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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 1950년대 문화영화
  • 1960년대 문화영화
  • 1960년대 문화영화의 특징
  • 1960년대 주요 문화영화 해설

1960년대 문화영화는 1950년대 말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스튜디오와 후반 작업 시설 등 기반시설이 완비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신진 인력들이 배치되면서,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생산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설치였다.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에 따라 정부의 영화제작이 일원화되고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이 시기의 문화영화는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문화영화 동시상영제도를 통해 촉발되었던 문화영화 진흥과 민간 문화영화사 육성에 관한 논의는 1960년대 내내 지속되면서 「문화영화 교환협정」, 상설 문화영화관 마련, 우수문화영화 보상정책, 문화영화제작가협회 창립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되거나 또 다른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는 정책적으로 문화영화를 지원하면서 민간 문화영화사들이 본격적으로 문화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이는 1970년대 민간 문화영화 전성기의 발판이 되었다. 1960년대 문화영화 성장의 밑바탕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추동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사정부의 공보 정책을 들 수 있다. 1961년 8월에 발표한 「공보 목표, 정책, 지침 및 공보 활동의 방침과 구체적 방안」에서 이러한 방향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데, “혁명과업 완성에 전 국민의 자율적이며 적극적인 참가를 도모하여 공보 매개체인 신문 잡지를 비롯한 모든 간행물, 방송, 연극, 영화, 사진, 시가, 음악, 미술, 조각, 연설, 포스타, 삐라 등”을 통하여 “국민과 정부와의 접촉 기회를 최대한도로 확대시켜 상호이해를 촉진”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군사정부가 5.16 직후인 6월 22일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을 통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영화를 선점하고자 했던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박정희 정권 하에서 ‘공보 영화’는 정책적으로 장려되고 관리되었다. 둘째, 한국영화의 해외 시장 개척이라는 명제가 놓여 있었다. 당시 수출중심의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정부, 아시아영화제 및 합작영화 제작 등을 통해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 시장의 개척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던 영화 산업계, 한국영화의 세계성과 보편성에 대한 평론가들의 오래된 집착 등 여러 갈래의 욕망이 한 데 모여, 해외 진출을 위한 문화영화의 지속적 생산과 질적 제고를 주문했다. 민간 문화영화사들의 육성을 염두에 두고 제안된 여러 정책들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이를 통해 전반적으로 문화영화계가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시기의 국립영화제작소 및 민간 문화영화사 제작의 문화영화들은 해외로 진출했다. 따라서, 1960년대의 문화영화들은 국가와 시장의 여러 겹의 요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의 형식과 내용을 담아낼 수 있었다.

문화영화 관련 정책과 제도의 변화

문화영화 의무상영제

문화영화 의무상영제도가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영화사에서 문화영화 의무 상영을 가장 먼저 강제했던 것은 1942년 「조선영화령」의 개정안에서였다. 이 개정안에는 영화상영 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의 상영을 의무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다시 문화영화 의무 상영 조치가 등장한 것은 1959년 1월이었다. 이 시기 신문들에서는 외국영화 상영 시 단편 문화영화 1편과 뉴스영화 상영을, 국산영화 상영 시 뉴스영화를 동시상영하는 시책 1)을 소개하고 있다. 1960년 3·15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은 이러한 시책을 통하여 공보실 영화제작소의 영화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62년 「영화법」이 신설되면서, 문화영화 의무 상영은 법제화되다. 1963년 「영화법」 1차 개정에서는 문화영화에 더하여 뉴스영화까지 의무 상영하는 것으로 규정이 변화했다가 1995년 제정 「영화진흥법」에서 다시 문화영화만을 의무 상영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이는 1998년까지 유지되었다. “문화영화 동시상영이란 눈 가리고 아웅 식이다. 제대로 된 영화가 상영되는 일은 거의 없다. 상영시간이 되도록 짧고 값싼 필름을 형식상 비추는 정도.. 광고 필름을 피로할 정도로 돌려댈망정... ” (「육성 외면... 문화영화/ 상영조차 힘든 실정/ 애써 한두 편 만들면 제작비 못 빼 도산/ 극영화보다 적극적인 뒷받침을」, 『경향신문』 1966. 6. 14. 5면) 「영화법」에 따라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 의무 상영제는, 민간 문화영화사가 전무하다시피 했고 미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의 리버티프로덕션과 국립영화제작소에서만 1년에 20~30편의 문화영화가 제작되던 당시 현실에 비추어볼 때, 다소 무리한 규정이었다. 문화영화 공급의 절대 부족과 정부 PR영화라는 비난, 극장의 편법을 극복하고 이 법이 정착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규정으로 인해 민간 문화영화사가 급증하게 되고, 제작비 현실화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한문화영화진흥위원회, 문화영화제작가협회가 생겨나는 등 문화영화를 둘러싼 제도와 환경 개선 논의들이 1960년대 내내 지속될 수 있었다.

