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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초강력 분경금지법 이후는 사헌부가 조선판 공수처

「조선왕조실록」 - 장 100대 유배 3천리, 신료들 반발 거세 흐지부지

※분경(奔競) : 고위관료의 집을 드나들며 벌이는 인사청탁

무부가 마련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법안이 국회통과를 앞두고 있다. 검사가 최대 50명, 수사인력이 122명에 달해 일명 슈퍼 공수처로 불리기도 했던 당초 안보다 많이 작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가질 전망이다.

지난 1996년 11월 참여연대가 제안한 이후, 온갖 우여곡절 끝에 21년 만에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 기구는 입법, 사법, 행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기구로 검찰과 동일하게 수사와 기소, 공소유지 권한을 가지며, 처장과 차장 각 1명을 포함한 검사 25명, 수사관 30명, 일반직원 20명 이내로 구성될 예정이다. 막강한 권한과 독립성이 보장되며 처·차장의 임기는 3년 단임, 검사는 2년씩 3번 연임, 수사관은 최장 6년까지 근무할 수 있다.

수사 대상자는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현직 및 퇴직 2년 이내 고위공직자와 그 가족으로 정했다. 즉 국무총리, 국회의원,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광역자치단체 및 교육장, 중앙행정기관의 정무직 공무원, 검찰총장 및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관, 대통령비서실·경호처·국가안보실·국정원은 3급 이상 전·현 직원과 가족이 대상이다.
공수처장은 타 기관이 수사 중인 사건의 이첩과 착수한 사건의 이관을 요구할 수 있다. 이 법이 시행되면, 공수처 수사관들이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한 견제할 수단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동안은 공수처 같은 강력한 사정기관이 없어 고위공직자들의 비위가 근절되지 않았던 걸까.

사극을 보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호통을 치거나, 곤장도 서슴지 않는 ‘원님재판’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군수나 관찰사가 맡았던 1, 2심 재판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일 뿐, 실제로는 상당히 앞선 사법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항소하면 중앙 사법기관의 3심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도 억울하면 신문고나 상언(임금 행차 시 직접 호소), 격쟁(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요즘의 1인 시위)을 할 수도 있었다.

경국대전이 정하고 있는 사법기관은 사헌부, 의금부, 형조, 한성부, 포도청인데, 이중 사헌부와 의금부가 오늘날의 검찰과 비슷했다. 사헌부는 임금을 포함한 모든 관리의 부정부패 감시·감찰, 법령의 제·개정 심의, 관리의 인사검증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정부기관과 비교하면, 검찰과 감사원, 사정비서관의 기능을 합한 것과 비슷했다.

  • 김윤보의 [형정도첩]중 곤장형 집행장면

의금부 역시 검찰기능을 가졌지만, 특별사정기관이었다. 경국대전은 봉교추국(奉敎推鞫,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사함)만을 맡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왕명에 의해서만 수사하는 기관으로 반란이나 음모, 강상죄(綱常罪, 사회기본질서를 해치는 중대범죄)를 전담했다. 왕명이 있으면 어떤 사건이든 수사가 가능해 사헌부를 견제할 수 있었다. 현재의 검찰 일부 기능과 국정원에 해당된다.

