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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과 분단
조국의 광복에 환호하는 국민들, 공보처,
(1945)한민족에게 암담하기만 하였던 주권 회복에 대한 꿈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전후처리를 위한 카이로선언(1943. 12. 1.), 그리고 이를 재확인한 포츠담선언(1945. 7. 26.) 등으로 그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게 되자,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새 역사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표면화하기 시작한 미·소간의 견해 차이는 한국 문제에 예기치 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즉 1945년 추축국이 무너지자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힘의 공백상태가 생겨났고, 독일과 일본의 통치로부터 독립된 국가들은 미·소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지역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와 같은 불행의 요인은 얄타회담(1945. 2. 11.)에서부터 일찍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9일,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하여 신속히 남하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음 날인 8월 10일, 일본은 연합국 측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소련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인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전혀 내포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측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겨냥한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8월 13일 청진에, 22일 평양에 각각 도달하였으며 8월 말에는 이미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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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소 군정과 남·북한 분단
미·소 군정의 실시소련이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내세워 수립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소속위원들 모습, 공보처,
(1946)노획문서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0)소련은 1945년 8월 28일 북한지역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어 경의선, 경원선을 비롯한 주요 남행 간선철도를 모두 폐쇄하고, 38도선 이남지역으로의 교통 통신을 제한 내지는 봉쇄한 다음, 북한 전역의 공산화를 위한 제도개혁에 착수하였다. 10월 14일에는 김일성을 등장시키고, 이듬해 2월 8일에는 이른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에 반하여 미국은 38도선을 설정하여 소련군의 남진한계선을 정하기는 했으나, 당시 미군의 진주가 늦어짐에 따라 과도기적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뒤늦게, 9월 4일에야 하지(John R. Hodge) 중장 휘하의 미 제24군단 선견부대가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9월 7일에는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남한에 대한 군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정책준비 없이 출범한 미 군정은 시초부터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모스크바 회담(1945년 12월)에서 논의된 한국문제, 영국 국가기록원(The National Archives),
(1950)신탁통치 반대 시위모습, 공보처,
(1945)이렇듯 국토분단과 미‧소의 상반된 점령정책으로 남북 간의 이질현상이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 모스크바 3상회의(1945. 12. 26.)가 개최되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문제와 함께 일찍이 카이로선언 때 이미 미‧영 양국 수뇌들간에 거론되었던 한국의 신탁통치협정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남한에 전파되자, 이를 반대하는 범국민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민들의 신탁통치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협정에 의거하여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그 첫 회의(1946. 3. 20.)와 두 번째의 회의(1947. 5. 21.)를 서울에서 개최하였으나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남·북한 정부의 수립국제연합총회 결의 112호, 유엔(United Nations),
(1947.11.1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미국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는, 소련을 위시한 공산 진영 회원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를 규정한 미국의 제안이 절대다수로 채택되었다. 이것이 한국 문제에 관한 유엔의 “통한결의(統韓決議)”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전경, 공보처,
(1948)이와 같은 유엔의 통한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으나, 북한은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소련은 유엔 한국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마저도 거부하였다. 이리하여 1948년 5월 31일 남한에서는 제헌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공포된 데 이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한편 소련은 유엔 총회의 결의와 감시 아래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1948년 9월 9일 평양에서 이른바 김일성 체제하의 북한정권을 수립하여 그들의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유엔 총회의 결정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미·소 양대 세력이 상충하는 양극화된 국제 분쟁지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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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소의 한반도 정책과 남·북한 정세
소련의 적극적 북한 지원북한 대표단의 모스크바 방문, 러시아 사회정치사기록보존소(Российский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Архив Социально-Политической Истории), (1947)소련의 북한 진주는 시초부터 한반도에서 당분간 남북한의 분단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선 38도선 이북에 장차 한반도의 적화통일과 남진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강력한 군사기지를 확보하고, 시기가 성숙할 때까지 전력을 비축하려는 공산기지화 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과 10월 중국 대륙의 공산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진영의 한반도를 둘러싼 극동지역의 역학관계에 일대 전기를 맞게 하였다. 소련의 핵 실험 성공과 중국 공산정권의 등장으로 공산세력은 극동에서 새로운 팽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에서 미‧소 대립이라는 냉전체제에서 소련의 지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와 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정권 수립 이후 북한군의 근대화 및 전력보강 작업에 착수하였던 소련의 스탈린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고 북한군의 전력 증강을 구체화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50년 4월 또다시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남침계획을 공모하였다.
미국의 소극적 한국 지원미군 철퇴에 관하여, 국무총리비서실, (1949)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중국 대륙에서의 국공 내전사태를 계기로, 미국이 한국 문제와 더불어 동북아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을 재검토하면서부터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종전 후 급속한 감군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지상병력이 부족하게 된 미국은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미군 철수(1949년 6월) 후 날로 심화되어 가는 남·북한간의 군사적인 불균형과 북한의 남침 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오히려 남한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국군의 증강과 군사원조에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미국은 소련이나 북한이 남한의 내부적인 혼란을 틈타 간접적으로 침투나 교란활동은 벌일 수 있을 것이나, 전면적인 무력침공은 일으키지 못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은 중국 문제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계속 견지하면서 일본 열도를 미국의 전략적 방위선으로 하여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것은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에 의한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선언에 의하여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남·북한 국내 정세국군월북도주 및 개성사태에 관한 건(제46회), 총무처,
(1949)남‧북한의 정세는 여러 측면에서 상호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북한은 정권 수립 후부터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한반도의 적화통일 사상을 주입시켜 전쟁을 준비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북한은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여 비교적 튼튼한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생산력을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1949년 총동원령을 내려 인력 및 물자동원 등으로 총동원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남한은 미국이 현실을 외면한 채 민주주의의 이상만을 내세워 정책을 추진한 결과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사회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화폐 발행고가 불과 2년여 만에 7배로 증가하고 산업 분야도 크게 위축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물가는 3년 동안 무려 33배나 폭등하여 국민들의 생활고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와 같이 남‧북한 간에 정치와 경제면에서 격심한 이질성과 격차를 나타내고 있는 가운데, 1948년 말경부터 북한은 군사력 증강작업에 착수하였으며 이때부터 북한은 소련제 전차와 기계화 부대를 중점적으로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1949년 초부터 수시로 38도선 일대 국군의 경계 진지를 공격하여 탐색전을 벌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