우수문화영화 보상정책 및 각종 진흥책

문화영화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 문제는 「영화법」이 등장하고 난 뒤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문화영화 의무 상영제로 인해, 수요는 폭발했지만 공급은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존의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가 “관보취”라거나 “정부PR영화”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교육적 내용 혹은 예술적 취향과 교양을 함유하는 양질의 문화영화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논쟁을 본격적으로 촉발한 것은 박상호 감독의 〈비무장지대〉(1965)였다. 박상호 감독은 〈비무장지대〉가 국내 영화제들을 석권하고 제13회 아세아영화제에서 비극(非劇)영화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해 공보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청원서에서 문화영화 육성을 위해 극영화와 똑같은 조건으로 외화수입 쿼터를 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외화수입 쿼터는 정부 차원에서 배정하는 것이었는데, 외화 수입을 정부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하여 몇 가지 기준을 만족시키는 “우수영화”에 대해 일종의 보상으로서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우수 국산영화나 국산영화 수출, 해외영화제 출품 등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수입권을 주는 제도는 이미 1958년 문교부 고시로 시행되었는데, 1960년대에도 같은 방침에 따라 외화수입 쿼터를 정부에서 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무장지대〉 논란을 계기로, 1966년 12월에 공포된 「영화법 시행령」 제11조에서는 극영화에 한정되었던 우수영화보상정책이 문화영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 규정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1968년 공보부의 문화시책이었는데, 이는 연 4회 분기별로 우수영화 선정을 실시하여, 우수 단편 문화영화 3편을 제작한 제작자에게 외국 문화영화 한 편의 수입권을, 우수 장편 문화영화에는 외국 극영화 수입권을 준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969년 문화공보부가 발표한 문화영화진흥책은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문화영화 제작 지원 확대와 문화영화신용조합 창설을 제시했다. 문화영화 제작지원 확대는 외국 문화영화 수입쿼터 및 극영화쿼터 각 5편을 문화영화 제작자에게 주는 것으로, 이를 위한 구체적 기준으로는 시리즈물, 중편 문화영화에 대해서도 외국 극영화 수입쿼터를 제공하자는 것과 문화영화의 해외TV 상영에 대한 보상제도를 신설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우수 문화영화의 제작비를 대여해주는 등 제작을 적극 지원하는 문화영화신용조합의 창설이 주장되었는데, 문화영화신용조합은 거의 즉시 설립되어 당해 연도부터 제작비 지원을 시작하였다. 문화영화신용조합의 활동은 1970년 영화진흥조합의 창립으로 이어져, 우수 극영화와 문화영화에 대한 제작 지원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1969년 문화공보부에서 주관했던 ‘비흥행영화콘테스트’와 ‘8mm 영화촬영콘테스트’이다. 우수 민간 문화영화를 발굴하고 제작의욕을 높이기 위해 시행되어, 선정작들을 문공부에서 복사하여 보급하는 이 작은 영화제들은 “누구나의 영화” 운동으로, “등록제작업자가 아닌 국영기업체나 기타 단체, 개인이 제작한 영화를 권장하고 시상하는 적극적인 정책을 표명”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영일, 「“누구나의 영화”운동/비흥행작품 콘테스트를 보고/ 허술하나 설득력 풍겨/ 계몽적 주제 높이 평가/ 소재 비슷, 해설 과잉」, 『서울신문』 1969. 7. 29. 5면)

