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태종과 양녕대군 부전자전 개 사랑, 신하들에 봉변
「조선왕조실록」 - 세종 때 각 진영 40마리씩 배치, 군견으로도 인기
필자미상견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
지난해 말 농림축산검역본부와 한국펫사료협회가 조사한 반려동물 사육현황에 따르면 509만 가구에서 662만 마리의 반려견을 키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24%에 이르는 수치이다.
애완견이라는 표현마저 이미 동물 비하발언으로 전락시킨 개는 충성의 상징이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또한 개는 불행의 상징이자,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신이기도 하다. 신라 진평왕 때는 흰 개가 궁중의 담장에 올라가 짖었는데, 얼마 후 모반이 일어났다는 설화가 있다. 불가에서는 개고기를 멀리 한다. 저승길을 안내하는 삼목대왕의 환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는 비루함과 비천함의 상징이기도 해 인간과 삶을 함께 하는 반려의 수준에 오른 것은 최근의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개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대부분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비유이거나 개 때문에 당한 봉변이다.
조선의 임금들 중에는 태종과 연산군이 유난히 개를 좋아했다. 태종실록 1402년 4월 1일 첫 번째 기사는 개를 좋아하는 임금 때문에 벌어진 논쟁이다. 사인(의정부 정4품) 이지직과 좌정언(사간원 정6품) 전가식이 상소했다. “사가에서 하셨던 것처럼 매와 개를 아직도 좋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곧 신민(臣民, 관리와 백성을 아우르는 말)들이 실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검약을 숭상하시고 방탕한 욕심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태종이 발끈했다. “비밀리 아뢰어도 될 걸 글로 써서 역사에 남게 하다니, 이런 괘씸한지고.” 이에 사헌부 지평(사헌부 종5품) 이지가 즉각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 등은 전하의 과실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거짓으로 성상의 불미(不美)함을 드러내어 실덕(實德, 참되고 진실한 덕성)을 훼손하였으니 멀리 귀양을 보내게 하소서.” 그러나 임금은 “간관(諫官, 사간원 관리)이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용서했다.
졸지에 아첨꾼이 된 이지가 사직서를 던졌다. 체면을 구긴 사헌부가 4일 후 기관명의의 상소문을 올렸다. “언관이 임금의 과실을 고함은 그 직분이고, 이를 용서한 것은 임금의 지극한 덕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소는 사실이 아니며, 이를 사책(史冊)에까지 남게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신 등을 아첨하는 것으로 여기신다면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듭된 상소에도 임금이 뜻을 굽히지 않자 이지가 지신사(승정원 정2품) 박석명을 통해 셀프 중재안을 냈다. “상께서 이미 면죄해 준 것을 번복할 수는 없을 테니, 그 둘의 휴가 처리를 건의하시면 어떨까요?” 임금이 “옳다”를 연발하며 건의대로 수용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로도 중국 사신이나 신료들에게 사냥개를 수시로 하사했고, 좋은 개를 진헌(進獻, 임금에게 예물을 바침)하면 뛸 듯이 기뻐하며, 벼슬이나 돈을 내렸다. 실록 1412년 2월 19일 기사는 계림부윤 윤향이 사냥개를 바치자 그 뜻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며 저화(楮貨, 1512년까지 유통되던 지폐로 1장 당 당시 가치는 쌀 2말 상당) 40장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다.
한 때 세자였던 양녕대군도 아버지 태종 못지않게 개를 좋아했다. 태종실록 1414년 9월 7일 기사는 세자가 몰래 강아지를 구했다가 곤욕을 치른 내용이다. 임금이 물었다. “세자가 남편 없이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강아지를 구했다는데, 사실인가?” 조사 결과, 세자의 부탁으로 상호군(정3품 무관) 황상이 대호군(종3품 무관) 권초의 집에 좋은 개가 있다 추천했고 이를 구하게 된 것. 그런데 마침 집주인인 권초가 지방근무 중이어서 세자가 강아지를 얻으려 혼자 사는 과부 집을 드나든 것으로 잘못 전해져 임금의 화를 돋운 것이었다. 임금이 승정원에 전교했다. “황상, 너는 개국공신의 아들이어서 내가 장차 크게 쓰려했는데, 진실로 실망했다.” 이를 전해들은 세자가 황상에게 많이 미안해했으나, 다른 신료들의 충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세종이 즉위한지 10년이 되던 해이다. 세종실록 1428년 2월 17일 기사인데, 김효정과 황보인이 임금의 형인 양녕이 개를 기른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성상께서 형제의 우애를 지키려 염려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공의(公義, 공정한 도의)를 위해서는 처벌하여야 합니다.” “내가 이미 매와 개를 키우지 못하도록 명하였소. 경들은 어찌하여 내가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토록 오랫동안 내 귀를 아프게 하는 것이오.” 이후로도 개 키우는 양녕의 처벌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들 부자(父子)가 신료들의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개를 키운 것은 당시 최고급 레포츠였던 사냥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사냥개는 중국 황실까지 소문이 난 것 같다. 실록에는 중국이 진상품목으로 개를 요구한 기록이 무수히 많은데, 대부분이 애완견이 아닌 사냥개인 것으로 해석된다. 세종실록 1433년 12월 6일 기사는 중국 사신이 황제의 요구를 빙자해 개를 구하려다 들통난 이야기이다. 임금의 명으로 좌승지 김종서가 중국 사신을 문안했다. 이 자리에서 사신 맹이 말했다. “내가 어제 요청한 매와 개를 오늘은 꼭 전하께 아뢰어 주시오. 비록 황제에게 전하는 것은 나지만, 전하의 정성이라는 것을 다 알 것이오.” 그러나 사신에게 속아 넘어갈 김종서가 아니었다. “황제의 칙서(勅書, 임금의 훈계나 지시 글)를 보여 주시오. 전하께서는 칙서가 없으면 아무것도 듣지 않습니다.”
