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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 1950년대 문화영화
  • 1960년대 문화영화
  • 1950년대 문화영화의 특징
  • 1950년대 주요 문화영화 해설

1950년대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 ① USIS : 리버티 프로덕션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많은 영화인들이 광복 후 뉴스영화나 문화영화의 제작에 참여했지만 정부수립 이전까지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는 미군정청 영화과와 미공보원이었다. 광복 후 1945~1946년에는 미군정 영화과가, 1947년부터는 주한 미군사령부 공보원(Office of Civil Information, OCI)이 문화영화 제작을 담당하였다. 미군사령부 공보원(OCI)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미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으로 승계되었다. 한국전쟁 후 변변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미공보원(USIS)은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할 때 모든 설비와 인력을 끌고 진해를 거쳐 상남(당시 창원군 상남면)으로 옮겨갔다. 미공보원(USIS)의 리버티 프로덕션은 우수한 장비와 기술을 바탕으로 신진 영화인력을 끌어들여 훈련시킬 수 있었다. 미공보원(USIS)과 원조기구 등은 낙후되어 있던 한국영화 기술과 인력의 수준을 끌어올려 자신들이 원하는 뉴스영화, 문화영화를 제작하는데 유리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미공보원(USIS)의 첨단 영화기술 교육,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영화과의 한국영화인 교육훈련 프로젝트, 미국국제협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 한국영화전문가 교육프로젝트 등은 이러한 시스템 구축의 일환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미공보원(USIS)는 교육받은 한국 영화인력들을 인정하기 시작하여 이전 문화영화에는 없던 제작 크래디트 명기를 허용했고, 이로써 영화인들은 단지 주문을 받아 영화를 생산하는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영화예술인으로서의 긍지와 정체성을 높일 수 있었다. 리버티 프로덕션의 영화인들은 1960년대에 국립영화제작소의 중심 인력이 되었으며, 리버티 프로덕션이 존속하는 동안 국립영화제작소 영화인들과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다. 또한 일부 인력은 상업영화로 영역을 넓혀나가기도 했다.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 ② 관·군 조직

한국전쟁은 군이 직접 영화제작의 주체가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군은 전쟁 기간 동안에 직접 검열을 실시하였으며, 영화를 통한 심리전에 힘썼다. 전시 하의 국방부 정훈국, 공군 정훈감실 촬영대, 해군 촬영대 등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활약했던 영화인들이 1950년대까지 활동을 이어가는 데에 가교 역할을 하였다. 군 뿐만 아니라 지역 단위의 행정조직이나 경찰 등의 관조직에서도 영화를 직접 제작하거나 민간영화사에 제작 지원 및 후원을 하여 자신들이 필요한 영화를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관이나 군은 문화영화의 경우는 대부분 직접 제작을 하고, 극영화인 경우에는 제작 지원이나 후원을 했다. 그런데 1955년부터는 관이나 군의 영화제작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1955년 정부는 공보처와 국방부 등에서 관여하던 일반 상업영화의 주무부처를 문교부로 이관시키고, 1956년부터는 공보처를 공보실로 격상하여 문화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하는 등 영화제작 관리와 검열 등 제도를 정비하고 문화영화의 생산계통을 일원화하였던 것이다.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 ③ 공보실(처) 영화과 : 대한영화사