문화영화의 검열

문화영화의 검열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바가 많지 않다. 1966년 2차 개정 「영화법」 에서 처음으로 ‘검열’이라는 단어를 명시하고 있는데, 문화영화, 뉴스영화, 텔레비전 영화, 광고영화 및 영화의 예고편의 검열에 있어서는 법 제13조의 규정에 의한 검열 기준에 의하는 외에 동법 시행령 제24조 제5항의 규정에 의한 18세 미만자의 영화 관람의 허용에 대한 심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2차 개정 「영화법」 이후, 극영화 검열을 둘러싼 논란이 심각해지고 연일 이에 대한 논쟁이 신문잡지를 장식했지만, 문화영화의 검열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 신문 기사 및 남아 있는 관련 서류들을 통해 당시 문화영화 검열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967년 2월 21일 『신아일보』에 실린 기사(「문화영화 오늘과 내일/ 어려운 민간에의 기대, 국립영화서 겨우 명맥/ 질적 저하, 악순환만/ 기껏 극영화의 꼬리표 구실, 해외수출 등 육성책 아쉬워」)에서 민간문화영화 제작비 부족의 타개책으로 광고 수입을 활성화하자고 주장하면서, 현재는 문화영화에 광고가 양성적으로 드러날 경우 영화 검열에서 상영불가 선고를 받는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1967년 8월 일본 문화영화 25편의 검열 신청 기사와 1969년〈혹성탈출〉, 〈천사의 시>, 〈구라파의 밤〉 등의 외국의 장편 극영화를 문화영화로 속여 검열을 받은 것에 대한 문제제기의 기사 등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사들은 국내 민간제작 문화영화와 외국 문화영화의 경우, 장단편을 막론하고 검열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민간문화영화사가 제작한 단편 문화영화에 대한 검열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은영필름이 제작했던 〈월남의 맹호들〉(1968)의 검열서류에는 “특정상사 또는 특정인의 선전이 아니되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제한 및 시정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민간문화영화사는 아니지만, 국군영화제작소가 제작했던 뉴스영화〈월남전선〉에 대한 검열 기록 역시 일부 남아 있다.〈월남전선〉 제30호(1968)의 검열 서류에는 “국군이 베트콩 시체를 끌어내는 장면”을 삭제하라는 검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민간문화영화사의 단편문화영화 뿐 아니라, 국가기관인 국군영화제작소의 영화들에 대한 검열 역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검열의 주체인 공보부가 직접 제작한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에 대한 검열은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문화영화 제작 관련 서류를 통해 파악해볼 수 있다. 이 시기 일반적인 극영화의 경우, 먼저 제작신고서와 함께 사전 검열, 즉 대본 심사를 위한 시나리오가 제출된다. 여기에서 1차 검열이 이루어지고, 이후 영화 제작이 완료된 뒤 필름으로 실사 검열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검열의 내용과 결과가 서류에 남게 되며 때로 시나리오에 직접 표기된 검열 대본이 자료로 남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문화영화의 제작 서류에서는 이렇게 진행된 검열의 내용과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나리오가 첨부되어 있는 경우, 빨간 펜 등으로 수정 지시를 한 내용들은 살펴볼 수 있으나 간단한 단어의 수정이나 생략뿐이며, 이는 일반적인 검열의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신 감수, 제작회의, 찬동서 등의 형식으로 영화의 내용이나 대본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이 요구되고, 이것이 실제 영화에 반영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나는 간첩이었다〉(1961)는 영화제작 후 녹음 대본을 내무부, 국방부, 중앙정보부, 아세아반공연맹 등에 보내어 ‘찬동서’에 서명을 받았다. 그 후, 각 기관에서 온 내용들을 담은 ‘장면수정안’이 첨부되었는데, 이것이 일종의 검열 조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 나는 간첩이였다 제작관련, 1962,
    공보부, BA0791792(5-1)

