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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참전의 의의와 교훈

유엔군 참전의 의의

유엔의 지원결의에 따라 유엔 21개국은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들은 미군의 작전통제하에 낙동강과 압록강을 오르내리면서 전쟁을 주도하였다.

(사진)소련이 1946년 2월 8일에 김일성을 내세워 수립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소속위원들 기념촬영(1946), CET0042599(1-1)

대한민국과 UN국제아동긴급 원호재단과의 원조협정 비준에 관한 건(1951), AA000384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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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번 전쟁을 기회로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자(1950), AA0000595(0001)

이번 전쟁을 기회로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자(1950), AA0000595(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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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한 사상 최초의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는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의 ‘집단 안전보장 원칙’을 점검하는 시금석이 됐다. 당시 참전국은 총 21개국에 달했는데,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하고 5개 국가가 의료지원단을 보내왔다. 그리고 40여 개국이 물자를 지원했다.

이들의 참전 의의는 회원국들이 파견한 병력의 규모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평화의 파괴자'에 맞서 국제기구의 집단적 행동으로 평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의 전화가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와 자유의 위협에 대해 세계는 '유엔헌장에 입각해 이를 집단행동으로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엔군은 한반도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참전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국을 돕고, 나아가 공산침략을 격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유엔의 지원결의에 따라 많은 국가들이 유엔의 깃발 아래 결속됐다.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전 세계 자유민들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하는 데 좋은 교훈이 됐다.

한편 한국은 전쟁으로 국민들의 생활터전과 사회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해졌으나 유엔의 지원으로 생활안정과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행정기구가 마비된 탓에 이재민 구호정책은 전적으로 유엔군사령부에 의존하게 됐다. 유엔군 예하의 유엔민사원조사령부는 원조물자의 도입은 물론 피난민 구호사업, 의료시설 지원, 교육시설 지원 등을 담당했다.

유엔군 참전의 교훈

(문서)UN군인 위로방식에 관한 건(1951), AA0000345(0001)

UN군인 위로방식에 관한 건(1951), AA0000345(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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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제외한 유엔 참전국들은 그 병력 규모 면에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훈련이 잘된 군대는 규모가 작아도 고도의 응집력과 자부심, 숙련된 전투기술로 전체 작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유엔군은 현지민의 언어·역사·문화·풍습 등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경험했으며, 언어상의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통역장교를 운용했지만 지휘통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국적군으로 형성된 유엔군에게는 국가들마다 다른 풍속과 전통도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 중 하나였다. 종교적인 차이는 물론 식성마저 달라 보급 문제, 특히 급양(級養)에 있어서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당시 회교국인 터키의 장병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힌두교국인 인도의 장병들은 쇠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벨기에·네델란드 군인들은 빵과 감자를 좋아했으며, 태국군은 쌀과 매운 고추장의 보급을 원했다.

유엔 참전 16개국 군대는 서로 다른 문화적·역사적 경험, 식생활 습관, 종교적 금기 등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 혹은 유럽식의 기준에 의한 식품공급, 병영 내 문화시설 등은 비 유럽국가 군대 장병들의 불만을 샀으나 이러한 문제들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점차 해소돼 갔으며,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조치들도 서서히 이루어졌다.

이들 국가의 군대들은 자국의 사정이나 한국까지의 이동거리 등으로 부대 운용에 어려움이 따랐다. 사실 전투부대를 파견한 16개국과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5개국의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을 하나의 효과적인 전투력으로 결합시켜 연합작전을 수행케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의 지형이 산악지대가 많고, 또 겨울에는 몹시 추워서 일부 유엔군 부대들은 현지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 부대 중 터키와 그리스군은 한국의 기후와 지형에 비교적 빨리 적응했으나 태국·인도처럼 평지와 더운 지방에서 온 유엔 회원국 장병들은 기후와 산악지형에 익숙해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 땅에서 피를 흘리며 자유를 수호했다. 각국 전몰 장병의 희생, 그리고 이들이 남긴 수많은 전공과 그 속에 숨은 교훈은 우리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