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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조선시대 ‘김영란법’, 뇌물수수 80관貫이면 참형

「조선왕조실록」 - 법 시행 후 식사 추가하는데 20여 년 걸려

헌법재판소 위헌여부 판결까지 거치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하 법)이 시행 한 달여가 지나고 있다. 입법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소비부진과 사회전반의 위축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빠르게 자리 잡아가는 분위기이다.

법안명칭 보다 첫 제안자인 김영란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의 이름을 딴 김영란법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이 법은 직무상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공직자(공무원, 공공기관 직원, 교사, 언론인 등)는 일체의 금품을 받거나 주어서는 안 되고, 다만 원활한 직무수행과 사교의례․부조의 목적인 경우 직무와 관련이 있더라도 식사는 3만원, 선물은 5만원, 경조사비는 10만원 이하만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적용 대상이 4만919개 기관 400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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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우려처럼, 이 법의 시행 이후 각급 학교 운동회에서는 혹시 있을 수 있는 실수를 예방하기 위해 교사들은 교무실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운동장에서 식사를 해야 했고, 관가 주변 고급음식점들은 매출이 급감해 울상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성공적이라는 평이다. 특히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우리나라 접대문화에 비추어 보면, 놀랄 만큼 빠른 변화라는 평이다.

이 법의 첫 시행은 어찌 보면 세종 6년인 1424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조정의 무능과 부패가 조선 개국의 주요 명분 중에 하나였지만,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뇌물 관련 기록이 총 3,500여 건에 이르는데, 뇌물 때문에 참형을 당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례가 여럿 눈에 띤다. 「태조실록」 1395년 3월 1일 세 번째 기사는 뇌물 앞에 인간이 어디까지 부도덕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경상도 가수(加守)에 사는 진송과 정만이 토지를 두고 다투던 중 진 씨가 정 씨를 폭행해 숨지게 했는데, 피해자의 아들인 정원철이 뇌물을 받고 이를 관청에 고발하지 않았다. 멀지 않아 이 일이 발각되어 정원철이 참형을 당했다. 태종의 후궁인 숙공궁주의 아버지인 김점(金漸)도 비리종합세트였다. 「세종실록」 1421년 10월 10일 두 번째 기사가 김점의 비리를 고발한 상소문인데, 평안도 관찰사 재직 시 상인들에게 뇌물을 거두어들인 것은 예사이고, 매관매직, 옥사(獄事)편의, 무역상 밀거래 협박까지 온갖 수법으로 돈을 뜯어냈다. 조사할수록 비위사실이 커지자 태종은 “탐장질한 자의 딸을 더 이상 궁중에 둘 수는 없다”며 김점의 딸인 숙공궁주를 친정으로 내보냈다. 김점이 중형을 받았음은 물론, 그의 딸도 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여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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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김영란법과 유사한 뇌물금지법은 세종 6년인 1424년에 있었던 일련의 뇌물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 해 1월 5일 세 번째 기사는 선산부사 조진에 관한 것이다. 사헌부는 조진이 관청의 물건을 사적으로 착복한 것이 22관(貫, 3.75kg)이니 법에 따라 곤장 1백대에 2,500리 유배에 해당하고, 태종의 산릉(山陵) 앞 기생집에서 성접대와 여우고기를 먹은 일은 곤장 80대에 처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같은 해 4~5월까지 우사간 유계문은 문화현감 왕효상에게 숯 납품을 청탁한 건으로 파면, 유계문 등 여러 사람에게 뇌물을 받은 왕효상은 곤장 1백대에 영암 유배, 칠(漆) 납품을 받도록 압력을 행사한 봉례(奉禮, 정4품 관직) 유지는 곤장 90대, 칠 납품에 관여한 신천현감 윤번은 곤장 80대에 각각 처해지는 등 크고 작은 수뢰사건이 이어졌다.