실제로 여러 임금이 의금부를 동원해 사헌부를 무력화했다. 성군으로 손꼽히는 세종도 의금부를 앞세워 자신의 권위를 지켰다. 실록 1428년 2월 30일 다섯 번째 기사는 하마터면 의금부가 4군 6진을 개척한 김종서를 죽일 뻔한 사건이다. 임금의 명으로 사헌부 수뇌부를 수사한 의금부가 김맹성, 김종서에게 업무상 과실의 책임을 물어 장 90대에 직첩회수와 수군 병졸로 강제 징집, 공직 영구퇴출을 구형한 것. 임금도 미안했는지 장 80대만 치는 것으로 감형해 주어 목숨은 구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실제 혐의는 왕명을 거역한 죄였다. 같은 해 1월 양녕대군의 간통사실이 드러났다. 상소가 빗발치자 임금이 더 이상 논하지 말 것을 명했으나, 유독 사헌부 집의(종3품) 김종서만 “그 여자는 양녕대군이 절대 간음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화가 난 임금이 2월 7일자로 사헌부에 대한 대대적인 좌천인사를 단행해 김종서를 전농윤(典農尹, 전농시 종3품)으로 보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자 이번에는 의금부에 수사를 지시해 엉뚱한 사건으로 김종서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폭정의 아이콘인 연산군은 의금부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어 사헌부를 견제했다. 사사건건 자신을 비판하자 대사헌을 비롯한 수뇌부를 의금부에 구속하고, 조직을 개편해 기구를 축소하고, 지평(持平, 종5품) 자리를 아예 없애버렸다. 비록 직급은 종5품에 불과했지만, 당대 최고의 엘리트가 거쳐 가는 양사의 꽃이었다. 사헌부의 지평을 없앤 것은 검찰의 평검사를 없앤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조치였다. 이처럼 의금부는 사헌부와 기능은 비슷했지만, 왕권 유지를 위한 친위대였기 때문에 정치적 독립성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하는 공수처와는 거리가 있고, 어느 정도의 독립성이 확보된 사헌부가 공수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경국대전은 사헌부의 주요 임무를 ‘백관의 규찰’로 정하고 있어 기능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현재의 공수처가 고위공직자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요즘 논의되고 있는 공수처법과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적용 대상과 금지내용이 상세히 적시된 이 법은 성종 1년인 1470년 경국대전에 올랐는데, 이때부터 사헌부가 공수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전에도 성문법은 아니었지만, 경국대전과 같은 효력을 갖는 임금의 교지로 유지되던 분경금지법이 있었다. 인사나 이권청탁을 금지하는 교지가 내려진 것은 정종 1년인 1399년 8월 3일이다. 실록 이날 두 번째 기사가 분경금지법이다. “지금부터는 종실, 공후대신, 개국 및 정사(定社)공신, 고관대작을 사적으로 찾아가 부탁하지 말고, 해당 관청이나 공공장소에서 하라. 이를 어길 시는 사헌부가 조사하여 멀리 귀양을 보내고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

부패척결의지를 담아 특별교지까지 내렸지만, 권력가 주변의 분경은 여전했다. 실록 1400년 2월 12일 네 번째 기사는 대사헌을 파직한다는 내용이다. 낭사(郎舍, 주요 현안의 분석이나 보고 등을 주된 임무로 하는 정3품 이하 관료를 통칭) 서유가 상소했다. "분경을 금지하는 공문이 이미 사헌부에 시달되었는데도, 지금 재상집 주변에는 분경하려는 자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헌부는 이를 알면서도 단속을 하지 않고 있으니 대사헌 정구를 비롯, 김구덕, 안등, 이계공 등을 파직하여야 마땅합니다.” 이에 임금도 “전날에도 똑같은 상소가 있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으니 모두 파직하라.” 명했다.

첫 위반자는 지의흥삼군부사(정2품 관직) 김영렬이다. 태종실록 1401년 6월 24일 첫 번째 기사인데, 판상서사사(옥쇄, 특수 신분증, 고관대작 임명 시 하사하는 의장용품 등을 관리하는 상서사의 장) 이무의 집에 찾아가 청탁한 사실이 사헌부에 적발되어 파직시켰다는 것이다.

태종은 삼군부와 사헌부의 아전을 신료들 집에 보내 출입자를 감시하기까지 했다. 1401년 5월 20일 기사는 사헌부의 건의이다. 아전들을 무신(武臣)과 집정(執政, 정권을 잡은 권력가)의 집에 보내 감시하고 있는데, 이들이 이유도 묻지 않고 출입자를 체포·구금하여 문제가 많다. 이에 같은 성씨는 할아버지와 6촌까지, 다른 성씨는 3촌까지 출입을 허락해 달라는 것. 이에 임금은 “친·외척 구분 없이 5촌까지 출입을 허락하고, 위반자는 직사(直事, 업무상 관계자)인 경우 조사 없이 파직하고, 산인(散人, 이해관계가 없는 자연인)은 출입이유를 확인한 후 판단하라.”고 명했다.

