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조선 이흥문법’ vs ‘대한민국 김영란법’, 어느 법이 셀까?
『조선왕조실록』 - 제주목사 고위직에 말고기 선물 계기, 음식물도 처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28일로 시행 1년을 맞았다.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일부의 개정이 필요하지만, 응답자의 60% 이상이 뇌물수수나 접대 등의 비리가 줄었다고 밝혀 당초의 우려와는 달리 연착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식 법률명보다 제안자의 이름을 딴 ‘김영란법’으로 더 익숙한 이 법은 우여곡절 끝에 시행은 되었으나, 법안이 공포되기도 전에 헌법소원이 4건에 이르는 등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은 서민경제 위축을 우려한 가액 상향조정 요구로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 지명자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취임하면 곧바로 검토하겠다.”고 밝힐 만큼 개정여론이 높고, 농수산물 생산자와 소상공인단체도 지난달 추석 전 개정촉구 시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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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취업포털 「커리어」가 시행 1년을 맞아 직장인 57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7.9%가 가액조정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인상 필요는 식사비(45.6%), 선물비(29.5%), 경조사비(19.9%) 순이었다. 이 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다(56.9%), 보통이다(27.1%), 잘 지켜지지 않는다(16%)였으며, 사회분위기를 묻는 문항에서는 변화가 없다(20.9%), 비리가 줄었다(60.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 김영란법이 첫 제안 이후 시행까지 4년여가 걸린 것은 지나치게 넓은 적용 대상과 범위 때문이었는데, 시행 1년이 된 지금도 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김영란법에 버금가는 뇌물금지법(제주목사 이흥문의 말고기 뇌물사건을 계기로 음식물이 처벌대상에 포함된 이후는 이흥문법으로 표기)이 있었는데, 제안부터 시행까지 23년여가 소요될 만큼 관료들의 저항이 거셌다.
김영란법 이전 수준의 법이 조선시대 처음 시행된 것은 1424년이다. 세종실록 이 해 7월 14일 다섯 번째 기사가 그것인데, 이 법안의 사실상 첫 제안자는 세종이었다. 법안은 사헌부에서 올렸지만, 임금의 지시로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첫 법안은 음식물과 선물까지 모두 처벌대상에 포함되어 요즘의 김영란법 못지않았다.
이날 실록기사는 사헌부의 법안 및 경과보고이다. 이날 보고된 법안은 임금의 지시로 윤회(尹淮)가 초안을 작성했고, 지신사(知申事, 승정원 정2품) 곽존중이 제안취지를 대독했다. “전조(前朝, 고려)의 말년에 뇌물을 공공연하게 왕래하더니 구습이 아직도 남아 관리들이 뇌물을 태연하게 주고받는다. 오히려 뇌물을 거절하는 자가 기롱과 조소를 받으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기는 바이다. 앞으로는 준 자나 받은 자 모두를 도둑으로 간주하여 처벌할 테니, 이를 특별교지로 할지, 법으로 제정할 것인지는 대신들이 정하시오.”
