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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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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배경

미·소 군정과 남·북한 분단

미·소 군정의 실시
(사진)소련이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내세워 수립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소속위원들 모습(1946), CET0042599(1-1)

소련이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내세워 수립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소속위원들 모습(1946), CET00425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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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북한지역에서 진주를 완료하자, 경의선, 경원선을 비롯한 주요 남행 간선철도를 모두 폐쇄하여 38도선 이남지역으로의 교통 통신을 제한 내지는 봉쇄한 다음, 북한 전역의 공산화를 위한 제도개혁에 착수하였다. 1945년 10월 14일에는 김일성을 등장시키고, 이듬해 2월 8일에는 이른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반하여 미국은 38도선을 설정하여 소련군의 남진한계선을 정하기는 했으나, 당시 미군의 진주가 늦어짐에 따라 과도기적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뒤늦게, 9월 4일에야 하지(John R. Hodge) 중장 휘하의 미 제24군단 선견부대가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9월 7일에는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남한에 대한 군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정책준비 없이 출범한 미군정은 시초부터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렇듯 국토분단과 미·소의 상반된 점령정책으로 남북 간의 이질현상이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26)가 개최되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문제와 함께 일찍이 카이로선언 때 이미 미·영 양국 수뇌들간에 거론되었던 한국의 신탁통치협정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남한에 전파되자, 이를 반대하는 범국민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문서)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1945), 194509074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1945), 194509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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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탁통치 반대 시위모습(1945), CER0000159(1-1)

신탁통치 반대 시위모습(1945), CER0000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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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한국민들의 신탁통치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협정에 의거하여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그 첫 회의(1946.3.20)와 두 번째의 회의(1947.5.21)를 서울에서 개최하였으나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남·북한 정부의 수립
(사진)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전경(1948), CER0000173(1-1)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전경(1948), CER000017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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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당사국간에서는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제기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개최된 유엔총회에서는, 소련을 위시한 공산 진영 회원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를 규정한 미국의 제안이 절대다수로 채택되었다. 이것이 한국문제에 관한 유엔의 '통한결의(統韓決議)'였다.

이와 같은 유엔의 통한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으나, 북한은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유엔 한국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마저도 거부하였다. 이리하여 1948년 5월 31일 남한에서는 제헌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공포된 데 이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한편 소련은 유엔총회의 결의와 감시 하에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1948년 9월 9일 평양에서 이른바 김일성 체제 하의 북한정권을 수립하여 그들의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유엔 총회의 결정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미·소 양대 세력이 상충하는 양극화된 국제 분쟁지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