세종실록 1443년 7월 1일과 단종실록 1453년 10월 3일 기사도 중국이 개를 요구한 진상물목과 관련한 내용이다. 전자는 우의정을 지낸 노한(盧閈)의 졸기(신료가 사망하면 쓰는 인물평)이다. 중국의 매와 개 요구량이 해마다 늘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노한이 중국사신 접대에 능해 요구량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어느 한 해에는 어머니 병환으로 접대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임금의 부탁으로 낮에는 사신 접대, 밤에는 어머니 병수발을 들었다는 것이다. 후자는 매와 개를 더 이상 중국에 보내지 말자는 병조참판 이계전의 제안이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 사냥개가 중국이 선호하는 주요 물목 중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실록 1431년 7월 17일 기사는 병조의 보고로 군견으로도 쓰였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경기 66, 충청 9, 경상 42, 전라 59, 황해와 강원이 각 3마리씩을 길러 이를 진헌하면, 각 도의 영진(營鎭)에 40마리씩을 배정할 계획이다. 그런데 현재 사육현황으로는 진헌 수량에 많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 도는 배정된 수량에 문제가 없도록 사육에 힘써 달라.
집현전 학자 양성지가 편찬한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 임금의 통치 원칙을 요약한 그림)」에서는 임금의 정심(正心)을 위해 매와 개를 멀리하라고 했지만, 이는 임금이나 세자에게 이른 것으로, 응방이나 각 도의 영진에서는 사냥과 경계에 널리 쓴 것으로 생각된다. 단종실록 1454년 9월 29일 기사는 임금이 소릉(현덕왕후 권씨 능)에 제사를 위해 행차했을 때 경기감사 안숭효가 매와 개를 진상했다는 기록이다. 성종실록 1491년 2월 1일 기사도 진상에 관한 것이다. 경상도 관찰사가 전례대로 개를 진상하자 주상이 전교했다. “봄철 농사일이 한창 시작되는데, 평안도와 영안도에는 적의 변고까지 많으니 진상하지 말도록 하라.” 이밖에도 실록에는 사냥개 진상에 관한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주요 진상품이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연산군의 개에 대한 집착은 역대급이었다. 실록 1501년 3월 15일 기사는 어가 행차에 관한 임금의 전교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임금의 행차에 개가 동원되는 대목이다. 내일 행차할 때 응방의 개 10마리를 청로대원(淸路隊員, 임금 행차 시 행렬 앞에 서는 군졸) 10명이 좌우로 나누어 끌고 가라는 것이다. 같은 해 5월 6일 기사는 영의정 한치형의 건의이다. “궁궐 안에 전하께서 기르는 개가 너무 많아 때로는 조회 때 대신들 사이를 개들이 함부로 드나들어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수효를 줄여 주시옵소서.”
급기야 7월 1일에는 대사헌 성현이 목숨을 걸고 상소했다. “일찍이 성종께서도 응방(鷹坊, 매 사육을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여 새끼 매를 기르다 신하들의 충언을 받아들여 모두 놓아 주신 일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궁궐 안에 응방을 만들어 노비를 시켜 지키게 하고, 쌀을 먹여 사육하니 매가 궁궐 위를 떼지어 날고, 개가 뜰을 무리지어 다니며 짖어대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다. 이제는 금수 기르기를 금하시고 마음을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신료들의 상소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육두수는 더욱 늘어 1502년 2월 5일에는 일본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의정부가 보고했다. “오늘 아침 백관이 반열에 늘어섰을 때 사냥개가 이리저리 뛰어 다녔습니다. 때마침 들어 있던 일본 사신들이 보고 있어 민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사냥개를 내놓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나 임금의 조치는 사육수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관리자를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1505년 9월 14일 기사는 전전관(典錢官, 응방 전담관원) 4명을 임명한 것인데, 이 관원의 임무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이 때 응방에서 기르는 매와 개가 몇 만 마리를 헤아렸고, 온갖 진기한 새와 짐승을 키웠으며, 남쪽에는 큰 연못을 만들어 거위와 오리를 길렀는데, 모두 전전관의 몫이었다. 궁궐에서 몇 만 마리의 매와 개를 키우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튼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많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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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개와 강아지(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
지난해 여름 문재인 대통령이 키우는 유기견 ‘토리’가 ‘퍼스트도그’라는 뉴스가 세간의 화제였다. 한 통계에 따르면 네 집 건너 한 집 꼴인 509만 가구가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시대이다. 개띠의 해는 역사적으로도 국운상승의 해였고, 특히 누렁이는 풍년과 다산의 상징이다. 황금개띠 해를 맞아 국가의 발전과 모든 가정의 행복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