곽존중이 대독한 제안취지에는 세종의 절묘한 한 수가 숨어있었다. 이때 사헌부가 많은 신료들이 연루된 대형 비리사건을 조사 중이었는데, 그 중 최고위직인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이원, 성산부원군 이직, 대제학 변계량, 이조판서 허조 등을 불러 설명한 것은 이들의 반대를 사전봉쇄한 것이다. 세종의 예상은 적중했다. 자신들의 수뢰사실을 알고 있다고 판단한 좌의정 이원이 대신들을 대표해 혐의를 이실직고하고 선처를 빌었다. “사헌부의 조사를 받고 있는 신 등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영의정이 좌의정보다는 노회했던 것 같다. 정색을 하기는 민망했던지, 실록의 표현을 빌면 희롱조로 말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음식 받아먹은 것이 무슨 죄가…” 대제학과 이조판서도 거들었다. “먹는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 해로울 것은 없는데, 이것까지 금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뇌물에서 제외된 음식이 다시 적용대상이 되기까지 무려 23년여가 걸렸다. 번번이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으로, 음식물을 뇌물에 포함하자는 주장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 법이 시행된 지 3개월여 만인 세종실록 1424년 10월 6일 네 번째 기사가 호군 신정리(申丁理)의 상소문인데, 출장 관원에 대한 음식접대 문제이다. “각 관(官)의 공수전(公須田,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관청에 주어진 땅) 수입으로는 경비 충당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각 관의 수령은 내왕하는 관원들을 접대해야 하는데, 음식 마련할 비용이 없어 국고를 몰래 내다 팔거나 하급 관리에게 갹출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현명한 수령이라도 탐오(貪汚)한 관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해 11월 11일 첫 번째 기사는 음식대접을 받은 관원의 처벌에 관한 내용이다. 사복마(司僕馬, 사복시에서 관리하는 말) 조련을 위해 해주에 간 환관 유실, 윤길, 첨총제(僉摠制, 무관직 당상관) 이군실 등이 현지에서 음식과 술대접을 받았는데, 유실과 윤길은 각각 90대와 80대의 장형에 처해진 반면, 이군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에 지신사 곽존중이 이군실의 처벌도 요구했으나, 임금은 “실과 길에게는 출발 전에 이 같은 일이 없도록 하교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고, 군실에게 따로 명한 바가 없다.” 즉 음식접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처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에도, 임금을 도와 뇌물금지법을 주도했던 지신사 곽존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상께서 군실에게 친히 명하지 않았어도 하교내용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상께서 한번 하교하시면, 안팎에서 모두 듣기 마련이니 처벌함이 마땅합니다.” “비록 무인이나 당상관이고 태종대왕을 모시던 사람인데, 그만한 일로 벌을 줄 수 있겠느냐. 내가 알아들을 만큼 꾸지람을 했으니, 더 이상 논하지 말라.” 이때 대사헌 김익정이 아이디어를 냈다. “어찌 신 등이 상의 뜻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해주의 사복시 말 훈련과 관련하여 조사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어쩔 수 없게 된 임금이 이군실 등의 추가 조사를 수용했다. 이밖에도 좌부승지 유의손이 하급관리에게 음식물을 받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임금의 명으로 풀려나자 사헌부가 반발하는 등 음식을 둘러싼 공방이 여러 차례 있었다.
결국 음식물이 뇌물에 포함된 것은 세종 29년인 1447년이다.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황희 정승까지 뇌물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 제주목사 이흥문사건이 음식물 포함의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제주경저(京邸, 조선시대 지방관청이 각종 연락사무 등을 위해 서울에 두었던 출장소) 근처에 살던 내시의 제보로 시작되었다. 세종실록 이 해 윤 4월 14일 첫 번째 기사이다. 이날 임금은 의정부 우참찬 정갑손에게 명했다. “흥문(興門)이 바다 밖에서 지방정치를 하면서 백성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오로지 뇌물쓰기를 일삼고 있어 국문하려 하니, 의정부가 이를 논의하여 아뢰라.”
이 같은 임금의 국문 지시에도 불구, 신료들은 서둘러 사건을 덮으려 했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대 최고의 실력자들인 영의정 황희, 우의정 하연, 좌찬성 황보인, 우찬성 김종서가 아뢰었다. “육전에는 소문만으로도 지방수령을 조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마땅히 추국을 할 수도 있으나, 내시의 말에서 시작되었으니, 대체(大體, 기본이 되는 큰 줄거리)에 어긋남이 있으니 흥문을 내쫓는 것으로 가할 듯합니다.” 임금도 서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조는 흥문의 직첩을 박탈하는 것으로 이 일을 종결하라.”
