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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독립운동가의 산실 ‘임청각’, 약과와 도대체 무슨 관계?

「조선왕조실록」 - 세종 때 좌의정 지낸 이원, 석주 이상룡 선생 선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재임시 석주 이상룡선생(출처 : 독립기념관)

북 안동시 법흥동 소재 보물 182호 임청각(臨淸閣)이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 이후 국내 주요 포털 실검(실시간 인기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25일 현재까지 문의전화와 방문객이 쇄도하고 있다.

안동지역의 수많은 종택(宗宅) 중 하나인 이곳이 이처럼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이날 문 대통령이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다.”라며, “아흔아홉 칸 저택이던 임청각은 일제에 의해 반 토막 난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이며, 후손들은 광복 이후에도 고아원 생활을 해야 했는데,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에도 이곳을 찾아 “충절의 집에서 석주 이상룡 선생의 멸사봉공 애국애족 정신을 새기며, 임청각의 완전한 복원을 다짐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오래전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공간으로 마음에 새겨 두었던 이 고택은 석주 선생과 아들 이준형(1875~1942), 손자 이병화(1906~1952), 동생 이상동(1865~1951), 조카 이형국(1883~1931), 이광민(1895~1946) 등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를 탄생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재임시 석주 이상룡선생(출처 : 독립기념관)

고성이씨 종택인 임청각은 형조좌랑을 지낸 13대() 손() 이명(李洺)이 중종 14년인 1519년 민가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인 99칸으로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10칸이 소실되었고, 일제가 중앙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이 고택을 훼손하기 위해 노선이 이곳을 관통하도록 해 또 다시 36칸을 잃어 현재는 50여 칸이 남아 있다.

고성이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확고히 올린 인물은 임청각의 주인 이명(李洺)의 조부로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이다. 이원은 고려 우왕 8년인 1382년 진사에 이어 1385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 개국에 참여했으며,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기여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정종실록 1400년 11월 11일 첫 번째 기사는 정종의 선위교서를 이원이 태상왕에게 전했다는 것이고, 태종실록 1401년 1월 15일 두 번째 기사는 이 같은 공로로 공신을 내린 교서이다. 좌승지 이원, 우승지 이승상, 상장군 이종무 등 22명을 좌명공신 4등에 봉하고, 상으로는 직계 아들에게 음직을 주고, 밭 60결, 노비 6명, 은 25냥을 하사했다.

이후 예조판서와 참찬, 병조판서를 거쳐 태종 17년인 1417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세종 3년인 1421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해 12월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세종실록 1426년 2월 28일 네 번째 기사가 기록상으로는 좌의정 이원이 처리한 마지막 업무이다. 최근 발생한 대형 화재사고에 대한 논의였는데, 이원이 건의했다. “화재로 가옥과 살림을 모두 태워 의복과 식량 등 생필품이 시급한데, 현행법은 돈으로만 구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정기간을 정해 허가받지 않은 일반인도 물물교환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태조 2년인 1393년 현빈 유씨와 관련된 일로 유배를 가야 했고, 1401년에는 요즘으로 치면 일명 갑질로 파직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태종실록 이해 2월 9일 네 번째 기사인데, 대사헌 이원이 늦은 시간 퇴청하던 중 순관(巡官)인 윤종이 이원의 근수(根隨, 따라 다니며 시중드는 남자종)를 범야(犯夜, 통행금지 위반)로 체포했다가 풀어 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하인을 현장에서 풀어 주었음에도, 무슨 일인지 화가 풀리지 않은 이원이 다음 날 이 사실을 소속 부()에 통보하며 윤종을 혼내 주라고 요청한 것. 이를 대사헌의 갑질로 판단한 사간원이 상소했고, 크게 진노한 임금이 대사헌 이원과 순관 윤종을 함께 파직시켰다.

조선판 김영란법 제정과정에서도 망신을 당했다. 세종은 뇌물을 준 사람만 처벌하는 규정을 받은 사람도 함께 처벌하도록 개정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기회를 보던 중 결정적인 단서가 포착되었다. 사헌부가 좌의정 이원, 대제학 변계량, 이조판서 허조 등을 뇌물수수 혐의로 내사하게 된 것. 세종실록 1424년 7월 14일 다섯 번째 기사가 이 내용이다. 임금이 이들을 불러들인 뒤 지신사 곽존중을 시켜 뇌물금지법 개정안을 설명하게 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이에 좌의정 이원이 답했다. “뇌물을 받았다고 사헌부의 조사를 받고 있는 신 등이 어찌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밖에도 여러 차례 파직과 복권을 거듭했던 이원은 세종 8년인 1426년 3월 15일 뇌물수수와 선왕에 대한 괘씸죄로 공신의 녹권(錄券, 공신의 훈공을 새긴 패)과 직첩을 회수 당하고, 여산에 유배되어 4년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1385년 고려 우왕부터 조선 제4대 세종까지 40여 년간 여섯 임금을 받들다보니 부침(浮沈)이 있기 마련이어서 허물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공이 더 많은 인물이다.

