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개입과 유엔군 재반격 (1950.10.19 ~ 1951.7.9)
전쟁의 시작 (1950.6.25 ~ 1950.7.4)
유엔의 지원과 전쟁의 확대 (1950.7.5 ~ 1950.10.18)
중공군 개입과 유엔군 재반격 (1950.10.19 ~ 1951.7.9)
정전을 위한 노력 (1951.7.10 ~ 1953.7.27)
  •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 공보처
    (1950)
    1950년 10월 국군 평양입성 환영대회 전경, 공보처
    (1950)

    중국은 유엔군의 38도선 북상을 확인한 직후 몇 차례 소련 및 북한과 논의한 후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爲國)이라는 목표로 최종 참전을 결정하였다. 가장 먼저 1950년 10월 19일 팽덕회 지휘하의 제13병단 20만여 명의 병력이 압록강 3개 지점을 거쳐 입북하였다. 이제 6·25전쟁은 북한군·중공군 대 국군·유엔군의 전쟁으로 바뀌었고 전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당시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군사지원 등을 고려하면 전쟁의 상황은 냉전구조 하의 공산진영 대 자유진영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6사단 7연대 한 병사가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는 모습, 공보처
    (1950)
    제6사단 작전 경과요도, 국방부,
    (1950)

    중공군은 10월 25일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1차 공세(1950. 10. 25.~11. 7.)를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대부대를 투입하여 유엔군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하여 은밀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제6사단 선두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였고 서부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일반동포에게, 대통령비서실
    (1950)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과 불의의 조우로 인하여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았으나, 이때 갑자기 중공군이 공격을 멈추고 청천강 북쪽으로 이동하여 자취를 감췄다. 중공군이 기만전술과 유인전술을 운용한 것이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전황을 오판하여 중공군의 참전목적과 작전의도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제8군의 재공격 준비가 완료되자 ‘11.24 최종공세’(일명 크리스마스공세)를 명령하였다. 이때 전선의 상황은 12개국의 유엔군이 참전 중이었고 정주-영원-장진호-혜산진-합수-청진선을 점령하여 한·만 국경선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이번에도 중공군의 2차 공세(1950. 11. 25.~12. 3.)에 맞부딪쳐 큰 손실을 입었으며 모든 부대가 무질서하게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비로소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반격을 개시한 지 71일 만에 철수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에 철수를 거듭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여 12월 말 38선 부근으로까지 철수하였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부득이 흥남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조국을 지키자 어서 밀고 올라가자, 대통령비서실
    (1951)

    공산군은 몇 차례의 내부적인 갈등을 겪은 후 3차 공세(1950. 12. 31.~1951. 1. 8.)를 개시하여 38선을 돌파하였다. 사령관 팽덕회는 주력 부대를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보조 부대를 춘천-원주 방향으로 향하게 하여 총공격을 가하였다. 결국 유엔군은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선까지 철수를 결정하였다.

    1951년 1월 1·4후퇴 당시 대동강 철교위를 건너 남하하는 평양시민들, 공보처,
    (1950)

    1·4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아군은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찾았으나, 중공군의 연속적인 공세에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중공군의 몇 차례 공세를 계기로 한국 국민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엄숙한 현실을 직시하고 모두가 스스로 들고 일어나 힘을 보태려고 했으며, 정부는 100만 청년을 무장시켜 중공군을 격퇴시키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보급로 신장을 유도하고 우세한 화력으로 중공군 전력을 약화시키며 반격작전을 준비하였고, 중공군의 공세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파악하고 1951년 1월 25일 일제히 반격작전에 나섰다.

    38선 돌파에 관한 지령, 대통령비서실,
    (1951)

    중공군은 그 후에 4차, 5차 공세를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반격 직후 4차 공세(1951. 1. 27.-4. 21.)를 단행하여 지평리, 원주 일대에서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유엔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하였고,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3월 말 38선을 회복하였다.

    중공군이 있는 문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유엔군,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1954)
    유엔군의 화력공격으로 중공군력의 약화, 국립영화제작소,
    (1980)

    곧이어 이어진 중공군의 5차 공세(1951. 4. 22.-6. 10.)는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최대 병력과 소련으로부터 지원된 최대 규모의 장비를 투입한 마지막 공세였다. 이들은 4월에 서부전선의 문산-김화 방면에, 5월에 동부전선의 양구-인제 방면에 각각 전력을 집중시켜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는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당하여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저지되었으며,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6월 15일 문산-철원-김화-화천-간성을 잇는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때 유엔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반격을 중단한 것은 전전의 원상복구 상황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미국의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다.

    한편 이 무렵 중공군은 공격개시 직후 한계점이 노출되었고, 미국 역시 내부적으로 정전 압박을 받아 새로운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엔군측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에서 밀리게 되자 1950년 말경부터 내부적으로 정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유엔은 5단계 정전 방안 등 여러 가지 중재안을 제시하였지만, 번번이 공산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 어느 쪽에서나 위험한 반격보다는 안정적인 봉쇄나 현상유지 정책이 타협안으로써 힘을 얻고 있었다.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위험이 커지자 영국을 비롯한 참전국들 사이에서 전쟁 이전의 원상회복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휴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