또한, 반공문화영화〈새야새야〉(1965)의 경우에도 중앙정보부의 감수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자료들로 미루어,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에 대한 검열은 일반 극영화나 민간 문화영화가 거쳤던 프로세스에 따라 명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반공’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경우 2차 「영화법」 개정 이전에도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관련 부처에서 사전 검토하는, 일종의 검열 작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반공계몽영화 새야새야 제작관련, 1965,
    공보부, BA0791857(10-1)

문화영화 교환협정과 해외 문화영화의 상영

1960년대 이전 시기부터 다양한 국가들의 장・단편 문화영화가 수입되어 상영되어 왔지만, 1960년대에는 국립영화제작소가 주체가 되어 「문화영화 교환협정」을 맺었고, 또 해외 문화영화를 수입하여 내레이션 등을 고쳐 재편집한 뒤 국립영화제작소의 이름으로 배포하기도 했다. 먼저, 국립영화제작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던 캐나다의 국립영화제작소를 일종의 롤 모델로 삼아, 최봉암, 김인태 감독 등을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으로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에서 연수받도록 했고2), 1962년에는 「문화영화 교환협정」에 따라 〈의자공과 소년〉, 〈협동조합〉 두 편을 들여와 한국어 더빙 작업을 한 뒤 배포, 상영하였다. 한국의 문화영화도 이 협정에 따라 캐나다에 소개되었는데, 제9회 아시아영화제에서 촬영상을 탄 국립영화제작소의〈새로운 고향〉이 캐나다의 7백 여 개의 필름도서관으로 보내지고 660조의 이동영사반에 의해 5,600개의 장소에서 상영될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문화영화 해외로/카나다와 교환협정」, 『동아일보』 1963. 2. 11.) 한편, 라디오프리베를린 Sender Freies Berlin(SFB: Radio Free Berlin)의 TV다큐멘터리 〈Backed Wire Frontier〉도 〈철조망〉이라는 제명으로 번역되어, 1962년에 국립영화제작소의 재편집과 더빙을 거쳐 제작되었다.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

국립영화제작소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6월 22일 법률 제632호로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국립영화제작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이전 시기의 기관은 1948년 공보처직제에 의해 설치된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로, 1956년 공보실 소속 선전국 영화과, 1960년 7월 국무원사무처 공보국 영화과로 변경되면서 국가생산 영화제작을 주도해왔다. 1949년 공보처 영화과 산하에 설치된 ‘사단법인 대한영화사’는 국립영화제작소가 설치될 때까지, 영화과에서 기획한 문화영화 및 뉴스영화의 제작을 일정부분 담당했다. 또한, 당시 한국영화계의 열악한 물적 토대를 보충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 민간 영화사들의 제작을 지원하는 일종의 영리사업체로 운영되었다. 공보실 영화과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무성 국제협조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의 원조 및 대충자금의 투입으로 스튜디오를 완공하였다. 이로써 영화과는 영화제작소의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고 기술보도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시라큐스 대학의 기술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인력들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적, 인적 토대 하에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설치법」에 따라 “정부 각 기관에 분산되어 있는 영화제작업무의 일원화”를 기하여 “예산의 절약과 급속한 영화제작기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공보부장관 소속”으로 설치되었고, 기존 영화과의 장비와 역할, 인력을 이관 받았다. 이 법은 국립영화제작소가 “공공기관의 영화제작사업 또는 민간영화제작을 조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업”을 국립영화제작소의 부대사업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립영화제작소의 업무 범위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국립영화제작소 역시 국가생산 영화제작뿐 아니라 민간영화제작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962년 9월 공포된 각령 제967호 「국립영화제작소 부대사업에 관한 건」은 국립영화제작소가 할 수 있는 부대사업의 내용을 더 명확하게 규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공공기관이나 민간영화제작업자”는 영화필름현상, 영화녹음 및 음복제(더빙), 영화필름의 축소, 확대 및 복사, 영화촬영, 기타 영화제작에 필요한 기술적 사항 등 다섯 가지에 한하여 국립영화제작소에 의뢰할 수 있었다.