1948년 11월, 공보처 내에 공보국 영화과가 설치되어 한국 정부의 문화영화 생산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1949년 국무총리령으로 공보처 내에 설치된 대한영화사는 공보처 영화과가 관할하는 사단법인으로서 이사장, 부이사장, 9인의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를 두었다. 이사장은 공보처장이, 부이사장은 공보처차장이 겸직하였으며, 이사는 공보처와 관계부처의 고급 공무원 및 영화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있는 자 중에서 이사장이 위촉하였다. 영화과에서 영화의 기획과 촬영을 마치면, 그 이외의 제작과정은 대한영화사에서 맡았다. 1956년 공보처가 공보실로 개편되면서 공보 기능이 강화되었다. 원래 국무총리 직속기관으로 다른 부처에 비해 권한이 적었던 공보처가 대통령 직속 기관인 공보실로 한 단계 승격된 것이다. 영화과는 공보실의 선전국 산하로 이관되어 월 1편의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영화과 이외에 공공 기관이나 정부 조직, 군조직, 경찰 등에서도 간헐적으로 문화영화를 만들었지만, 이 시기 이후로는 영화과와 대한영화사가 명실공히 대한민국 문화영화의 메카가 되었다. 이때부터 정부 보유불(保有弗) 또는 외국 원조에 의한 기재 도입이 시작되어 제작 능력이 크게 향상되기 시작했으며, 1956~1958년까지 영화과의 문화영화 제작편수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58~1959년경에는 경제부흥 프로젝트의 하나로 부흥부에서 영화과로 100~200만불씩 교육영화 기금이 들어와 대한영화사 직원이 80여명에 달하였다. 대한영화사는 미국국제협조처(ICA) 원조로 들어온 대충자금(counterpart fund) 1억 5천 7백만환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원조 3만5천불을 들여 ‘동양 제일의 설비’라고 칭해진 새로운 스튜디오도 가지게 되었다. 대충자금이란 미국의 대외원조 물자로 인해 국내에서 발생한 수익을 한국 정부가 특별 계정에 적립한 자금을 말하는데, 대한영화사 시설 확충 뿐만 아니라 문화영화 제작비까지 대충자금에서 충당되는 경우가 많았다. 1959년 미국국제협조처(ICA)는 주한미경제협조처(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USOM)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주한미경제협조처(USOM) 자금을 기반으로 한 인력교환 프로그램인 시라큐스 콘트랙트(Syracuse Contract)에 의해 우리 영화 인력들이 인디아나 대학에 유학하였고, 미국에서도 감독, 스텝 등 7명의 기술자가 나와 대한영화사의 영화인력에게 기술을 전수하였다. 이로써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던 감독들이 줄어들고 영화과에서 연출 경험을 쌓은 문화영화 전문 감독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이후 극영화, 나아가 상업영화에까지 도전한 혈기왕성한 젊은 영화인들이었다. 문화영화계에 기술적, 인적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1950년대 문화영화제작과 상영

문화영화 제작 과정

그렇다면 문화영화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기획되고 제작되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다른 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대한영화사에 소속되었거나 관계된 감독들이 문화영화의 제작계획안을 기안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감독이 기안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최초의 제안자가 감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영화과장이 기획회의를 소집하여 아이디어를 모으고 어떤 아이템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한 후에 이를 다시 최초의 아이디어 제안자나 아이템을 가장 잘 구현할 감독에게 제작계획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영화과의 영화과장은 총괄 프로듀서(=제작자) 역할을 했으며, 다른 부서의 과장급과 비교했을 때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대체로 기안에는 제작계획안과 구성안, 그리고 제작명세서가 첨부되었는데 영화과장을 거쳐 선전국장의 전결로 통과가 되면 재무관이나 총무과장과 경리의 확인을 거쳐 집행되는 수순을 밟았다. 경우에 따라 촬영계획표도 첨부되어 있었는데, 촬영을 마치면 해설원고를 작성하는 품의를 다시 올려 결재를 받아 집행하였다. 영문판의 경우에는 영어 해설(나레이션)이 들어가거나 경우에 따라 한글 자막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다른 하나는 영화과 외부에서 기획되어 영화과에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미경제조정관실(Office of Economic Coordinator, OEC)이나 주한미경제협조처(USOM)의 요청에 의해 제작되는 경우이다. 이러한 제작의뢰는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이 공보 기술의 핵심인 영화 기술과 영화 인력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국정부와 합의한 ‘공보기술 개선 사업계획(Improvement of Technical Information Services)’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이 요청하는 문화영화는 위생, 농업기술 등과 관련된 교육영화가 대부분으로, ‘OEC 교육영화’로 따로 분류되어 제작번호가 매겨졌다. 이 경우 기관에서 영화과로 자세한 영문제안서가 전달되는데 여기에는 제목, 제작취지 및 방향, 수량, 용도, 사용일자, 기술고문관과 자문위원 명단 및 승낙서, 그리고 영문 대본까지 첨부되었다. 또한 촬영일정에 대한 요청 및 지시사항이 포함되기도 했다. 아예 기관에서 촬영 및 기본 작업을 마치고 녹음 및 부수작업만을 영화과에 요청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비록 요청이라는 형식을 띠었지만, 사실상 제작 주문에 가까운 것이었다.

