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은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423년이 되는 날이었다. 대부분은 왜적의 침략 일을 임진년(서기 1592년) 4월 13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시의 기록이 모두 음력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으로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592년 5월 23일이다.
특히 관객 1700만 명을 돌파하여 우리나라 영화사를 새로 쓴 영화 '명량'에 이어, 올해는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주요 주역 중에 한사람인 서애 유성룡의 수기를 극화한 KBS 역사드라마 '징비록'이 꾸준히 인기를 더해 가면서 임진왜란이 남긴 교훈과 국난을 맞아 보여 준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KBS 역사드라마 '징비록' 포스터
KBS 역사드라마 '징비록' 13회는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 침공 장면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영도)에서 사냥을 마치고 군사들과 회포를 풀던 중 적선을 발견하고 서둘러 돌아와 전투에 임했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어서 한나절 만에 함락 당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드라마에서 정발은 적선을 발견하자 즉시 돌아와 주민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으나 왜적의 조총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패색이 깊어지자 휘하들이 일단 후퇴하여 훗날을 도모하자고 권유하지만, "장수에게 내일이 어디 있느냐. 장수가 살고 죽을 곳은 오직 전장뿐이다."며 군사들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독려하며 고군부투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임진왜란 첫 전투를 지휘한 장수이자, 첫 희생자인 정발의 공적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종전 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부터이다. 그때까지는 적함과 세견선도 구분하지 못한 실패한 장수로 기록되었는데, 왜 이처럼 상반된 평가를 받았을까.
선조 12년인 1579년 29세의 나이로 무과에 등제한 정발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기록된 것은 10년이 흐른 1589년 1월 21일 첫 번째 기사이다. 이날 첫 기사는 비변사에서 무인을 성적이나 서열에 관계없이 등용하는 불차채용(不次採用)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으로 도승지와 한성부윤을 지낸 강섬이 추천했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등장은 같은 7월 30일 첫 번째 기사로 정발이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사살했다는 내용으로, 이때까지는 불차채용에 추천되고, 국경수비 모범사례로 꼽힐 만큼 훌륭한 장수였지만, 임진왜란 발발 당일에는 적함과 세견선도 구분하지 못한 장수로 기록되었다.
『선조실록』 26권 1592년 4월 13일 첫 번째 기사는 왜구가 침범해 왔다는 내용인데, 첫 전투인 부산진이나 동래성 전투의 전황이나 심각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기술한 반면, 풍신수길(豊臣秀吉)에 대해서는 어린시절부터 관백이 되기까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날 기사는 부산첨사 정발이 절영도(현 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적함을)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먼저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대로라면, 정발은 경계를 게을리 한 용서받을 수 없는 장수이다. 문헌에 따라 적함 수에 대해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적 함대는 최소한 400척 이상이었는데, 당시 우리 당국이 왜에 허용한 세견선이 50척, 이를 지원하는 특수선이 2~3척이었으므로 조공선단이 제아무리 커도 53척을 넘을 수 없었다. 따라서 사냥에 정신이 팔려 아예 보지 못했거나, 눈 여겨 보지 않았다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정발에 관한 기록은 임진왜란 동안 몇 차례 더 있는데, 그의 생사를 확인하거나 중국을 설득하는 내용으로, 제대로 평가된 것은 60여 년이 흐른 후였다. 같은 해 8월 7일 두 번째 기사는 김경로와 안세희가 동래전투와 각 동의 민심, 적의 동향 등을 보고한 것으로 김경로는 14일 적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으나 모두 세견선(歲遣船)인 줄 알았는데 15일 아침에 포를 쏜다는 급한 보고 때문에 적인 줄 알았다. 부산첨사 정발은 밖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통솔하여 성으로 들어 왔으나 아군의 절반이 들어오기도 전에 적이 성으로 올라 왔다고 보고했다.
같은 해 11월 25일 두 번째 기사는 유영길과 김수가 영·호남의 전투상황을 보고한 내용이다. 곽재우에 대해 보고받던 임금은 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 채, "정발과 송상현은 과연 죽었는가?" 질문했다. 이에 김수는 혹자는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죽은 게 틀림없다. 잘못 전해진 말 가운데는 심지어 송상현이 적장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으며, 그의 머리는 대마도로 보내졌다고 보고했다. 이날 기록에서 송상현의 전과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보고되었지만, 정발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것 외에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정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선조실록』 38권 1593년 5월27일 열 번째 기사는 판중추부사 윤근수가 중국이 양산과 밀양 이남지역을 왜에 떼어주었다고 의심하여 이를 설득하고 왔다는 내용이다. 윤근수는 이날 보고를 통해 중국 경략(조선에 파견된 관료)에게 "임진왜란 이전에 양산과 밀양 이남지역을 왜에 떼어주었다면, 정발과 송상현이 부산진과 동래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다 목숨을 버렸겠느냐"했더니 경락도 수긍했다는 내용이다.
『선조실록』에는 이밖에도 몇 차례 더 정발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중국 경략과 제독의 의심을 푸는데 인용된 것으로, 여전히 적선과 세견선을 구분하지 못해 초전대응에 실패한 장수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최근 KBS 역사드라마 '징비록'에서 국난극복의 리더십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서애 유성룡만큼은 정발을 훌륭한 장수로 평가했다. 『선조실록』 45권 1593년 11월 14일 두 번째 기사는 임금이 유성룡에게 시국전반을 보고 받은 내용이다. 유성룡은 중국 사신문제와 각 지역의 전황을 보고 하던 중 정발과 관련, "부산이 함락되자 첨사 정발은 힘껏 싸우다 죽었습니다."라고 보고했는데, 『선조실록』에서는 가장 후하게 평가받은 대목이다.