그러나 이날 있었던 일련의 과정은 임금의 전략이었다. 다음날 입궐한 신료들은 “신들은 모두 흥문이 보낸 물건을 받았사옵니다. 부끄러운 낯으로 이 자리에 있기가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러나 벌하여 주시기를 기다리겠사옵니다.” 이에 임금이 말했다. “식물(食物, 음식물)을 받는 것은 법령에도 정해진 것이 없으니, 개의치 말고 내일부터 출근하라. 받은 것이 포육(脯肉, 양념하여 말린 고기)이거나 말장식에 불과하고 흥문 뿐만 아니라 제주목사들은 옛날부터 그랬었다.” “그런데 흥문의 물건을 받은 사람 중 도승지 황수신, 좌승지 이사철 등은 일반 관리들과 결탁해서는 안 되는 내신(內臣)이어서 그냥 둘 수 없소. 엄중한 방지책을 세울 테니, 경들은 그리 알고 물러가시오.” 이어 임금은 이흥문법 제정을 위한 결정타를 던졌다. “동부승지 이계전은 들으라. 이 같은 탐욕의 풍습을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역대의 본받을 만한 것과 경계될 만한 것들을 상고하여 교서를 지으라.” 즉 이번은 승지들만 처벌하지만, 앞으로는 모든 관료를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라는 지시였으나, 이의를 제기한 신료는 아무도 없었다.
이틀 후 우의정 하연이 사직상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을 처벌하라는 요구가 계속되었다. 사헌부는 16일과 21일 연이어 상소를 올려 이흥문의 국문과 뇌물을 받은 신료들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임금이 직첩 박탈에 그쳤던 이흥문을 경상도 흥해에 유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한 달여가 지난 5월 22일 요즘의 김영란법에 버금가는 이흥문법이 탄생했다. 실록 이날 두 번째 기사인데, 육전(六典)과 율문(律文)에 따라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장물을 계산하여 율대로 죄를 매기되, 장리(贓吏, 뇌물을 받은 관리)로서 논죄할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사헌부가 최종 법안을 올리기 전 이를 뇌물을 받은 대신들에게 열람시켰는데, 불과 며칠 전까지 사직상서를 내며 머리를 조아렸던 하연, 황보인, 김종서가 발끈했다. “미안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으나, 일부 때문에 청렴 정직한 사대부까지 욕되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법안 중 ‘사행탐도(肆行貪饕, 재물과 음식에 대한 탐욕)가 무소기극(無所紀極, 끝이 없음)하고 뇌회권문(賂賄權門, 권신들에게 뇌물을 줌)이라’는 삭제하여 주십시오.” 이날의 역사현장을 기록한 사관은 기사 말미에 자신의 평론을 덧붙였다. “대신들은 참으로 부끄러움을 몰랐고, 이를 용인하는 임금은 더욱 부끄러웠다. 이흥문으로 인하여 세워진 이 법은 음식물까지 뇌물에 포함시켜 훗날 세상을 메마르게 하는 폐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흥문법 시행 이후 첫 위반은 7개월여가 지난 1448년 1월 28일 발생했다. 실록 이날 세 번째 기사인데, 사헌부가 노루고기를 뇌물로 바친 최약지를 국문한 결과이다. 서흥 도호사(都護使, 종3품 지방관직) 최약지가 병조판서 김세민, 경기감사 조혜, 형조 참판 조수량에게 노루고기를 뇌물로 주었으나, 때마침 은사(恩赦,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사면)가 있어 면죄되었다는 것. 이후 음식이나 향응은 크게 줄었으나, 금품수수가 줄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때 뇌물수수액이 80관(貫)을 넘으면 참형에 처하게도 했지만, 지난해 세계투명성기구가 조사한 우리나라 부패인식지수는 역대 최저인 52위였다. 설령, 제도가 완벽했더라도 탐욕은 일정 부분 본능과도 같아서 몇 줄의 법률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부패인식지수 상위권의 투명사회가 실현되리라 믿는다. 한 사관이 고민했던 부끄러움을 모르는 관료들 대신, 온 국민의 부패척결 의지가 드높고, 메마른 인심 대신, 서민경제를 걱정하는 따듯한 인심이 충만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