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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고개'를 넘어 증산의꿈을 이루다!'

1960년대

  •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UN식량계획기구협조 낙동강 유역 간척공사 서명식 참석(1964), CET0043807(2-1)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UN식량계획기구협조
    낙동강 유역 간척공사
    서명식 참석(1964),
    CET0043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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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대통령식량증산 연찬회참석1(1964), CET0043796(2-1)

    박정희대통령식량증산
    연찬회참석1
    (1964), CET004379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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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대통령 식량증산 대책회의참석3(1964), CET0043806(3-1)

    박정희대통령 식량증산
    대책회의참석3
    (1964), CET00438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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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량증산7개년계획(1964), CEN0000394(3) 재생

    식량증산7개년계획
    (1964), CEN0000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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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예준 경제기획원 차관 WFP(세계식량계획) 조인식2(1969), CET0067864(3-1)

    장예준 경제기획원 차관
    WFP(세계식량계획)
    조인식2(1969),
    CET006786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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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토지개량조합장대회 및 미곡 증산격려회 포상식2(1965), CET0033046(2-1)

    전국토지개량조합장대회
    및 미곡 증산격려회
    포상식2(1965),
    CET00330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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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도 식량사정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보릿고개가 연례적으로 반복되어 식량확보가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다. 그동안의 증산계획은 농업생산기반의 열악, 투자 재원부족, 비료·농약·농기계 등 영농자재산업의 후진성으로 인하여 의욕만큼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1950년의 농지개혁을 통해 전 농가의 90% 이상이 자작농으로 전환하였지만, 농업생산은 증가하지 않고,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대량으로 도입됨에 따라 농산물가격이 낮게 유지됨으로써 1960년대 농가경제는 적자를 면치 못하였으며, 봄철이면 식량이 모자라는 농가도 많았다.

1962년에 시작된 최초의 종합경제개발계획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업부문의 주요 목표를 농업증산과 생산과정의 근대화에 두었다. 구체적으로는 식량자급을 위한 양곡 증산과 공업용․수출용 농산물의 증산을 목표로 하였다.

식량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제3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1962~1966년)과 이를 수정한 식량증산 7개년계획(1965~1971년)을 수립하였으며, 주요 시책으로는 농지확대를 위한 개간·간척사업과 생산기반정비를 위한 경지정리·관배수 사업, 농업생산성 증대를 위한 연구·지도·보급 사업 등을 실시하였다. 그 밖에 농업구조 개선정책으로 1962년 6월에 농업구조정책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시범 협업농장을 개설하였으며, 1965년 2월에 자립·안정 농가 조성사업을 실시한데 이어 1967년 1월에는 농업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제3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은 곡류·원예작물·특용작물 등 3개 부문으로 구분하여 수립하였으나 주요 목표는 양곡의 증산이었다. 이를 위한 정책수단으로 농지의 확장과 단위면적당 생산력 제고 등을 채택하였다. 목포 및 영산강·섬진강·동진강 유역의 간척사업과 전국에 걸친 개간사업을 통하여 계획기간 중에 12만정보의 농경지를 확장하고, 미완공 수리사업의 완성, 종자 갱신, 비배관리(肥培管理)의 개선, 병충해 방제의 철저, 농사시험 및 지도사업의 강화, 영농방식의 합리화 등을 통해 단위면적당 생산성을 제고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62년 벼농사의 흉작으로 식량사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곡물가격은 크게 올랐다. 그 후 외국곡물의 도입이 지연되고, 1963년 하곡마저 대흉작이 되자 곡물가격은 유례없이 폭등하였고, 1962년도 90.3%였던 식량자급률은 1963년에는 70.9%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3차 증산계획 기간 동안에 1962년 미곡의 대흉작, 1963년 하곡의 흉작 등 연도별로 기복이 있기는 했지만, 식량작물의 생산은 전체적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모든 식량작물의 식부면적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식량 자급이라는 정책목표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한해와 병충해 등으로 인한 흉작 때문이었지만, 그 외에도 농업부문에 대한 투자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데다 증산정책이 생산과정에 편중되고 농산물 가격 및 유통조직의 개선 등을 소홀히 함으로써 농민들의 증산의욕을 유발하지 못하였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식량수급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1964년 정부는 5~7년 이내에 식량을 자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장기 식량증산계획을 다시 수립하였다. 제3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64년 1월 8일 식량증산과 자급자족을 위한 장·단기계획을 수립하라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1964년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1965~1971년)을 확정․발표하였다. 7개년계획에서는 식량의 자급자족을 지상목표로 설정하여 계획기간 중 식량생산을 연평균 6.2%씩 증가시킴으로써 1968년까지는 식량을 자급하고 1969년부터는 잉여 양곡을 수출하도록 계획하였다.

식량증산 7개년계획은 먼저 ‘①식량의 소비패턴에 큰 변화가 없으며, ②인구증가율은 2.88%에서 2.31% 수준으로 저하할 것이고, ③공업원료와 사료수요는 증가할 것이며, ④미국 잉여 농산물의 도입의존도는 점차 줄어들고, ⑤농업생산조건에는 급격한 변화가 없을 것이며, ⑥기타 산업과의 관련에서 볼 때 농업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6가지 가정을 세우고, 그러한 가정하에 기준연도의 식량작물 31,680,000석을 목표연도인 1971년에는 48,510,000석까지 생산하는 등 7년간 53%를 증수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증산계획을 곡류별로 보면 쌀 29.7%, 맥류 43.1%, 두류 53.4%, 서류 85.2%, 잡곡 39.8%의 증산을 목표로 하였다. 보리는 일제 말에 100만ha까지 재배되다가 급속히 줄어든 후, 1960년대의 보리증산 시책에 힘입어 1965년 83만ha까지 늘었고 이후 10여년간 70만 ha선을 유지할 만큼 꾸준히 생산량을 유지하였다.

