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그 이후 그들의 운명은…
「조선왕조실록」 - 서날쇠는 종2품, 정명수는 전횡 휘두른 국정농단의 원조
고립무원의 산성에 갇혀 조선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던 47일간의 역사를 그린 영화 「남한산성」이 지난 3일 개봉했다. 역대 최고의 오프닝 관객을 기록한 이 영화는 김훈의 동명(同名)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병자호란을 맞아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1636년 음력 12월 14일(이하 음력)부터 다음해 1월 30일까지 굴욕의 역사를 객관적 시각으로 그려냈다.
요즘의 국제정세와 너무도 비슷해 개봉 이전부터 관심을 모았던 이 영화는 유명정치인들이 제각각 관람평을 내놓아 유명세를 더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같은 기간 개봉한 범죄액션영화 「범죄도시」에 1위를 내주며, 손익분기점(누적관객수 500만 명)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왜 관객들은 역대급이라던 이 영화에서 발길을 돌렸을까. 주제와 구성이 주는 답답함과 분노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한마디로 어둡고 무겁다. 지배계층이 자초한 이 굴욕의 역사를 너무도 담담하게 그려내어, 오늘날의 서날쇠인 우리가 어느 대목에서 분통을 터뜨려야 할지, 무엇에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게 한다. 영화 내내 전쟁과 평화가 대립하지만, 선과 악의 이분법적 시각이 아니라, 당시대를 산 여러 계층의 다면적 묘사를 통해 모든 것을 관객의 몫으로 넘기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원작소설을 쓴 김훈 작가는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전쟁이 끝나 일상으로 돌아온 서날쇠가 연 날리러 가는 나루에게 했던 ‘너무 멀리 나가지 마라.’를 제목으로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마지막 장면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과연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까. 이는 영화적 상상이거나 바람이었을 뿐, 실제 역사에서는 아무도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김상헌(1570~1652)은 영화에서처럼 자살하지 않고 경기도 양주로 낙향했다. 당시 그의 나이 66세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은둔하던 중 3년 후 척화의 책임을 지고 심양에 압송되어 옥고를 겪었다. 귀국 후에도 좌의정을 제수하며 조정에 돌아올 것을 권했지만, 모두 뿌리치고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 받으며 82세까지 장수했다. 화친을 이끈 최명길(1586~1646)은 정국을 주도하며 승승장구했으나, 명과의 관계가 드러나 6년 후 심양에 소환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영의정을 지내다 김상헌보다 6년 빠른 1646년 61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작 대척점의 끝에 섰던 두 사람은 심양의 옥중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했지만, 당대의 지배층은 최명길을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실록에 기록된 두 인물에 대한 평은 당시의 가치기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조실록 1647년 5월 17일 두 번째 기사가 최명길의 졸기(卒記, 고인에 대한 인물평)인데, 김상헌의 그것에 비해 내용과 분량 면에서 초라하기 그지없다. “완성부원군 최명길이 졸(卒)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능하다. 광해 때는 버림받았다가 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정사원훈에 녹훈되었다. 화의론을 주장하여 청의(淸議, 고결하고 공정한 여론)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 변란 때 척화를 주장한 대신들을 협박하였고, 환도 후에는 그릇된 사람을 등용했다.” 효종실록 1652년 6월 25일 첫 번째 기사는 김상헌의 졸기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이 양주의 석실 별장에서 졸하였다. 상헌의 자는 숙도이고 호는 청음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남달리 주관이 뚜렷하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김류가 일찍이 말하기를, 숙도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흐른다 하였다. 그는 충절의 대명사였고, 가문은 교목세가(喬木世家,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집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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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묘소
그럼 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 백성대표 서날쇠는 어떻게 되었을까. 날쇠 역시 실존인물로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에서 천민으로 태어난 서흔남(徐欣男, ?~1667)이 모델이다. 영화에서는 유지(諭旨,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를 전달하는데 실패하지만, 실제로는 전달했으며, 귀환할 때는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 전라감사 이시방의 장계까지 가지고 왔다. 여러 문헌에는 강원감사 조정호가 이끄는 1,000여 명은 1636년 12월 27일,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8,000여 명은 다음해 1월 3일 각각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록 1637년 1월 7일 두 번째 기사가 전령 모집에 응했던 서흔남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다는 내용인 것으로 보아 물리적 시간으로는 서흔남이 전한 유지를 받들어 출병했을 개연성이 높다.
사노 출신인 서흔남은 이 공로로 면천과 함께 출사하여 훈련주부, 가의대부와 종2품 당상관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실록에는 직첩을 내린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훗날 숙종이 후손들에게 음서를 준 것으로 나타난다. 51년이 지난 1688년 2월 29일 숙종이 남한산성을 방문했다. 이날 저녁 무렵 서장대에 올랐는데, 김수홍이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운 서흔남을 포상해야 한다고 아뢰자, 그 자손들까지 수용할 것을 명했다. 142년이 지난 1779년 8월 7일에는 정조가 이곳을 찾았다. 수어사 서명응이 현황을 보고하던 중 상이 물었다. “이 고을이 배출한 인물로는 누가 있는가?” “예, 병자란 때만 보아도 서흔남이 있습니다. 사노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 겹으로 에워싼 적을 뚫고 나가 삼남의 여러 도에 명을 전했습니다.”