임진왜란 첫 희생 지휘관인 정발이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65년여가 흐른 후였다. 효종 8년인 1657년 9월 완성된 『선조수정실록』 26권 1592년 4월14일 첫 번째 기사는 왜적의 침략에 관한 내용이다. 이날 기사는 "부산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戰船)은 구멍을 뚫어 모두 가라앉히고 군사와 백성은 모두 성곽을 지키게 하였다. 이튿날 새벽 적이 성을 백 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높은 곳에 올라가 대포를 비 오듯 쏘았다. 정발이 서문을 지키면서 한참이나 대항하여 싸웠는데, 화살에 맞아 죽은 적이 많았다. 그러나 정발은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했다.
『선조실록』의 적선을 세견선으로 잘못 보았다거나 군사의 절반이 미처 성에 들어오기도 전에 왜적이 먼저 성에 도착했다는 등의 내용을 수정실록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어떻게 한 인물을 두고도 이렇게 다른 기록을 남겼을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 문화재청
『선조실록』은 광해군 원년인 1609년 7월 감춘추관사 이항복 등 81명의 사관으로 실록청을 꾸려 1616년 11월까지 8년여에 걸쳐 완성되었다. 1567~1608년까지 선조 재위 41년간의 기록으로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즉위부터 임진왜란이 있기까지 25년간의 기록이 26권인 반면, 승하하기까지 16년간의 기록이 195권을 차지하고 있다.
실록은 『승정원일기』, 사초, 공공기록물, 가장사초 등을 기초로 실록청에서 편찬하는데, 임진왜란 초기 임금이 서둘러 몽진하는 과정에서 이들 기록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사관들이 보관했던 가장사초나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작성하는 바람에 임진년 이전이나 전란 초기는 내용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편찬 초기부터 실록청이 북인 중심으로 꾸려져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이수광, 임숙영 등이 실록수정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인조 19년인 1641년이 되어서야 대제학 이식의 상소를 받아들여 수정편찬이 시작되었다.
이식을 책임자로 예문관 검열 심세정이 적장산사고에서 수정할 부분을 초출한 뒤 사관들이 개인적으로 작성했던 가장사초, 비문, 행장(行狀), 야사, 잡기 등을 참고하여 수정을 시작하여 효종 8년인 1657년이 되어서야 『선조수정실록』 42권 8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적선과 세견선도 구분하지 못하는 한심한 장수로 기록되었던 정발은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65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1592년 4월 14일 첫 번째 기사는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에 관한 것이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을 갔다가 급히 돌아 왔는데, 성에 들어가기 전에 전선(戰船)에 구멍을 내어 모두 가라앉히고 군사와 백성들을 성안으로 피신시키고 백 겹으로 둘러 싼 적들과 싸워 무수히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며, 결국 화살이 떨어져 적의 탄환에 숨졌다."
이 기록으로 보면, 정발은 적의 발견부터 백성의 피신까지 최상의 임전태세를 갖추었으며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장수였다.
실록에서는 65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기록되었지만, 1615년 이미 명예는 회복되었다. 『광해군일기』 97권 1615년 11월 23일 네 번째 기사는 정발을 충신 대열에 수록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날 찬집청(撰集廳, 문헌자료 정리를 위해 편성된 임시기관)은 이대원,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정발도 충신 대열에 수록해야 한다는 것으로 임금은 이를 윤허했다.
이미 판서에 추증되었으나 이를 모르고 상소를 올렸다가 꾸중을 듣는 해프닝도 있었다. 『숙종실록』 11권 1681년 1월 29일 세 번째 기사는 동래부사의 상소이다. 동래부사 조세환이 송상현은 이미 판서에 추증되었으나 정발은 추증한 바가 보잘 것 없어 지역 선비들이 성상의 은전을 바란다는 상소를 올렸다. 임금으로부터 검토를 지시받은 김수항은 "이미 병조판서를 추증하였으나 변방의 백성들이 어리석고 소홀히 하여 잃어버린 것이다."고 아뢴 뒤 "그렇지만 특별히 시호(諡號)를 내려 기록하여 두도록 하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숙종 9년에는 정발의 후손을 등용해야 한다는 요청도 있었다. 『숙종실록』 14권 1683년 1월 28일 첫 번째 기사는 승지 어진익의 건의로 임진년 순절한 부산 첨사 정발의 후손을 거두어 등용하자는 건의이다. 이날 송시열은 "정발의 첩 애향이 절의를 위하여 죽었고, 그의 계집종도 죽었으니 진실로 드물게 훌륭한 사람이다"며 어 승지를 거드는데, 요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숙종 12년인 1686년 충장(忠壯)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 이후 조정에서는 정발의 예우에 관한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후손의 등용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고종 5년에 가서야 종손의 등용기록이 있다. 『고종실록』 5권 1868년 4월 12일 세 번째 기사는 권율의 종손 최조와 정발의 종손 학순이 무과에 급제했다는 내용으로 임금은 매우 기특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권최조는 선전관에, 정학순은 사복시 내승에 임명하라고 전교했다.
지난 5월 23일은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423년이 되는 날이자 첫 전사 지휘관인 정발 장군의 423주기이기도 하다. 제대로 평가·기록되기까지 65년이 걸렸지만, 그나마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그리운 부모 형제를 뒤로 하고 이름 모를 전장에서 이슬처럼 스러져 간 수없이 많은 영령들이 있어 지켜낼 수 있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