문화영화의 제작비와 제작기간

영화과와 대한영화사 내부에서 기획이 이루어지는 경우, 제작비는 영화과 예산에서 충당되었다. 이 경우엔 ‘공보실 제공’이라는 크래디트가 붙었다. 제공이란 투자자, 곧 제작비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준다. 제작비는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중간 정산을 하여 일부 지급되고 완성 후에 나머지가 지급되었다. 영화는 대체로 35mm 흑백으로 촬영되어 1~4권 정도의 길이로 완성되며, 1권은 대략 2,000피트, 20분 정도였다. 실제 영화의 길이는 짧은 것은 1~2분에서 긴 것은 한 시간이 넘는 것까지 다양하였다. 그러나 여러 권이라고 해도 장편이 아니라 실제로는 5~15분 내외의 단편 여러 개를 묶은 시리즈로 되어 있는 것이 많았다. 제작비는 소재와 촬영 기간에 따라 적게는 2~3십만환에서 3~4백만환 이상의 것까지 다양했다. 이는 오늘날의 2~3백만원에서 3~4천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제작비의 대부분은 기획, 연출, 촬영, 녹음 등의 인건비로 사용되었으며, 필름이나 기재에 드는 비용은 관급자재로 충당하였다. 인물을 등장시킬 경우에는 출연료가 지급되고 세트를 짓거나 소품이 필요한 경우에도 따로 제작비가 책정되었다. 취재를 위해 출장이 필요한 경우, 출장비가 추가로 지급되었다. 특이한 것은 기획비가 연출료 못지않게 높게 책정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영화과의 영화제작 과정이 꽤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화과의 인건비를 급여 이외에 제작비에서 충당하고 있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문화영화는 대체로 기획서 작성–구성안 작성-촬영-해설대본 작성-편집-나레이션 녹음-종합편집-완성 등의 수순을 거친다. 문화영화의 기안부터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1~2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리는 것도 있었다. 이는 실질적인 제작에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결재 과정에서의 지체라든가 촬영이 완성되고 나서 해설원고 품의를 올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든가 하는 이유에서였다. 촬영은 길어도 10~15일 정도면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이 요청한 문화영화 중에서 농사에 관련된 교육영화는 재배과정을 촬영해야 하므로 촬영기간만 수개월이 걸리는 것도 있었다.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의 요청에 의해 제작된 문화영화의 경우 제작비는 대충자금에서 충당되었다. 대충자금은 원조에 대한 수익 발생분으로, 미국의 승인 하에 사용되는 자금이었다. 이 때 영화 크래디트의 ‘제공’에는 관련 부처 이름이 명기되었다. 제작과정에서는 한미경제조정관실(OEC) 기술 고문과 자문위원들이 검수를 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미국의 기술이 투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대한영화사는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의 외주 하청업체와 다름없었다. 후반 작업만 맡은 경우에는 녹음에 필요한 음악과 효과까지 첨부되어 전달되는 식이었다. 다만 선곡된 음악들 중에서 배경음악을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녹음기사에게 일임하는 경우는 있었다.