이원은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 여섯째인 증()이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 입향조(入鄕祖, 고장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조상)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경북 안동시 정상동 고성이씨 신도비에 따르면, 이증은 단종 즉위년인 145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해 음직으로 진해와 영산현감을 지냈다. 1455년 세조가 등극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평소 눈여겨 보아두었던 안동으로 이주했다.

  • 보물 182호 임청각 전경

    보물 182호 임청각 전경

400여 년의 풍상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선시대 전통 한옥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임청각은 입향조인 이증의 셋째 아들인 명()이 1519년 지었는데,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싯구인 “맑은 물에서 시를 짓다.(臨淸流以賦詩)”에서 따왔으며,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풍수가들은 임청각이 누에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잠두혈로 누에가 명주를 뿜어내듯 끝없이 인재를 배출할 천하의 길지로 보고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일가를 그토록 미워했던 일제도 지세만큼은 인정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에게 의뢰하여 ‘조선의 풍수’를 간행했는데, 주거풍수편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임청각의 평면도는 용()자형으로, 뒤쪽으로는 상산(象山)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풍수상 지극히 좋은 지세이다.”

영남산 기슭의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과 5개의 마당을 배치하여 정면에서 보면 용()자를 눕힌 형상인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있고 바로 옆에 영천(靈泉)으로 불리는 우물이 있다. 여기가 명혈의 기운이 모인 곳으로 우물 옆 작은 방이 산실(産室)인 영실(靈室)인데, 여기서 3정승이 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고성이씨 며느리들은 당연히 이곳에서 아이를 낳았고, 시집 간 딸들도 시댁과 친정의 허락을 얻어 여기서 출산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 방에서 3정승이 났는지가 요즘 세간의 관심이다. 결론부터 밝히면, 친손으로는 입향조인 이증의 둘째아들 굉()과 셋째 아들 명이 중앙 관가를 떠나 낙향한 이후, 이상룡 선생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인물이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러나 외손은 일일이 다 꼽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정승과 고관대작을 배출했다.

문과 합격자가 105명으로 이중 정승(영·좌·우의정) 9명, 대제학 6명, 당상관 28명, 정2품 34명, 종2품 15명을 후손으로 둔 약봉 서성이 이명의 외손이다. 서성의 어머니인 고성이씨 부인이 결혼 5년 만에 남편을 잃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린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개발한 아이템이 당대 최고의 히트상품이자, 요즘도 즐겨 먹는 약식과 약과이다.

대구서씨를 최고 명문가 반열에 올린 약봉 서성의 어머니 고성이씨 부인이 이명의 다섯째 아들로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李股)의 무남독녀이다. 이씨 부인은 15세 때 병으로 시력을 잃은 시각 장애인이었다. 이런 딸을 출가시키며, 안타까운 마음에 지어 준 집이 약봉의 생가이자 보물 제457호인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소호정이다.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도 큰 인물이었던 것 같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뒤늦게 신부가 장님인 것을 알고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한 약조를 그만한 일로 바꿀 순 없다.”며 이내 결혼을 결정했다는 것. 결혼 2년여 만에 서성을 얻어 더 없이 달콤한 신혼을 보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함재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과 앞 못 보는 젊은 아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등졌다.

시부모, 친정부모에 이어 남편마저 앞세운 이씨 부인은 중대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의 3년상을 마치자 소호정과 전답을 정리해 절반은 친정에 돌려주고, 나머지로 서울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인근)에 집을 마련해 이사했다. 어린 아들을 둘째 큰아버지에게 맡긴 이씨 부인은 생계를 위해 지금의 약주와 약과 등을 만들어 팔았는데, 당시로서는 새로운 맛의 신창조여서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이씨 부인의 음식솜씨가 입소문을 타고 임금에게까지 전해져 이를 맛본 선조가 약봉의 집에서 만들었다고, 약자를 붙여주었다는 설과 약고개(藥峴)에서 만든 술과 과자라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 약과

    약과

  • 약밥

    약밥

신사임당과 함께 조선 3대 현모양처 중 한사람인 이씨 부인의 헌신으로 약봉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던 율곡 이이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29세에 급제하여 5도 관찰사와 3조 판서를 지냈다. 약봉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경우는 인조 22년인 1644년 영의정에 올랐다.

고성이씨는 조선 중기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과도 인연이 크다. 이명의 증손녀가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과 결혼했고, 서애의 8대 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류후조가 임청각의 외손이다. 아버지 유심춘과 어머니 고성이씨는 임청각의 전설을 믿고, 경북 상주에서 안동까지 원정 출산을 감행해 영의정을 내는데 성공했다.

왕조의 정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의 직제 상 직접적인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석주 이상룡 선생이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지대한 공로는 그 어느 명재상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음으로, 3정승을 낸다는 임청각의 전설은 모두 이루어진 셈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 곳곳에 누적되어 온 적폐와 최근 온 국민의 공분과 상실감을 불러일으킨, 일명 갑질논란은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책임의식 결여와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다.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안녕을 걱정하고,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