「세종실록」 1424년 7월 14일 다섯 번째 기사가 뇌물을 준 자와 받은 자 모두를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이날 사헌부는 관가의 물건을 축내고 훔쳐 내는 자, 법을 어기고 주고받는 자가 끊이지 않아 폐단이 크다며, 지금부터 육전(육조의 업무규정)을 엄금하고,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처벌하고, 주고받은 물건은 장물(贓物, 훔친 물건)로 본다고 보고했다. 이는 뇌물금지법을 만들라는 임금의 명에 따른 것으로, 보고를 받은 임금은 지신사 곽존중을 통해 대신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전조(고려) 말년 뇌물이 공공연히 왕래하던 구습이 아직도 남아 뇌물 주는 것을 태연하게 여기고, 뇌물을 거절하는 자는 도리어 조롱을 당한다”며 통탄해 했다. “이는 법률 조문이 준 자에 대한 처벌은 정하고 있으나 받은 죄에 대한 율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준 자나 받은 자 모두에게 죄를 주고자 하니, 이를 특별교지로 할 것인지, 법률로 제정할 것인지 검토하라”라고 하교하였다.

전교를 받는 자리에서 임금이 자신의 뇌물수수를 이미 알고 있다고 판단한 좌의정 이원은 뇌물을 받은 신이 이 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자신의 죄를 밝혔다. 영의정 유정현은 자신도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음식이나 향포(香脯)는 제외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대제학 변계량과 이조판서 허조가 거들고 나서자 임금이 그대로 하라 명했다. 이로써 최세온에게 표피와 종이를 받은 좌의정 이원과 음식 접대를 받은 대신들이 면죄부를 받았고, 조선판 김영란법 적용대상에서 음식물이 제외되었다.

이때까지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발생하던 뇌물사건이 이 법 때문인지 한동안 뜸했다. 시행 후 첫 사건은 다음 해 5월 8일 발생했다. 이날 여섯 번째 기사인데, 이간(李侃)의 뇌물을 받은 대사성 황현, 양주 부사 이승직, 한을기, 황득수, 장영실, 구중덕, 조맹발, 기석손을 조사하여, 받은 뇌물에 따라 법률에 정하고 있는 형량을 적용한 바, 모두 장물이 20관 이하이므로 태 20대에 해당한다는 내용이다. 임금은 아뢴 대로, 시행하되 공신의 후손인 황득수와 맹발만은 처벌을 면해 주라고 명했다. 공신 홍서의 사위인 황득수는 양전 차사원(경작면적 조사관)으로 재직 시 허위보고로 태종 12년 파직되었다가 복직하는 등 몇 차례의 비위전력이 있다.

음식물 제공이 처벌대상에 포함된 것은 23년이 지난 1447년이다. 세종 29년 4월 14일 첫 번째 기사는 임금이 백성들은 불쌍히 여기지 않고 뇌물 쓰기를 일삼은 제주목사 이흥문의 국문을 의정부에 지시한 내용이다. 이 사건은 제주고을의 경저(京邸, 서울사무소) 근처에 사는 여자와 결혼한 내시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영의정 황희, 우의정 하연, 좌찬성 황보인,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이 관계 관아에서 아뢴 것이라면 당연히 추국해야 하지만, 내시의 말을 듣고 국문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이흥문을 내쫓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이 같은 의견은 자신들도 이흥문에게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은폐하기 위해 서둘러 사건을 종결지으려 한 것으로 의심 된다.이와 관련, 임금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뇌물수수를 시인하고 사직을 청했다. 이에 임금은 식물은 법령에 정한 것이 없으니 혐의하지 말고 출근하라 명하고, 이흥문의 직첩을 박탈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종결토록 이조에 전교했다.