  •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 고전무용 촬영, 1962
    공보처 , CET0055145(4-1)
  • 국립영화제작소 장비, 1965
    공보처 , CET0057589(2-1)

문화영화의 상영 : 극장상영과 순회상영

이렇게 만들어진 문화영화는 35mm와 16mm로 나뉘어 각각 몇벌씩 복사되어 배포되었다. 한미경제조정관실(OEC)에서 요청한 문화영화의 경우에는 공보실 차원에서 보관용 프린트 1벌, 미국국제협조처(ICA) 워싱톤 본부용 1벌, 도서관용 3벌, 영화가 상영될 각지 기관용으로 10벌을 보내는 식이었다. 해외에 보낼 것은 해당국가의 언어로 특별히 제작하여 기증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화영화 제작의 주체가 관이나 군조직인 경우에는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고 지방 순회상영을 하거나 해당 군 자체에서 소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공보원(USIS)이 제작한 문화영화의 경우, 지방의 미공보원(USIS)에서 상영하거나 순회상영되었다. 문화영화의 제작은 영화과 소관이었지만 상영, 특히 지방 순회상영의 경우에는 정부 각 부서에서 각각의 필요와 목적에 부합하는 문화영화를 직접 주관하여 상영하기도 하였다. 극장에서 문화영화의 동시 상영은 일제 말기에 의무화된 적이 있었고, 이것이 법적으로 명시된 것은 1962년 「영화법」에서였다. 그 이전까지 문화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주된 방식은 순회상영이었다. 1959년에는 외국영화 상영시에 문화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라는 정부의 고시가 있었다. 같은 해 공보실에서는 ‘뉴스영화의 날’을 정하고 직접 제작한 <대한뉴스> 특보, 뉴스 및 문화영화를 월 2회 시공관에서 일반에게 공개 상영하기로 하였다. 또한, 문교부는 “영화 녹음, 강연회 및 우리나라 산업 발전상 등을 촬영한 영화를 가지고 세 반으로 나누어서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한다”는 문화영화 순회상영 계획을 발표하였다. 영사기를 차에 싣고 다니며 상영하는 순회상영 방식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식민지배를 위해 실시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미공보원(USIS)과 한국 정부에서도 각각 자체 제작한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가지고 지방 순회상영을 하였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 미공보원(USIS)으로부터 영사차량과 영사기를 대여받아 미공보원(USIS)이 제공하는 필름과 영화과에서 직접 제작한 필름을 함께 가지고 다니며 마을 단위로 순회상영을 하였다. 1959년 한국 정부의 농촌 순회상영 횟수는 농림부가 62회 3만여명, 문교부가 92회 17만여명에 그쳤지만, 미공보원(USIS) 이동영화반의 상영횟수는 전국에 걸쳐 7천회가 넘었으며 관람자수도 680만명에 육박하였다. 순회상영 시에는 극장 개봉관과 재개봉관에서 상영됐던 철지난 극영화도 함께 상영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지방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순회상영을 통한 영화관람은 극장에 가기 어려웠던 지방민들이 정보를 획득하는 수단이자 오락거리이면서 생활문화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 영화의 날 관람 인파 1, 1959
    공보처 , CET0061951(1-1)
  • 영화의 날 관람 인파 2, 1959
    공보처 , CET0061951(2-1)

1950년대 문화영화특징

문화영화의 종류와 내용

문화영화는 성격에 따라 ‘기록영화’, ‘교육영화’, ‘계몽영화’, ‘선전영화’, ‘대한뉴스 특보’ 등이 있다. 우선 문화영화는 기록영화라는 말과 통용하여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말해 모든 문화영화가 단순 기록영화는 아니다. 기록성이 강한 다큐멘터리라고 하더라도 일정한 테마를 일정한 시각으로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의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단순 ‘기록영화’, ‘계몽영화’, ‘교육영화’, ‘선전영화’로 나누어 볼 수도 있겠다. <한국의 인상>(1953, 이형표), <우편선>(1957, 이형표), <한국의 고대건축>(1957, 김광이) 같은 영화는 국토 강산과 한국문화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면서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개와 설명을 위한 단순 기록영화라 할 수 있다. 대한뉴스 특보는 <대한뉴스>의 내용 중에서 좀더 자세한 설명을 요하는 건에 대하여 제작하고 배포하였다. 대한뉴스 특보는 문화영화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뉴스에 가까우며 뉴스영화와 함께 배포되었다. 3.1절을 다룬 문화영화 중에서도 <자손 만대에 고하노라>(1957, 이형표)가 과거 기록물을 재구성한 기록영화라면, <3.1절 특보>(1958, 강래식)는 짧은 뉴스영화로는 다 담지 못한 내용에 대해 국민들에게 부가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대한뉴스 특보이다. <월남대통령 방한>(1957, 양종해), <자유의 벗 터어키>(1958, 양종해) 등과 같이 외국과의 친선을 주제로 한 것들은 모두 뉴스 특보 형태로 만들어졌다.

