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조선 국가는 극히‘작은 정부’를 유지함으로써 (인구와 토지 등) 주요 정책정보 수집 능력조차 취약한 상태였다. 조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의 발전 지향성이 극히 부족했다. 그런가 하면 봉건적 가치관에 의해 시민사회의 발전은 크게 억제되었다.
19세기 말에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1896), 광무개혁(1897-1904)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개혁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패를 가져온 원인 가운데에는 우선 일반 대중의 참여 없이 개혁 관료들에 의해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방적으로 추진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집권엘리트 내부에서도 군주와 관료 간의 지배연합 형성에 실패했다. 일반시민의 참여가 부족한 가운데 소수 개혁관료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시도가 이루어진데다 당시 시대의 흐름은 인식했으나 외세에 의존하려는 집권엘리트들이나 반제국주의 시각에서 외세에 맞서고자 했던 위정척사파 모두가 일정한 한계를 지닌 채 입장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한국에서 개혁의 추진 주체들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했고, 점차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결국 식민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일제 식민지 국가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관료제를 형성했다. 우선, 조선 총독에게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근대관료제의 구축이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관료제의 규모가 주로 일본인 위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일제 식민지 국가는 국가주도의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징세의 효율성을 확보 했으며, 철도, 통신, 아편, 소금, 담배 등 기간산업을 국가가 직접 운영했다. 국가와 산업(자본)간의 연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농업 인프라의 구축을 통한 쌀 증대정책을 추진했다. 한편 총독부 직속의 조선식산은행을 통한 통화정책을 추진했으며, 재정구조를 엄격히 통제하여 ‘선택과 집중’의 정책을 실시했다. 이와 같은 산업화 정책은 모두 일제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통제 및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위한 국가주도의 산업화이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적인 역사가 전개되었으며, 새로운 국가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흔히 나타나는 사회적 혼란기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3년간의 미군정(1945~1948)을 거치면서 일제 식민지 국가의 과대성장(overdeveloped)된 국가기구를 거의 그대로 승계 유지되었으며, 다원적이고 분권적인 시민연합(civil association)의 특성을 지닌 국가 행정의 제도화는 시도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혁신과 분권(2007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