  • 국립영화제작소 부대사업에 관한 건(각령 제967호), 1962,
    총무처, BA0189003(2-7)

즉, 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는 정부의 영화제작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을 뿐 아니라, 민간영화제작을 위하여 특히 후반작업을 비롯한 기술적 지원 등을 공식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1950년대 대한영화사가 담당했던 역할이 공식적으로 국립영화제작소의 역할로 이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립영화제작소 부대사업에 관한 규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기존 문화영화제작의 주된 발주자였던 중앙정부의 각 부처들 이외에도 지방 행정부, 민간 기업과 조직에 이르는 다양한 단체들이 이러한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문화영화 제작의 주체가 될 수 있게 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서울시, 부산시, 경상남도와 같은 지방 행정단체, 대한나협회(대한나예방협회), 세기상사와 같은 민간단체의 요청에 의하여 문화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뉴델리 총영사관, 이탈리아TV 방송국, 월남전 참전 부대 요청에 의하여 문화영화 필름이 복사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는 국립영화제작소 영화 제작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 10년간(1960~1969) 문화영화 총 466편의 제작을 비롯하여 매년 52편씩 주간뉴스로 제작되었던 〈대한뉴스〉를 제작하였고, 〈한국뉴우스〉(이후 〈고국소식〉으로 개제, 1962년부터 일어판), 시군 홍보용 영화 〈새소식〉과 〈농촌뉴우스〉(월 1회, 1966~1973) 등을 제작3)하는 등 국립영화제작소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제작활동을 지속했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는 1968년 문화공보부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민간문화영화사

1962년 「영화법」에 문화영화 의무 상영이 명시되면서, 민간 문화영화사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영화법」과 함께 문화기록영화 제작을 내세우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동양문화영화촬영소’였으며, “민간업자가 만든 최초의 문화영화”로 기록된 것은 신상옥 감독이 이끌던 ‘신필름’이 제작한 〈아세아의 별〉(1962)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신필름’의 PR을 위주로 한 것으로 비판 받았으나, 이후로도 ‘신필름’은 문화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차 개정 「영화법」 이후 문화영화제작업자로 등록한 제작사는 1963년 9월 신필름 등 6개사였고, 1964년 7월에는 25개사까지 늘어났다. 1963년 초까지는 의무 상영 편수를 채울 수 없을 정도로 문화영화의 공급이 부족했으나, 1964년이 되면 수요에 비해 많은 공급량이 유지되는 형편으로 태세가 전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극장이 국립영화제작소의 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므로, 민간 문화영화 배급의 문제가 상당히 열악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동아일보』 1964.7.16.) 제작비 환수가 불가능하므로, 영화사들이 영화를 배급하지 않고 보유하고만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 1966년 6월 시점에는 10개의 제작사만 남아 있었고, 이 해 대종상 시상식에 민간 제작의 문화영화가 단 한 편도 출품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했던 〈비무장지대〉 사건 이후, 민간문화영화 제작 활성화의 방안이 다각도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부의 문화영화나 PR영화도 민간업자에게 제작시키고 일체 손을 떼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수지는 안 맞아도 서로 만들겠다는 문화영화의 활로/ 정부와 경쟁 안돼」, 『경향신문』 1967.7.22.) 우수문화영화 보상정책을 통한 정부의 민간 문화영화 제작 장려뿐 아니라, 장편 문화영화의 흥행 가능성 또한 민간 문화영화 활성화에 기여했다. 1965년 일본에서 “레슬링 다큐멘터리” 〈역도산〉이 수입되어 크게 히트했는데, 이에 고무되어 신영문화영화사에서 제작한〈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 〈극동의 왕자 김일〉(1966) 또한 극장 개봉을 통해 수많은 관객을 모았다. 국립영화제작소의 장편문화영화도 이런 흐름을 이어갔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첫 번째 장편문화영화 〈월남전선〉(1966)이 시의성으로 화제를 모았다면, 〈팔도강산〉(1967)의 대대적인 성공은 장편문화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확실히 입증하는 것이었음은 물론, 문화영화에 스타 영화배우들을 기용하는 새로운 트렌드를 정착시키기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1967년에는 장편 애니메이션이 문화영화로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모았던 것 역시 고무적인 일이었다.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세기상사, 신동헌)부터 인형 애니메이션〈흥부와 놀부〉(주식회사 은영필름, 강태웅, 1967), 〈손오공〉(세기상사, 박영일, 1969) 등이 제작되어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성공을 동시에 거뒀다. 〈흥부와 놀부〉, 〈손오공〉은 문공부의 우수문화영화에도 선정되었으며,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등을 비롯한 각종 국내영화제의 문화영화상을 휩쓸었다. 이러한 장편 문화영화들의 성공은 이후 민간문화영화사의 제작 활성화를 이끄는 촉매제로 기능했다.4) 마지막으로, 1968년 이후 TV를 통한 문화영화 배급이 확대되면서 민간문화영화사의 확실한 배급통로가 확보된 것도 1960년대 후반 민간문화영화 제작 활황에 크게 기여했다.