계몽과 선전 사이

문화영화 중에서 교육영화라고 특별히 명시된 것들이 있다. 한미경제조정관실(OEC) 요청에 의해 제작된 영화들이 주로 여기에 속한다. 교육의 내용은 위생, 보건, 농사와 관련된 기술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많았다. <보리를 기르는 새비료>(1958, 양종해)는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이 요청한 교육영화이면서 계몽과 선전이라는 목적을 기획서에 분명히 하고 있다. 농토의 토질개량에 꼭 필요한 석회비료의 제조과정과 농토 개량 방법을 설명하는 교육영화이면서, 농민들에게 석회비료의 필요성과 효용을 알리는 계몽영화이고, 이를 통해 석회비료의 사용을 늘리기 위한 선전영화인 것이다. <아카시아를 심자>(1958, 양종해)도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의 요청으로 영화과에서 제작한 것인데 농림부 산하 부락산림계원들의 교육 교재로 사용되었다. <뽕따러 가세>(1958, 임학송), <농부를 돕는 사람들>(1958, 양종해)은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이 농사원 교도사업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 요청한 영화이다. 한미경제조정관실(OEC) 요청 및 보건사회부 제공으로 되어 있는 <새로운 위생우물 파기>(1959, 최창균)는 비위생적인 우물의 문제점과 우물 소독법, 위생우물 파는 법, 우물안 청소, 수질 검사 등 위생적인 우물을 만드는 방법 등이 설명되어 있는 교육영화이자 계몽영화이다. 그런데 문화영화 중에는 기획단계에서 계몽영화, 혹은 선전영화라고 명시되어 있거나, 두 가지가 다 병기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계몽과 선전의 경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계몽의 목적이 선전이거나 선전의 수단이 계몽인 것처럼 두 가지 성격이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업>(1956, 이형표)은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 경제의 자립을 위해 각 부문에서 약진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로, <대한의 새살림>이라는 제목 아래 기획된 5개의 시리즈물 중 제1편에 해당한다. 전국 각지의 중요 생산 공장에서 “재건과 부흥을 이어가고 있는 활기찬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기안서에서부터 선전영화라고 명기되어 있다. <자유의 소리>(1957, 김영권)의 제작 서류에는 기록영화, 선전영화, 문화영화, 계몽영화라는 용어가 혼재된 채로 기록되어 있다. <자유의 소리>는 HLKA 서울방송국 창립 30주년을 계기로 방송국 시설과 방송제작 과정 등을 보여주고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도 소개하는 영화이다. 여기서 선전영화라는 용어에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공업>이 선전영화라고 할 때는 정부의 정책 홍보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지만, <자유의 소리>가 선전영화라고 할 때는 기업 홍보나 광고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정의는 부른다>(1957, 김영권)는 홍보영화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일정한 목적과 주장을 펼치는 선전영화이다. UN의 결의에 의해 수립된 대한민국이 아직 UN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사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전국적인 UN가입 추진운동 상황을 함께 수록한 영화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국문판이 아닌 영문판으로 제작해서 우방 각국에 배포됨으로써 대한민국의 UN 가입에 대한 국제여론을 일으킬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기록과 계몽과 선전의 낙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문화영화의 다양한 장르

