에는 각종 시험에서 1등을 도맡아 하던 수재였으나, 사회생활은 성적순이 아니어서 인생의 절반을 유배와 은거로 보내야 했다.
첫 유배는 관직에도 오르기 전인 1616년이다. 광해군 8년 12월 21일 두 번째 기사는 진사 윤선도의 상소문이다. “예조판서 이이첨이 벼슬아치들을 끌어 모으고, 과거로써 유생들을 거두어들여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세상이 모두 그에게 쏠려들고 있습니다. 신의 아비가 오열로 만류하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이 상소를 올립니다.” 그의 비장한 결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임금의 처결은 간단명료했다. “윤선도를 외딴 섬에 유배하고, 그의 아비 윤유기는 관작을 삭탈하여 시골로 보내라” 실록은 그나마 윤유기가 서인이어서 같은 당여인 이이첨이 선처를 부탁하여 그 정도에 그쳤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후 유배와 은거, 복권을 거듭하던 윤선도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낙향하여 또 다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42세이던 1628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것을 계기로 대군들의 스승이 되었는데, 훗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과 이 때 인연을 맺었다. 임금이 된 제자는 재위 3년인 1652년 보길도에 있던 스승을 불러올려 예조참의에 제수했고, 71세이던 1657년 동부승지를 주었으나, 그의 관운은 여기까지였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서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몰아붙였다. 현종 즉위년 7월 7일 두 번째 기사는 대사간 이정기 등이 윤선도의 처벌을 요청한 것인데, 그를 삼수갑산으로 보내는 신호탄이었다. “인산(因山, 상왕의 장례식)을 정하지 못해 성상의 마음이 아프시고 신료들도 분주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윤선도는 병을 핑계로 산에도 오지 않고, 종을 시켜 서신이나 보내는 오만방자한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당장 추포하여 국문해야 하옵니다.” 이를 계기로 촉발된 남인과 서인의 지루한 당쟁은 다음해 4월 30일 윤선도를 삼수에 유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661년 4월 10일 첫 번째 기사는 우참찬 송준길의 건의인데, 삼수가 얼마나 험한 유배지인지 엿볼 수 있다. “성상께서 일단 목숨만은 살려 주셨지만, 삼수는 죽게 마련인 지역입니다. 게다가 그의 나이 80이 다 되어 갑니다. 그를 꼭 그곳에서 죽게 해야겠습니까.”
그러나 이 때문에 형벌이 오히려 추가되었다. 같은 해 6월 13일 세 번째 기사가 이를 논의한 것이다. “사형에 처할 것을 감해 주었더니… 삼수보다 더 나쁜 곳이 없다하니, 그 자리서 위리안치(가시울타리를 높이 막아 외부출입을 금지시키는 가택연금)하라.” 남인들은 절대 열세였음에도 구명운동을 거듭해 1665년 고향 근처인 전남 광양으로, 2년 후에는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게 했다.
유배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수없이 많은 신료들이 자신의 철학과 믿음을 위해, 또는 당쟁이나 모함으로 삼수갑산을 다녀갔다.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상대의 주장은 귀담아 들어 줄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이다. 이제 쓴 소리를 했다고 삼수갑산을 가는 일은 조선시대나 있었던 옛 이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