  • 황희(1363~1452) (이미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분경금지를 강화하자 반발도 만만치 않아 훗날 명재상이 된 황희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1408년 8월 8일 첫 번째 기사는 전 판사(1~3품 관직) 박유손이 지신사(대언사의 정3품 관직) 황희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내용이다. 박유손이 자신을 별시위 패두(지휘관)로 임명해 줄 것을 조온에게 청탁했고, 이를 다시 황희에게 부탁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집으로 찾아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하며 난동을 부린 것. 황희가 사직상소를 냈다. “신은 주상을 가까이 모시는 자리여서 늘 주의하였지만, 지금 유손에게 욕을 당하였으니 물러나겠습니다.” 이에 임금은 황희는 즉시 복귀, 조온은 공신이어서 사면, 박유손은 남포 귀양에 처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1470년 경국대전 형전 편에 분경금지법이 신설되었다. 이 법의 적용대상은 이조와 병조의 관리, 무관은 당상관급(정3품) 이상, 승지,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로 이들의 집에는 성이 같으면 8촌까지, 성이 다르면 6촌까지 출입을 할 수 있었다. 이외에는 출입이 불가피함을 증명하지 못하면 곤장 100대와 3,000리 유배에 처하도록 했다.

이처럼 초강력 법안이 시행되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한명회와 신숙주가 가장 먼저 반발했다. 실록 1470년 1월 11일 기사인데, 상당군 한명회가 “금령이 지나치게 엄중하여 비록 친한 관계라도 서로 교제할 수 없으니 태평성대와 맞지 않다.”고 아뢰었고, 신숙주는 “집에서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니 신 등은 매우 편리하지만, 동맹국의 사람들도 과종(過從, 사이좋게 지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니 지금과 같아서는 안된다.”며 완화를 건의했다.

5일 만에 적용대상이 대폭 완화되었다. 16일 세 번째 기사는 폐해가 있어 법을 완화한다는 내용이다. “본디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분경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것이지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의 출입까지 막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본뜻이 아니니 이조와 병조는 당상관, 무관은 도총부의 당상관과 위장 이상, 승지는 이방과 병방의 승지만 출입을 금하고, 형량은 그대로 유지하라.”

그 이후로도 양형기준은 변하지 않았는데, 현실성이 없어서인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25일 기사는 이 법이 시행된 이후 첫 판결이다. 이날 사헌부는 도승지 이극중을 찾아가 분경을 하다 적발된 행사정(行司正, 정7품 무관직) 조지를 장100대와 유배 3,000리에 처해야 한다고 구형했으나, 임금은 직첩만 거두라고 명했다.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의 경우도 이 법의 실효성을 의심하게 한다. 1471년 6월 5일 기사는 지평 김이정이 자신의 집에서 술대접을 한 홍윤성을 분경금지법 위반으로 고발한 내용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홍윤성이 곧바로 입시해 변명했다. “신이 이질을 앓아 치료 삼아 소주를 항상 복용하는데, 마침 그때 이수남이 오는 바람에 혼자 마실 수가 없어 두어 잔 권했습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했다. “병환 때문에 소주를 복용 중에 수남이 왔으니 어떻게 권하지 않을 수 있었겠소.” 홍윤성은 넙죽 큰 절을 하고 물러갔다.

가끔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가장 앞선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이 그럴 뿐, 역사 이래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흔하지 않다. 사헌부 아전이 집 앞을 지키고, 3,000리 유배를 보내도 고위관료들의 비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사림들의 지지가 있어 사헌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한창 논의 중인 공수처도 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두려워하고, 신뢰받을 때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