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이야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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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분식 이행실태

(문서)서울특별시혼.분식실천강화협의회설치조례(1975), BA0083998(4-1)

서울특별시혼.분식실천강화협의회설치조례(1975), BA008399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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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수출 지향적 공업화에 저임금 정책을 기반으로 경제 성장을 꾀했다. 경제 성장, 즉 수출 향상을 위한 ‘노동자 저임금 정책 → 노동자·농민들이 먹고 살게 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과 양곡 수입 → 농촌의 파탄과 이농 현상 → 더 많이 늘어난 중화학공업 노동자’ 현상이 가속화 되면서 이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분식 장려, 혼분식 장려 정책이 추진되었다.

당시 미국은 잉여농산물 처리로 고심하고 있었으며, 농산물 수출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안이었다.

실제 미국의 농산물은 수출 산업에 중요한 상품이었으며, 농산물 수출은 미국 농민의 소득향상과 국제수지개선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이에 미국은 시장 개척을 위해 처음에는 원조라는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농산물을 수출하였다.

저곡가 정책과 함께 미국의 원조가 맞물리면서 우리나라에는 많은 미국산 양곡이 들어왔다. 이로써 보다 싸게 곡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량의 밀가루가 수입된다고 해서 그간 밥맛에 길들여져 온 우리 국민들의 입맛이 금방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밀 소비를 촉진시키는 이른바 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62년 가을, 추곡 생산 600만 석 감산이라는 대흉작이 기록되면서 쌀값이 한 때 가마당 1961년 대비 400%나 상승한 5000원 선까지 솟구쳤다.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제3공화국 출범을 눈앞에 둔 군정으로서는 쌀값 안정을 통한 물가 잡기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2년 11월, 정부는 ‘혼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진)식품혼용으로 쌀의 결점을 보완하고 균형있는 식습관으로 개선(28)(1981), CER0000042

식품혼용으로 쌀의 결점을 보완하고 균형있는 식습관으로 개선(28)(1981), CER000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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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요 내용은 미곡 판매업자는 잡곡을 2할의 비율로 섞어서 팔고, 음식점에서도 2할 이상 잡곡을 섞는 혼식을 시행하며, 학교나 관공서의 구내식당에서는 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 가정에서도 잡곡을 섞어 먹도록 적극 권장한다는 것 등이었다.

1963년에 여름 농산물 흉작까지 겹치자 정부는 외국 곡식의 도입량을 급격히 확대하는 한편, 분식장려운동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였다. 7월 들어 정부는 점심시간에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하고, 7월 11일을 첫 ‘무주일’로 정하여 술의 판매마저 금지하였다.

이러한 혼분식 장려 운동으로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 등을 실시하여 이를 지키지 못한 학생들은 혼줄이 날 정도였다. 70년대 초기에는 학생들의 도시락에 30% 이상의 혼식이 되어 있지 않으면 도시락을 먹지 못하게 하였다.

(사진)도시지역은 혼분식을 3대시민운동의 하나로 추진해도 도시지역의 각 가정에 파급효과 유도(44)(1981), CER0000042

도시지역은 혼분식을 3대시민운동의 하나로 추진해도 도시지역의 각 가정에 파급효과 유도(44)(1981), CER000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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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도 혼식을 실천해야 했다. 특히 ‘분식의 날(무주일)’을 정하여 일반 식당에서는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분식만을 팔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식 장려 운동에 따라 밀가루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라면·빵·과자 등의 분식이 많이 생겨났다.

60년대부터 강요되던 혼식과 분식 장려는 통일벼 개발 등에 힘입어 1977년에 들어서 쌀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뒷걸음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0년대에도 여전히 혼분식은 장려되었으며, 학교에서의 도시락 검사도 계속되었다. 다만, 그동안의 경제 성장에 힘입어 80년대 중반 이후 먹는 행위는 단순한 끼니 해결의 차원을 넘어 ‘문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특히 경제 발전과 더불어 쌀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더 많아 재고량이 증가하고,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쌀 수입을 계속 해야만 하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이제는 오히려 쌀 소비를 권장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혼분식이 유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건강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혼분식으로서 60·70년대처럼 정부가 강요한 혼분식과는 그 성격이나 질이 다르다.

* 출처
국가기록원·국립공주대학교, 기록이 있는 역사교실 제2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