1950년대 제작된 문화영화를 장르로 나누자면 다큐멘터리, 다큐드라마, 애니메이션, 음악영화 등이 있다. 흔히 문화영화라고 하면 다큐멘터리를 떠올리지만 극적 요소가 가미되거나 음악이나 그림(만화)을 이용한 기법을 활용한 것들도 많다. 우선 다큐드라마적 수법의 영화로는 <뚝(발전은 협력에서)>(1959, 양종해)이 있다. 군에서 제대한 청년의 나레이션으로 6년 전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영화는 일반 극영화와 달리 허구를 가미해 극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재연하는 재연드라마적 수법으로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에서는 연출은 하되 최소한 배우에게 연기를 시키지는 않는 반면, 이 영화의 주요 출연진은 배우이며 회상장면에서는 연기를 한다. 한편 <내강산 좋을시고>(1957, 이형표)처럼 음악영화라고 명시된 영화도 있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음악영화라기보다는 음악, 무용, 만담 등 종합적인 오락을 제공하는 오락영화였다. 1950년대 문화영화 중에는 애니메이션도 있다. <쥐를 잡자>(1959, 김영권)가 대표적이다. 쥐는 식량을 축내고 각종 병균을 옮기고 질병을 전염시키기 때문에 덫이나 약으로 쥐를 잡아야 한다고 계몽하는 영화이다. 음악과 만화를 이용한 이러한 다양한 시도는 이후 시기에 극영화의 다양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영화의 테마별 변화

1950년대 문화영화를 주제별로 나누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경향성을 띤다.

'민족'과 '반공'의 이중주

정부수립 후 문화영화의 주요한 테마는 ‘민족’과 ‘반공’이었다. 이 시기에 정부는 대한민국이 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유일한 국가임을 부각하기 위해 ‘민족’을 강조하는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데에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김백봉여사 무용>(1957, 양종해), <내강산 좋을시고>(1957, 이형표), <한국의 고대건축>(1957, 김광이) 등은 민족문화의 올바른 계승이 곧 민족의 정통성을 세우는 길임이 강조되었다. 이밖에 <민속예술제>(1958, 강래식)나 <우리예술사절단 동남아로>(1958, 강래식)와 같이 민족은 문화로 표상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화영화들이 활발히 만들어졌다. 한편 ‘반공’은 1950년대 내내 문화영화의 중요한 주제였다. 문화영화에서 한국전쟁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라는 두 세계의 대결이었고, 대한민국은 자유진영을 대표하여 공산진영과 싸운 것으로 묘사된다. <상기하자 6.25>(1957, 윤기범), <두 세계의 사람들>(1959, 최창균), <제5차 아세아반공대회>(1959, 정연구)와 같은 영화들은 당시 자유진영의 최전선이자 맹주로서 스스로를 여겼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국가의 표상들

전쟁이 끝나자 재건이 시작되었다. 재건(reconstruction)이란 단순히 무너진 건물과 제도를 다시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재확인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때 문화영화의 주요 주제는 ‘국토’, ‘재건’, ‘대통령’ 등이었다. ‘국토’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로서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국토를 매개로 설명하고 있다. 문화영화에서는 분단 후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할 국토는 이제 한반도의 절반 이남이라는 것과 국경선으로서의 바다에 관심이 집중된다. 대표적으로 <우편선>(1957, 이형표)은 우편선을 통해 남해일대의 바다와 섬, 평화선을 지키는 해군함대의 모습 등을 보여주면서 ‘국토’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또한 <콜터장군>(1958, 강래식), <UNKRA의 업적>(1957, 강래식), <OEC와 한국부흥>(1958, 강래식) 등의 문화영화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재건 활동상황 등을 소개하며 UN과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를 확대하였다. 공보처가 공보실로 바뀌면서 문화영화 제작이 국가의 주요한 공보활동으로서 더욱 강조된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문화영화에는 무궁화, 애국가, 태극기 등 대한민국 국가의 상징이 빈번히 등장하였다. 1958년에는 정부수립 10주년을 맞아 회고의 형식을 빌어 대한민국의 지난 10년간을 정리하는 문화영화가 만들어졌다. 국가의 궤적은 종종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동일시되어 재현되었다. 특히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시기의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에는 이승만 대통령 개인에 관한 업적이나 동정 등을 다룬 것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통령의 취임식, 산업시찰, 신년사, 기자회견, 해외순방, 탄신 특보, 크리스마스 메시지 등 이승만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고 선전되었다.