미공보원(USIS)의 리버티프로덕션

리버티프로덕션 역시 1960년대의 주요 문화영화 생산자였다. 대부분 한국영화인들이 실제 제작을 맡았던 리버티프로덕션은 〈리버티뉴스〉와 함께 다수의 문화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리버티프로덕션은 후반으로 갈수록 이전과 같은 절대 우위의 뉴스, 문화영화의 생산자로 기능하지는 못했다. 특히 1963년을 기점으로 〈대한뉴스〉를 비롯한 국립영화제작소 영화들의 질적 향상과 함께 이 영화들에 대한 이동영사 지원이 한층 강화되면서, 리버티프로덕션 영화의 영향력은 이전처럼 절대적일 수 없었다. 이에 더하여 〈리버티뉴스〉를 지원하던 미 해외공보처(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USIA)의 대내외적 상황 변화로 인해 1967년 뉴스영화 제작지원 프로젝트(Kingfish Project)가 중단되면서, 미공보원의 영화제작은 더욱 위축되었다.5)

  • 리버티 뉴스 종료(대한뉴스 제626호), 1967
    공보부, CEN0000543(4-1)

1960년대 문화영화의 특징

주제적 특징

정권 홍보 영상 및 정치적 주제의 증가

5.16 군사정변 직후 국립영화제작소를 설립했던 군사정권의 목표는 명확했다. 가장 먼저,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대중적으로 최대한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기 내내 각종 중대한 국내외의 정치, 경제, 외교 이슈들은 무엇보다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통하여 홍보되고 설득되었다. 한일협정, 월남전 파병과 같이 국민들의 반대에 직면했던 사안들도 중요했지만, 가장 빈번하게 다뤄진 주제는 ‘반공’이었다. 노골적인 반공영화 외에도 문화를 다룬 영화나 오락영화 혹은 여타 주제를 다룬 영화에서도 반공과 관련된 언급이 삽입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공의 주제가 전파되었다. 또한, 국책 홍보와 정권 및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제작된 ‘선전용’ 문화영화도 상당수 제작되었다.

경제적 발전을 과시하기 위한 영화 제작

1960년대 초, 군사정부는 아시아영화제, 아세아반공대회, 국제음악제, 동방민속예술제전, 아시아작가대회 등의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했다. 이 행사들은 ‘혁명’ 이후 안정, 발전된 한국사회를 대외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자 군사정권의 ‘문화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 행사들을 담고 있는 문화영화들은 대내외적으로 한국의 경제 발전을 과시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외국인 및 해외 체류 동포들에게 한국 방문을 홍보하고자 하는 목적도 포함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영상들이 급증하였다. 예컨대 〈팔도강산〉과 그 시리즈 영화들의 목적은 바로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근대화된 조국의 모습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술, 오락 문화영화의 제작 활성화

