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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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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단계별 개관 > 제4단계(1951. 7. 10. ~ 1953. 7. 27.)

제4단계(1951. 7. 10. ~1953. 7. 27.)

(문서)정전설에 관한 중대 성명(1951), AA0000653(0001)

정전설에 관한 중대 성명(1951), AA0000653(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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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과 조·중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협상에 의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중공군의 5차공세가 종료될 무렵인 1951년 6월 3일 조지 케난이 휴전을 위한 미·소 회담의 개최를 제의하였고, 6월 23일 조·중연합군측이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를 통해 호응함으로써 정전회담 개최에 합의하게 되었다.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정치적 타협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양측은 최초 휴전회담에서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를 비롯하여 휴전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협정, 전쟁포로, 양측 관계 정부에 대한 권고사항 등 4개 의제를 토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였고 매 의제마다 장기간 설전을 벌였다.

그 주된 이유는 중공군측이 협상을 이용하여 손실을 보충하여 군사적 우위를 회복하려 하였고, 또 무엇보다 스탈린이 줄곧 정전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담과 작전의 양면에서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길고도 지루한 교착상태가 계속되었다.

(문서)한국전란에 대한 정전협상 반대결의 통고의 건(1951),  BA0587725(139-1)

한국전란에 대한 정전협상 반대결의 통고의 건(1951), BA0587725(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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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개성 중립지대 설치 반대에 관한 결의 이송의 건(1951),  BA0135095(93-1)

개성 중립지대 설치 반대에 관한 결의 이송의 건(1951), BA013509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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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별도의 협의가 없는 한 군사작전은 계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회담 기간 중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관련 하에 전개되었다. 이때부터 전투는 국지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심리적인 주도권 쟁탈을 위한 소모적인 전투만을 반복하기에 이르렀으며, 전선의 상황은 38선을 연한 주요 고지를 둘러싸고 양측이 오르고 내림을 반복하는 상태였으므로, 대규모 공격과 철수작전은 없었다.

(사진)학생 4주년 휴전없는 북진통일 궐기대회 모습(1953), CET0042624(2-1)

학생 4주년 휴전없는 북진통일 궐기대회 모습(1953), CET00426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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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일선시찰 보고(1951), BA0135106(3-1)

일선시찰보고(1951), BA01351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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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선의 병력들은 한 눈으로는 회담장을 주시하고 또 다른 한 눈은 전방을 주시하면서 전투를 수행하는 특이한 양상을 되풀이 하였다. 그야말로 휴전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 여간 지속되었다.

(사진)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장 밖의 휴전협정 취재보도진 모습(1953), CET0048202(1-1)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장 밖의 휴전협정 취재보도진 모습(1953), CET0048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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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휴전협정원문(1953), CA0005972(1-1)

휴전협정원문(1953), CA000597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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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고지쟁탈전을 수행하였다. 주요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과 비용손실을 내었다.

한편 휴전회담에서 가장 큰 난제로 부각된 의제는 포로문제였다.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은 강제송환을 각각 주장함에 따라 협상은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접어들었다. 1953년 1월에 이르러 미국의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전주장을 일축하고 공산군에 정치·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휴전에 임하도록 압박하였다. 이 즈음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다.

그동안 휴전을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포로 2만 6천명을 석방시킴으로써 회담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며, 팽덕회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휴전회담 이후 가장 강력한 공격작전인 ‘7.13 공세’를 취함으로써 한때 위기국면을 맞기도 하였다. 이 대통령은 미국과 심각한 정치적 대립을 겪었고 ‘이승만 제거계획’이라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휴전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원조, 그리고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 내었다.

결과적으로 6.25전쟁은 발발된 지 3년 1개월만인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 측의 미군 대표가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때 한국정부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