부흥과 재건은 국민의 각성에서

또한 이 시기에는 ‘경제’와 ‘산업’ 관련 문화영화 제작이 급증하였다. 1956년부터 준비해 온 경제개발계획이 1958년 산업개발위원회의 발족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은 문화영화에도 경제개발에 대한 관심과 노력의 흔적을 남겼다. <우리의 공업>(1956, 이형표)은 1950년대의 대표적인 공업회사를 취재하여 발전하고 있는 산업현장을 촬영한 것으로 1950년대 경제상황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러나 ‘산업’ 관련 문화영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농업이었다. 1950년대 중반,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의 농업소득은 총소득의 30%에 지나지 않았고, 농가 적자의 증대와 농가부채의 누증, 농업 경영규모의 영세화 등 어려운 농촌의 현실 속에서 국민에게 근대적인 영농방법을 계몽하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특히 1950년대 후반에 나온 일련의 영화들 <농부를 돕는 사람들>(1958, 양종해), <보리를 기르는 새비료>(1958, 양종해), <아카시아를 심자>(1958, 양종해), <뽕따러 가세>(1958, 임학송), <누에치기>(1959, 강대철) 등 실질적인 영농 기술을 설명하는 문화영화들은 대부분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이 기획하여 대충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남한사회의 근대화와 경제 개발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이 시기 문화영화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재건’ 관련 문화영화이다. <우리의 새살림>(1958, 강래식)이 전후의 피폐한 국가가 다시 활기를 띠는 모습을 그렸다면, <뚝(발전은 협력에서)>(1959, 양종해)은 지역개발사업 과정에서 한 마을이 공동체적 각성을 통해 스스로 재건의 길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보건·위생은 근대화의 첫걸음

한미경제조정관실(OEC)은 1959년 주한미경제협조처(USOM)로 개칭하고 나서도 문화영화를 기획해서 영화과에 제작을 요청했는데, 이 해에 대충자금으로 만들어진 문화영화는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위생이나 보건과 같은 주제들을 다뤘다. <새로운 돼지울>(1959, 유병희), <또 하나의 적 모기를 없애자>(1959, 최창균), <새로운 위생우물 파기>(1959, 최창균), <쥐를 잡자>(1959, 김영권) 등은 위생 관련 영화들이고, <건강한 어머니와 어린이>(1959, 최창균), <간편한 육아법>(1959, 이맹표), <개량부엌 만들기>(1959, 김상봉), <식생활 개선>(1959, 김성인) 등은 가정생활 및 보건에 관한 영화들이다. 위생과 보건은 구한말 이래 근대화의 지표로 표상되어 왔다. 일제가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근대화를 내세웠을 때에도, 광복 후 미국이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을 때에도, 국민 교육의 첫 걸음은 위생과 보건이었다. 이 영화들은 위생적인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이나 방법, 예컨대 위생적으로 가축을 키우는 방법, 모기나 쥐를 없애는 방법, 위생적인 우물을 파는 방법 등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당시 여성 건강, 모자 보건, 가정환경과 식생활 개선에 대한 교육적•계몽적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내용 펼쳐보기 ▼)

1) 이하나, 「정부수립기~1950년대 문화영화와 국가 정체성」, 『역사와 현실』 74, 한국역사연구회, 2009. 2) 김한상, 「문화영화를 통한 미국적 가치의 번안」,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2013-6. 3) 허은, 「미국의 헤게모니와 한국 민족주의 – 냉전시대(1945~1965) 문화적 경계의 구축과 균열의 동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8. 4) 이하나, 「미국화와 욕망하는 사회」, 『한국현대생활문화사 – 1950년대』, 창비, 2016. 5) 영화진흥조합,「한국영화총서」, 1972. 6)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문화영화목록」,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