그러나 당대의 실세 대부분이 말고기와 말장식을 뇌물로 받은 이 사건이 당사자들의 의지대로 쉽게 끝날 리 없었다. 사헌부가 준 자와 받은 자 모두를 법대로 처벌할 것을 거듭 요청하자 이흥문을 유배 보내는 것으로 한 단계 처벌수위를 높였지만, 많은 관료들과 사헌부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임금은 아무리 작은 뇌물이라도 준 자와 받은 자는 모두 처벌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주장을 받아 들였다.
이 대목만 보아서는 음식물의 포함여부를 알 수 없으나, 이날 기사의 말미를 보면 확실해 진다. 이 부분은 사관이 자신의 주장을 기록한 것으로 임금이 음식물까지를 뇌물로 논하게 한 것은 가혹하게 따지는 폐단을 남길 것이라고 적었다. 이로 보아 이때부터는 음식접대도 뇌물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가장 노력한 임금이었지만, 아쉽게도 조선 최악의 뇌물사건을 치러야 했다. 즉위 8년인 1426년 있었던 김도련 뇌물사건이다. 이 해 3월 4일 다섯 번째 기사는 김도련이 당시 최고의 권력자이던 병조판서 조말생, 우의정 조연, 곡산 부원군 연사종 등에게 뇌물을 주고 부당한 소송을 벌여 함흥부 홍원현에 사는 김송과 김진의 형제의 재산과 노비 수백 명을 빼앗고, 친인척 4백여 명을 노비로 전락시킨 사건이다. 함길도 행대감찰(行臺監察, 사헌부가 각 도에 파견하는 감찰) 이사증의 조사에 따르면 김도련의 뇌물 중 노비만 따져도 평성부원군 조견 17명, 전 우의정 정탁 7명, 우의정 조연 6명, 병조판서 조말생 36명 등 총 19명의 대소신료에게 132명의 노비를 뇌물로 바쳤다. 대사헌 권도는 “조말생이 받은 뇌물 중 확인된 노비만 환산하여도 780관에 해당된다. 이는 교형 기준인 80관의 10배에 이르는 것이니, 이를 용서한다면 누가 법을 따르겠는가” 이밖에도 여러 신료들이 극형을 주장했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세종은 “조말생은 태종께서 신임했고 나도 신임했는데, 죽일 수는 없다”며 끝내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해 스스로 법률을 어기는 오점을 남겼다.

성종 때는 기본법인 경국대전의 일부를 개정해 당상관 이상과 사헌부, 사간원 관리의 집에는 동성(친가)은 8촌, 타성(외가, 처가)은 6촌까지, 인접한 이웃 외에는 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분경(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권문세가를 찾아다니며 벌이는 청탁활동)을 근절하기 위한 것으로 친인척과 가까운 이웃 외에는 권문세가의 집을 아예 출입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이를 어기면 곤장 100대에 3,000리 유배의 중형에 처해 졌다.

그러나 이 강력한 뇌물 또는 분경금지법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용대상 완화를 건의했고, 그때마다 이를 수용해 적용대상이 극히 일부의 고위직으로 축소되었다.

이 때문인지 성종 재위기간에 뇌물사건이 가장 많았다. 재위기간이나 당시의 사회적 배경 등과 관계없이 건수만 보면, 중종이 387건, 성종이 367건, 선조가 300건 순인데, 이를 재위기간으로 나누어 보면, 25년을 왕위에 있었던 성종이 년 평균 14.7건, 중종이 9.9건, 선조가 7.3건으로 성종 때 부패가 가장 심했다. 성종 때 있었던 첨정(僉正, 종4품 관직) 김정광 등 하급 관료들의 상인 갈취사건은 뇌물종합백화점이었다. 「성종실록」 1470년 7월 6일 여섯 번째 기사는 의금부가 첨정 김정광, 직장 박희손, 봉사 박위의 뇌물수수를 조사한 것인데, 31명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뇌물을 받은 김정광의 경우 총 물량이 157관으로 교형 기준인 80관을 두 배 가까이 초과해 참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패척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아무리 제도가 완벽해도 인간의 탐욕은 빠져나갈 우회로를 찾도록 끝없이 자극하고 유도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닭과 계란의 논란처럼,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선진국이 되는 건지, 진정한 선진국이 되면 성숙한 시민의식과 함께 부정부패가 척결되는 건지 순서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건만은 확실하다. 경제위축 등의 부작용은 최소화 하면서, 우리의 시대적 소망인 부패척결이 성공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