영화 「명량」에 왜적보다 더 미운 배설이 있다면, 「남한산성」에는 역관 정명수가 있다. 용골대를 등에 업고 그가 저지른 전횡은 국정농단의 원조격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인조실록에만 180여 건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사람을 죽이거나 뇌물수수, 협박, 인사청탁 등이다.
실록에 나오는 첫 기록은 1633년 10월 22일로 이때는 정묘호란 6년 후로 이미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역관 정명수가 평산현을 침범하여 현감을 욕보이고 약탈했다. 그가 은산현 하인으로 있을 때 당시 현감이던 홍집(현 평산현감)이 곤장을 쳤는데, 이에 대한 앙갚음이라는 것. 그러나 임금은 “용골대와 함께 왔는데, 어떻게 처벌하느냐”며 참으라고 명했다.
병자호란 후에는 그의 위세가 더욱 높아져 하늘을 찔렀다. 실록 1637년 2월 3일 두 번째 기사는 용골대의 통역으로 대궐에 들어온 정명수에 대한 설명이다. 평안도 은산의 천민으로 젊어서 적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성질이 교활하여 본국의 사정을 고해 바쳐 청의 신임을 얻고 있다. 같은 해 11월 8일에는 정명수가 자신이 지나는 고을마다 방기(房妓, 중국 사신을 수청 드는 기생)를 요구해 기생들이 죽음으로 이에 맞서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임금은 외면했다.
1639년 5월 1일 기사는 정명수의 횡포를 청나라 조정에 고변한 시강원 필선 정뇌경과 서리 강효원을 목 졸라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심양에 인질로 잡혀있던 세자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구명에 나섰으나, 마당에 지켜 서있던 정명수와 또 다른 역관 김돌시가 눈을 부라리며 세자를 막아선 사이 하수인이 두 신하의 목을 졸랐다. 1648년 3월 28일 기사는 북경에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하는 경기도 연천의 15세 어린아이를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온갖 협박과 위세로 재물이나 관직을 빼앗고, 친인척은 사돈까지 찾아내어 벼슬을 주었다. 1639년 7월 1일 기사는 셀프 인사명령이다. 자신은 동지중추부사로, 역관 김돌시의 사촌동생 김산해를 수문장으로 임명하되, 자신은 병자호란 이전인 1628년으로 소급 임명한다. 같은 해 8월 6일 기사는 정명수의 요청으로 정주(定州)의 관노인 처남 봉영운을 그 고을의 수령으로 제수했는데, 겁을 먹은 봉영운이 줄행랑을 쳤다는 내용이다. 그 이후 생모는 정부인, 자신은 수시승진, 양아들 정선은 사도시 주부, 성이 다른 사촌동생 장계우는 묘소를 돌보도록 안주(安州) 첨사, 동생의 사위 김전은 의주 방산만호, 처음 벼슬을 사양했던 처남은 영원군수, 성이 다른 조카 이옥련은 23세에 당상관을 시켰다.
김상헌도 정명수를 비켜갈 수 없었다. 1643년 1월 14일 정명수의 큰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김상헌의 두 팔이 노끈으로 묶여 있었으며, 목에는 철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에 앞서 1639년 12월 2일에는 병조좌랑 변호길이 백주대로에서 정명수에게 큰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순찰 중이던 변호길이 그의 첩을 단속했는데, 이를 전해 듣고 달려온 정명수가 동료 역관 변란과 다짜고짜 집단 폭행을 한 것.
병조참판 겸 남한산성 수어사였던 이시백은 종전 후에도 여전히 충직했고, 최명길과 함께 조정을 주도하며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인조의 신임으로 복권되어 일곱 번 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다만 영화와 다른 것은 그는 문신이었다.
같은 시간, 죽음으로 내몰린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임금보다 한발 앞서 강화도로 피신한 소현세자비와 원자, 봉림대군, 원임대신 김상용, 강화도 수비책임자 검찰사 김경징 등이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기 직전 소현세자비와 원자, 봉림대군 일행은 탈출에 성공하여 남한산성에 합류했다. 이때 그곳에 있던 많은 신료와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다. 척화파의 영수 김상헌의 친형이자 원임대신이던 김상용은 남아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뒤 손자와 함께 투신해 순절했으며, 부장(副將)이던 김익겸과 권순창도 화약 불에 뛰어 들었다. 이때 김익겸에게 유복자가 있었는데, 훗날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이다.
생존자는 그들대로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영의정 김류의 아들로 수비책임자였던 김경징은 적을 눈앞에 두고도 음주가무로 일관하다 함락을 자초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아내, 며느리를 자결하게 하고 자신은 탈출하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성리학의 대가였던 윤선거는 강화도가 함락되면 김익겸, 권순창과 자결하기로 결의했으나, 이를 저버리고 진원군의 종으로 변장해 살아남은 후, 평생을 자책해야 했다. 이 일을 두고 절친했던 송시열이 사후에까지 비난하면서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윤선거의 아들 증을 따르는 소론으로 분파되었다.
이 영화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다. 또한 관객에게 답을 요구하지도, 답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끝까지 냉철함을 잊지 않고, 담담하게 당시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지금의 잣대로 사대주의와 성리학이 지배하던 그 시대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병자호란과 우리나라를 둘러싼 요즘의 국제정세가 너무 비슷하다는 걱정이 많다. 그러나 존립과 파멸의 선택지만 놓고 본다면,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다. 최명길과 인조의 선택은 요즘 가치기준으로 보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400여년이 지났다. 이제는 실리와 명분, 화친과 항전, 그 어느 것도 국민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