연도별 식량생산계획(1965~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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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 석, %)

연도 생산량 증수률 연도 생산량 증수률
기준연도 31,680 - 1968 42,171 33
1965 35,909 13 1969 44,388 40
1966 37,724 19 1979 46,505 47
1967 39,398 24 1971 48,510 53

자료 : 농업협동조합중앙회《한국농정이십년사》1965, 153쪽

정부는 이와 같은 식량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①단위생산성 증대(종자갱신, 지력증진, 토지기반정비, 재배기술개선 등), ②기경지의 이용도 제고(작부체계개선, 토지이용도 분류 등), ③경지확장, ④재해대책(병충해 방제, 기상장애 대책, 천수답재해 극복을 위한 직파장려 등), ⑤시책 구현수단 강화(시책추진태세 강화, 생산여건 지원 등) 등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였다.

곡류별 생산계획(1965~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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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 석, %)

곡류별 기준연도 목표연도 증수률
미곡 17,829,565 23,128,749 29.7
맥류 8,130,612 11,637,296 43.1
두류 1,299,696 1,994,257 53.4
서류 3,733,149 10,789,953 85.2
잡곡 686,947 960,019 39.8

자료 : 농업협동조합중앙회《한국농정이십년사》1965, 154쪽

그리고 이와 같은 증산을 위해 토지개량, 개간, 시험사업, 농촌지도 등에 총 305억원을 투융자하고, 이와는 별도로 미국 잉여농산물 무상지원금을 개간에 투자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증산계획이 제대로 추진될 경우 1964년 81.4%인 양곡자급률이 1968년에 완전 자급자족을 이루고, 1969년부터는 수출할 수 있어 외화획득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증산계획은 1967년과 1968년의 극심한 한발로 인한 벼농사의 대흉작으로 난관에 부딪쳤다. 이에 정부는 식량증산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 한해대책을 세우기 위해 지하수 개발을 강력히 추진한 결과 수리안전답률이 1967년의 58%에서 1971년에는 81%로 크게 높아졌다. 정부는 지하수 개발방식의 한계를 인식하고, 1971년부터는 대단위 농업용수 개발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식량증산을 위한 각종 시상금제도가 나왔는데, 벼, 보리, 콩, 고구마, 감자 등 부문에 증산왕을 선발하여 대대적으로 시상을 하는가 하면 이를 홍보하여 증산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퇴비증산왕도 시상제도의 하나이었는데 퇴비란 짚·잡초·낙엽 등을 퇴적하여 부숙시킨 비료를 말한다. 각 농가 마당귀퉁이에 퇴비장을 만들고 가축으로부터 나오는 구비와 풀을 베어다 쌓아놓고 퇴비를 만들도록 했다. 경쟁심을 유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을 앞에 잘 보이는 곳에 공동퇴비장을 만들어 공동으로 퇴비를 생산하게하고 시상제를 실시하였다. 그 당시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퇴비증산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가정마다 총동원되어 퇴비증산을 위한 잡초베기운동을 하였다.

제3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의 착수와 때를 맞추어 정부의 행정․연구조직도 개편 강화하였다. 1961년에는 농림부에 농산과가, 다음해에는 농업생산국이 발족되어 농업증산행정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였다. 농사원을 확대 개편한 농촌진흥청이 1962년에 발족하여 산하에 식량증산분야의 시험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으로 식물환경 연구소, 작물시험장, 호남작물시험장, 영남작물시험장 등을 설치․운영하였다. 또한 각 도에도 1960년대 전반기에 농산과를 설치하였으며 각도 농산물원종장도 1967년을 전후하여 확대 개편하였다.

이러한 식량증산노력에도 불구하고 식량증산 7개년계획의 최종연도인 1971년의 양곡생산은 1966년에 비해 오히려 감소하였다. 제2차 계획기간 동안 양곡의 생산 증가율은 1967년에 -10.0%, 1968년에 -0.5%, 1969년 13.9%, 1970년 -3.3%, 1971년 -2.2% 등으로서, 5년간 양곡 생산 증가율은 -3.5%에 그쳤다. 곡종별로 보면 쌀은 5년간 1.0% 증가했으나, 맥류는 71% 감소, 서류는 6.2% 감소, 잡곡은 2.3% 증가, 두류는 34.8% 증가했다. 정부의 증산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곡 생산 실적이 저조하였던 것은 한발 등 기상조건의 영향도 있지만 식부면적의 감소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 중앙식량대책위원회설치
										(1964), BA0084401(10-1)

    중앙식량대책위원회 설치
    (1964), BA00844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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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촌진흥법 공포의 건
										(1962),DA0000738(1)

    농촌진흥법 공포의 건
    (1962),DA00007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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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량증산계획(1964),BA0138602(44-1)

    식량증산계획
    (1964),BA013860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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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량증산계획(지역계획) (제1164호)(1964),BA0084422(13-1)

    식량증산계획(지역계획)
    (제1164호)(1964),
    BA008442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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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식량계획원조신청서, 농림수산부(1964), BA0134015(4-1)

    세계식량계획원조신청서,
    농림수산부(1964),
    BA01340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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