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한국군을 도와 북한군을 격퇴하고 한반도의 안전과 국제평화를 유지한다고 결의하였고, 그 집단안전보장조치에 따라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미군 제24사단 선두부대인 스미스부대가 도착하여 1950년 7월 4일 최초로 평택-제천-울진을 잇는 선에서 무질서하게 철수하고 있는 한국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유엔군사령관의 단일지휘 하에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한 공동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에 비추어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한국군은 법적으로는 유엔군이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엔군의 일원처럼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제 전쟁은 북한군 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새로운 성격의 전쟁으로 변모되었다.
국군 통수권 이양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각서 및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의 회한(1950), CA0000004(1-1)
미 제5해병대 낙동강에 진군(1950), CET0048224(1-1)
한국유엔위원단 공개회의에서 치사(1950), AA0000592(0001)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모습(1950), CET0047917(1-1)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면서 전력을 회복하여 반격한다는 전략방침을 정하였다. 유엔군은 한강 방어선에서부터 낙동강 방어선까지 미군과 유엔군의 증원을 기대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하여 공간을 양보’하는 이른바 지연전을 수행하였고, 이어 부산교두보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사활을 건 방어전투를 치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북한군의 공세를 방어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쟁취하였다. 이 시기에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의 해·공군과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의 해군이 한국 작전지역에 도착하였고 미 지상군도 3개 사단 2개 연대 규모로 증강되었다.
북한군은 최초 속전속결로 남한을 공산통일한다는 전쟁목표를 수립하였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상대적인 전력의 우위를 상실하였고, 병력과 물자 등 전쟁지원이 적절히 뒤따르지 못하여 공격역량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기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두어 소위 ‘민주개혁’을 강제하고 주민들을 전시 동원체제 하에 편입시켰다.
북한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점차 공격력이 무디어졌으며, 또 밤낮으로 계속되는 전투로 피해가 가중되고 있었다. 이처럼 북한군이 공세 한계점을 보이고 있을 무렵인 1950년 8월 4일 소련이 갑자기 외국군 철수를 골자로 한 정전안을 제의했다. 원래 유엔안보리에 불참했던 소련은 8월 1일 의장직을 수행하게 되자 유엔에 복귀하였고, 또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대표들을 유엔에 초청하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정전 제의에 대해 영국과 인도는 대체로 호의적이었으나, 미국이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를 정책목표로 채택함으로써 무산되었다.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말, 전쟁발발 97일 만에 실지를 되찾고 전쟁 전 현상을 회복하였다.
유엔군은 성공적인 우회기동으로 북한군의 전선을 단숨에 절단하였으며, 뒤이어 실시한 돌파와 반격 및 추격 작전은 전사(戰史)상 가히 경이적이라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때 북한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채 북으로 퇴각하였으며 일부의 패잔병들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으로 잠입하여 게릴라가 되었다.
한국군이 38도선에 도달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한국군 통수계통으로 38도선 북진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는 "38도선은 이미 북한군의 남침 시 허물어졌으므로 북진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으며 이 기회에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미국 정부도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한 38도선 북쪽에서의 군사작전은 ‘6.28 유엔결의’에 비추어 적법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엔군 계통으로 북진작전에 관한 훈령을 하달하였고 또 군사적 점령 후에 예상되는 정치적 통일을 위하여 ‘10. 7 통한결의’를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공산국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은 “유엔군이 북진하면 자신들도 전쟁에 개입하겠다”고 경고하였으며, 소련은 미국의 결의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즉각적인 휴전 및 외국군의 철수를 제안하였다. 소련의 제안은 10월 7일 소련외상 비신스키가 유엔군의 북진을 다소 지연시키려고 의도한 것이었으므로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결국 10월 1일 한국군 제3사단이 먼저 38선을 넘어 진격하고 이어 유엔군의 북진작전이 시작되었다. 북진작전은 중국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판단 없이 우발적인 계획 하에 전개되었던 것이다. 북진작전으로 북한군에 점령되었던 지역들은 모두 회복되었으나, 부역자 처리문제를 놓고 내부갈등을 겪었다.
북한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청천강선으로 진출하였다. 유엔군은 북한군의 저항이 거의 없는 상태가 지속되자, 평양과 원산을 연결한다는 최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계속 북진하라는 지시로 전환하였다.
한편 한국정부와 유엔군은 북한의 점령지역에서 우익조직을 지원하여 부흥시키는 한편 다소간의 갈등 속에서 한반도 통일 방안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김일성은 전쟁지도부를 강계로 옮기고 청천강, 희천, 강계에 3중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유격전으로써 최후까지 저항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10월 24일 청천강을 확보한 유엔군은 한·만 국경선을 향한 총 공세를 폈다.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부근에서는 한국군만을 운용해야 한다는 제한 사항마저 제거하고 모든 부대로 하여금 압록강, 두만강으로 진군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이 혜산진과 청진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대거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