1960년대 한국영화계는 극영화보다 문화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수출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1963년과 1964년에〈열반〉과 〈초혼〉이 아시아영화제 비극(非劇)영화부문 최우수상을 잇따라 수상한 뒤에는, 노골적으로 해외영화제 출품과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둔 영화들이 제작 붐을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영화들은 국립영화제작소 소속 영화인들이 ‘작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했던 ‘순수문화영화’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제작된 영화들은 대부분 해외공관과 문화원 등에 비치되어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혁명과업’에 정진하는 국민들, 월남파병 군인들 등의 위안을 목적으로 제작된 오락영화들도 다수 있었다. 만담, 민요, 고전 무용과 옛 가요부터 최신 가요와 재즈, 모던 댄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쇼 무대의 구성이 문화영화로 제작되었다. 특히 5.16 군사정변 직후에 제작된 오락영화들은 코미디와 만담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정권홍보적인 주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된 쇼 오락영화들은 ‘팔도유람’을 모티프로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형식적 특징

‘세미다큐멘터리(semi-documentary)’ 형식의 유행

1960년대에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이라고 명시된 영화의 제작이 많았다. 주로 실화나 수기를 극화한 영화가 많았는데, 반공이나 가정 경제난의 극복과 같은 주제가 자주 다뤄졌다. 수기였던 〈나는 간첩이었다〉와 〈인민재판〉,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새야 새야〉를 비롯한 〈실화극장〉 시리즈가 반공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주부일기〉, 〈어둠을 헤치고〉, 〈가시밭을 헤치고〉 등은 어려운 살림살이를 극복한 주부와 소년가장의 수기를 극화한 영화였다. 〈모정의 뱃길〉처럼 장한어머니상 수상자의 실화를 극화한 경우도 있었다.

장편극영화 형식의 등장 및 영화배우들의 출연

월남전 파병군인들을 담은 〈월남전선〉이 장편으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개봉한 이래, 〈팔도강산〉의 상업적 성공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장편문화영화 제작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어지는 〈팔도강산〉 시리즈 역시 장편극영화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팔도강산〉의 대중적 인기에는 당대 유명 영화배우들의 대거 출연이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장편문화영화뿐 아니라 단편영화들에도 남정임, 윤정희, 오영일, 김진규, 신영균, 구봉서, 서영춘, 김희갑 등의 스타 배우들이 출연하여 문화영화의 오락성을 높였다.

유명작가들의 참여

〈열반〉과 〈석굴암〉의 조지훈, 〈인민재판〉의 팔봉 김기진, 〈모정의 뱃길〉의 박경리와 이서구, 〈농토는 부른다〉의 이호철 등 유명작가들이 문화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참여는 문화영화의 질을 향상시켰으며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담당했다.

애니메이션 형식의 적극적인 활용

1959년 최초의 애니메이션 문화영화였던 〈쥐를 잡자〉가 제작된 이래, 1960년대는 문화영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전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물론, 일부를 애니메이션으로 삽입하는 경우는 언급하기 힘들만큼 많았다. 이 중 전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문화영화는 〈나는 물이다〉, 〈112〉, 〈다시는 속지말자〉, 〈어둠이 지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한국의 70년대〉, 〈가족계획〉, 〈공중도덕〉 등이 있다.

  • 어둠이 지나면
  • 가족계획
  • 공중도덕

참고문헌(내용 펼쳐보기 ▼)

1) 「오락순화에 치중/ 영화상영허가 사무요강과 국산에 보상특혜요강 공고」, 『동아일보』 1959.1.14.석3면; 「영화배급회사 5계급으로 구분」, 『조선일보』 1959.1.14.석3면; 「추천제에서 할당제로/ 문교부, 신년도 영화수입허가시책 발표/ 배정량은 실적따라/ 38개사를 5급으로 구분」, 『한국일보』 1959. 1. 14. 4면. 2) 공영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관계」, 『영상예술연구』25, 2014. 3) 문화공보부, 『문화공보30년』, 고려서적주식회사, 1979, 47쪽. 4)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문화영화의 안과 밖』, 현실문화연구, 2014; 이순진, 「국가에 의한 영화 제작의 역사와 국립영화제작소」, 같은 책 5) 1960년대 후반 미공보원의 영화제작 축소와 킹피쉬프로젝트에 대하여는 박선영, 「냉전시기 뉴스영화의 정체성과 실천의 문제-〈리버티뉴스〉의 역사와 외국 재현을 중심으로」, 『사림』65, 2018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