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 지질연구기관이 지난 8, 9일 중국 베이징에서 지오서밋(GeoSummit)을 열어 백두산 화산을 주요 주제로 다룬데 이어, 12일에는 윤성호 부산대 교수가 백두산 칼데라 외륜산이 높아지고 있다고 밝혀 백두산 화산분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지질연구원과 중국과학원 지질연구소는 지난달 23, 24일 제주도에서 회의를 갖고 백두산 화산폭발에 대비하여 오는 2018년까지 백두산 지하 1만㎦ 이상의 지역에 대해 3D지도를 만들기로 하고, 오는 7월 현지탐사를 시작하기로 하는 등 본격 연구에 착수했다.
또한 한·중 양국은 8, 9일 베이징에서 열린 지오서밋(GeoSummit) 지질재해 세션에서 백두산 화산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한편, 일본지질조사소에도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이처럼 백두산 화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윤성효 부산대 교수는 "백두산 일대에서 한 달에 수십 차례 지진이 있었던 2002년부터 2005년 사이 천지 외륜산이 10㎝ 가량 높아졌다가 2009년부터 점차 침강 중이었는데, 지난해 7월부터 다시 높아져 현재 1㎝ 정도가 상승했으며, 이 일대 온천수의 온도가 69도에서 83도까지 높아졌다"고 밝혔다.
지질학계가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근래 2,000년 동안 지구상에서 있었던 가장 큰 화산폭발인데다, 1백 년 전까지도 화산분화가 주기적으로 있었던 휴화산이기 때문이다.
서기 930년 전후에 있었던 백두산 화산은 마그마로만 보면 이탈리아의 대도시 폼페이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했던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폭발의 50배로, 발해의 멸망 원인을 백두산 폭발에서 찾는 학자들도 많을 정도이다.
백두산 화산은 10세기 초 대폭발 이후에도 100~200년을 주기로 여러 차례 분화한 휴화산으로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지난 2012년 5월 일본 화산전문가 히로미쓰(谷口宏充) 도후쿠(東北)대 명예교수는 한 학술대회에서 "백두산은 14~20세기 6차례의 분화가 있었는데,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후였다"며 "2011년 동일본지진이 발생했으므로 이때의 판(板, Plate) 운동의 영향으로 백두산 화산이 분화할 가능성은 2019년까지 68%, 2032년까지는 99%"라고 밝혔다.
히로미쓰 교수가 한·중·일 문헌에서 찾아낸 6번의 백두산 화산은 1373년, 1597년, 1702년, 1898년, 1903년, 1925년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01, 1403, 1597, 1668, 1702년에 백두산 화산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있다. 이는 히로미쓰 교수의 주장과 상당한 차이가 있고,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다르다. 이처럼 변할 수 없는 과거를 두고도 서로 다른 것은 당시 사람들이 화산을 모른 채 보고 느낀 대로 기록하다보니, 같은 화산분화를 보고도 기술이 서로 다를 수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상현상이나 재이(災異)를 표현한 용어가 수 없이 많은데 그 중에 화산에 관한 표현일 것으로 짐작되는 용어는 탄우(炭雨), 회우(灰雨), 석우(石雨), 모우(毛雨), 비린내 나는 안개라는 의미의 성무(腥霧) 등으로 요약된다.
이들 용어로 검색된 기록 중 보고지역, 화산재가 날아 온 방향 등을 근거로 백두산 화산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을 정리하면 4~6건으로 연구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일치한다.
『태종실록』 1권 1401년 3월 26일 두 번째 기사는 동북면 찰리사(察理使)의 보고서로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 옛 지명인 단주 동북쪽에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것이 하늘을 뒤덮어 어두컴컴하였으며, 숯비(炭雨)가 내려 숯 두어 개를 봉해서 올린다는 내용이다. 같은 해 4월 26일과 7월 23일 기사는 3월 26일에 있었던 변고로 민심이 흉흉하여 수습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태종실록』 5권 1403년 1월 27일 첫 번째 기사와 같은 해 3월 22일 첫 번째 기사도 백두산 화산에 관한 기록으로 생각된다. 1월의 기사는 함경도 갑주군 영괴(寧怪)와 이라(伊羅) 등지에 반쯤 탄 쑥재(蒿灰)가 비처럼 내려서 두께가 한 치(寸)이나 되었는데, 5일 만에 사라졌다는 내용이다. 3월의 기사는 동북면에 재비(灰雨)가 내렸다는 기록으로, 두 기사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백두산 일대이다. 화산재를 고회(蒿灰, 쑥재)와 회우(灰雨, 재비)로 각각 다르게 기록한 것은 관측자의 표현차이로 풀이된다.
