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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향한 여섯발의 총성 그리고 그후

사건기록 공개의 의미 및 역사적가치

  • ○ 김창룡 암살사건 기록은 사건기록 70여건과 법원의 판결문 7권 그리고 사형집행보고 2건이다. 사건기록에는 암살 당일의 사건발생보고부터 여러 증인들의 진술, 피의자들의 진술조서, 암살당한 현장을 담은 사진까지 다양한 자료들이 들어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김창룡 암살사건 직후 특무대의 수사과정과 김창룡 암살사건의 전모를 볼 수 있다. 이 기록은 다른 무엇보다 사실을 재구성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들이다. 허태영은 처음부터 자신이 김창룡을 죽였음을 인정했으며, 김창룡의 잘못을 부각시켜 김창룡 암살행위가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 ○ 그의 진술을 통해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직후의 육군 지휘부의 현황 및 그 속에서 김창룡의 위치와 특무부대의 활동 등에 대해 접근 할 수 있다. 즉 한국전쟁을 거친 뒤 강화된 김창룡의 위상, 제 임무를 벗어났던 특무대의 활동에 대해 알 수 있다. 다만, 허태영의 주장은 다른 자료들을 통해 증명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당함을 알리는 주장에 그쳤다는 점은 한계이다.
  • ○ 김창룡 암살사건은 1956년 사건발생 직후부터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이 일년 반 동안 거의 매일 보도될 정도로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암살 동기와 배후 등 핵심사항들은 의문에 쌓여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암살사건의 수사과정과 그 결과를 담은 사건기록과 판결문 등이 공개됨으로써 사건의 발생부터 종결까지의 진행경과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그 동안 관심의 대상이었던 배후에 대해서는 이번 기록의 공개로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 ○ 기록에 나타난 사건의 전모는 김창룡이라는 인물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암살사건 발생 이후 열흘이 지나도록 수사당국은 사건의 실마리조차 포착하지 못했다. 특무대가 허태영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감시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2월 10일 이전부터 특무대는 허태영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집에 있었던 신초식과 송용고의 외모가 용의자들과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수사과정에서는 암살의 동기를 김창룡에 대한 허태영 개인의 ‘사원(私怨)’으로 지목하는 수사당국과, 군(軍)과 국민을 위해 행한 ‘애국적 거사’였다고 주장하는 허태영의 진술이 대립했다. 하지만 암살의 배후에 대한 속시원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석연치 않다.
  • ○ 초기 신문과정에서부터 피의자들은 배후에 대해 언급했지만 관련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수사가 종결되고 법원은 허태영과 사건 당일 총을 쏘았던 신초식, 송용고는 물론 지프차를 운전했던 이유회에게까지 사형을 언도했다.
    배후에 대한 수사는 결국 같은 해 11월 황운하(허태영의 부인)의 탄원으로 시작됐다. 수사 결과 암살의 배후로 최종 지목된 강문봉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틀 후 이승만은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하지만 법원의 판결이 가벼워진 것은 암살사건의 최고위층 강문봉에게뿐이었다. 강문봉의 감형 지시가 있던 날 대법원은 ‘행동대장’에 지나지 않았던 신초식과 송용고에게 원심을 뒤엎고 사형을 언도하였다. 또한 허태영은 물론 운전수 이유회에게 언도됐던 사형도 끝내 확정되어, 김창룡 암살사건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들은 모두 사건의 진실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이번 기록물 공개로 김창룡 암살사건의 모든 면면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자료들은 암살사건의 사실 구성을 넘어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 육군의 내부 모습과 김창룡의 위치를 재구성하는데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노영기 (조선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