『선조실록』 93권 1597년 10월 2일 여섯 번째 기사는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의 보고로 화산폭발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다. 지난 8월 26일 진시에 함경도 삼수군에 지진이 있었고, 27일 미시에 또 지진이 일어나 성의 두 군데가 무너지고 중천(中川)의 물색이 흰색으로 변했다가 황색으로 변했다. 인차외보(堡) 동쪽 5리쯤 되는 곳에서는 붉은 빛의 흙탕물이 솟아오르다 며칠 만에 그쳤다. 또한 26일 같은 시간 소농보(小農堡) 북쪽 절벽에서는 두 차례나 포 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연기가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고 크기가 몇 아름이 되는 바위가 연기를 따라 터져 나와 종적도 없이 큰 산 너머로 날아갔다. 27일 유시에는 지진이 일어나 그 절벽이 다시 무너졌고 해시와 자시에도 지진이 있었다.
종합해 보면 26일 정시에 삼수군 일대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소농보 북쪽 절벽 위에서는 2차례의 화산분화가 있었다. 마그마, 쇄석류, 화산재에 관한 기술은 없지만, 몇 아름이나 되는 바위가 화산가스와 함께 큰 산 너머로 날아갈 정도였고, 다음날까지 여진이 계속된 된 상당한 규모의 화산 분화였다.
1688년에도 백두산 화산분화가 있었다. 『현종실록』 14권 4월 23일 다섯 번째 기사는 경성부와 부령에 재(灰)가 내렸다는 내용이다. 재가 내린 것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어 근거가 다소 미흡하긴 하지만, 10세기 초 백두산 대폭발 시 화산재가 일본으로 날아갔던 방향과 일치하고 2개 군(郡) 이상의 지역에서 관측된 것으로 보아 제법 큰 규모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통 털어 가장 클 것으로 짐작되는 화산분화가 1702년 5월 14일 있었다.
『숙종실록』 36권 5월 20일 두 번째 기사는 함경도 부령부와 경성부에서 보낸 화산분화에 관한 보고이다. 부령부 (富寧府)에서는 이달 14일 오시 천지(天地)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황적색의 불꽃 연기와 같으면서 비린내가 방안에 가득하여 마치 화로 가운데 있는듯하여 사람들이 훈열(熏熱)을 견딜 수가 없었는데, 4경 후에야 사라졌다. 아침이 되어 보니 들판 가득히 재가 내려 있었는데, 흡사 조개껍데기를 태워 놓은 듯했다. 같은 날 해가 저문 조금 후 경성부(鏡城府)에서도 연무(煙霧)의 기운이 서북쪽에서 몰려오더니 천지(天地)가 어두워지고 비린내가 옷에 배어 스며드는 기운이 마치 화로 속에 있는듯하여 사람들이 옷을 벗었으며, 재가 마치 눈처럼 내려 한 치 남짓이나 쌓였는데, 주워보니 나무껍질이 타고 남은 것이었다. 강변(江邊)의 여러 고을에서도 그러하였는데 간혹 특별히 심한 곳도 있었다.
히로미쓰 교수가 주장한 1903년 백두산 화산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청나라 답사보고서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청나라 관리 유건봉은 1908년 3개월여 동안 백두산과 압록·두만강 일대를 답사하고 『장백산강강지략』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때 길 안내를 맡았던 서영순 형제들의 경험담을 통해 광서 29년(서기 1903년) 5월 백두산 천지에서 화산 분화가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날 서 씨의 동생 복순 등 여섯 명이 호수가(天池)에 누워 있는데 밤이 깊어지자 호수 한가운데서 별이 오르내리더니 별안간 폭발소리와 함께 차바퀴만한 불덩이가 떨어지고 수면 위에 불꽃이 낮처럼 환하게 밝았으며 포성과 함께 파도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때 복순이 머리를 돌에 맞아 피가 흘렸으며, 2시간여가 지나자 해가 뜨고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것이다.
서술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닌 것 같다. 1702년에는 백두산 동북쪽에 위치한 함경도 경성부에서도 못 견딜 만큼 열기가 느껴졌는데, 복순 일행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열기나 냄새를 느끼지 못했으며, 날아 온 돌에 머리가 깨진 정도였다. 그들이 느꼈을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기록으로만 보면 거의 100년에 한번 꼴로 백두산의 화산 활동이 있어 온 게 사실이다. 심지어 히로미쓰 교수는 한·중·일 기록을 근거로 2032년까지 백두산 화산이 폭발할 가능성을 99%라고 단언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몇몇의 조짐으로 화산폭발이 임박한 것처럼 확정적으로 예단하거나, 여섯 번의 문헌상 일치를 근거로 99% 운운하는 것은 과학의 기본이 아니며, 지나쳐도 많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한·중 양국의 지질연구기관들이 오는 2018년까지 마그마가 흐르는 지하 10㎞까지 시추공을 뚫어 백두산 일대 3차원 지도를 만든다. 세계 주요 화산 가운데 마그마까지 시추공을 뚫어 감시하는 것은 백두산이 최초이다.
자연현상은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인간영역 밖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두려워만 할 일도 아니다. 화산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인류의 지혜를 모아 미리 예측하고 대응하여 피해를 최소화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