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탄생 천년의 섬, ‘비양도’의 전설은 거짓이었나?
「조선왕조실록」 - 1002,1007년 화산폭발 7일간 분화 산이 솟아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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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 해안가: 용암굴뚝 등 화산 관련 명물이 많음
서기 1002년 6월과 1007년. 두 번의 화산폭발로 탄생했다고 믿어왔던 제주도의 막내 섬 ‘비양도’의 천년 신비가 사실과 많이 다른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고려사』 <오행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 여러 문헌의 기록이 최근 과학적인 방법으로 생성연대를 측정한 결과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에 속한 비양도는 해안선 길이가 3.5km, 남북의 길이가 850여m, 면적이 0.59㎢로 제주도 8개 유인도 중 여섯번째인 한적한 섬이었다. 이곳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5년 오랜 동안 스크린을 떠나 있던 고현정의 컴백 드라마 「봄날」의 촬영지가 되면서 부터이다.
한림항에서 하루 4편뿐인 작은 여객선을 타고 10여 분쯤 가면 선착장에 도착하는데, 가장 눈에 띠는 조형물이 화산폭발 천년을 기념해 세운 비양도 천년기념비이다. 이처럼 비양도를 최근에 탄생한 제주의 막내 섬으로 여기게 된 것은 『고려사』와 훗날 이를 근거로 편찬한 여러 문헌에 나오는 화산폭발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는 세종 31년인 1449년부터 문종 1년인 1451년까지 조선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 고려의 폐정을 경계하고 교훈을 삼을 목적으로 조정이 편찬했으며, 총 139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사서이다. 또한 『세종실록』은 단종 1년인 1454년 조정이 편찬되었다. 따라서 완성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실록이 3년 늦지만, 흔히 실록의 부록으로 여겨지는 <지리지>는 통치자료를 목적으로 실록편찬 이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고려사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료에 근거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 화산폭발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 151권 전라도 제주목편에 나온다. 고려 목종 5년인 1002년 6월에 탐라산에 구멍이 네 개가 뚫려서 시뻘건 물이 치솟았으며, 목종 10년에는 바다 가운데 산 하나가 솟아 나왔다. 탐라에서 이렇게 보고하니 왕이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조사하게 했다. 탐라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솟아 나오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고, 벼락 치는 것 같이 땅이 움직였다. 7주야(晝夜)가 지나서야 개었는데, 바라다보니 석류황 같기도 하여 사람이 다가갈 수 없다 하였으나, 전공지가 몸소 산 아래까지 가 그 모양을 그려서 나라에 바쳤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새로 생긴 산의 높이가 백여 길, 둘레가 40여 리에 이른다는 것 등 실록 지리지 보다 더 상세한 내용을 싣고 있다. 아마도 지리지 편찬자들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만 발췌했거나, 고려사와 다른 자료를 근거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종실록』 이후 편찬된 지리서들은 대부분 화산섬의 위치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고려사』나 실록에 이용된 자료보다 앞선 것일 수 있다. 중종 25년인 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간략하지만, 위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1002년 화산폭발 내용에는 『고려사』와 『실록』에 나오는 탐라산이 없는 반면, 바다에서 산이 솟아올랐다는 내용이 있으며, 1007년에는 새로 생긴 산이 서산인데, 지금의 대정현에 속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세종 14년인 1432년 출간된 『신찬팔도지리지』를 초판으로, 성종 12년인 1481년 『동국여지승람』을 수정·증보판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초판은 『고려사』 편찬작업을 시작한 1449년 보다 17년 앞서 발간된 것이다. 물론, 먼저 편찬되었다고 더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려사 보다는 더 많은 내용을 전제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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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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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제주도 화산폭발을 수록하고 있는 또 다른 지리서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편찬 지리서인 『동국여지지』이다. 이 지리서는 효종 7년인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이 편찬했으며 3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도 새로 생긴 섬이 대정현에 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좀더 구체화 한 문헌이 『남천록』이다. 이 문헌은 부수찬 김성구가 숙종 5년인 1679년부터 1682년까지 정의현감으로 재임하면서, 일상을 일기체 형식으로 쓴 것인데, 대정현에 속하고(대동여지지) 둘레가 40여 리인(고려사) 섬은 가파도 뿐이라고 특정했다.
이처럼 조선 중기까지는 비양도가 거론조차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섬이 최근에 탄생한 제주도의 막내가 된 걸까.
비양도는 유네스코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할 만큼, 곳곳에 화산흔적이 많아 굳이 고문헌이 아니더라도 젊은 화산섬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게다가 20세기 초 일본 지질학자들이 비양도에 관한 연구결과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나카무라 신타로 일본 도쿄대 지질학부 교수는 「제주화산도잡기」에 그의 논문을 실었다. 고문헌을 고찰하고 제주를 방문해 노인들을 대상으로 탐문 조사한 결과, 1002년 화산폭발로 비양도, 1007년 화산으로 군산도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힌 것.
여기에 한림읍 협재리 한 임산부가 어느 날 지금까지 없었던 섬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치자, 그 자리에 멈추었다는 전설과 비양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한림읍 한림리와 금릉리, 애월읍 곽지리가 천 년 전 화산폭발과 비슷한 시기에 해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까지 보태져 정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철석같이 믿었던 천년의 신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섬 탄생 천년행사」를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상당수 도민과 지질학자들이 『고려사』와 『실록』의 기록만으로 천 년 전 섬을 단정할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한 것. 실제로 다음해 제주도자연사박물관의 조사결과, 섬 북서쪽에서 길이 1~2cm, 두께 0.8cm 크기의 신석기시대 토기 2점이 발견되었다. 이 토기는 4,000~5,000년 전 것으로 이때도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비양도의 전설이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2010년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지질조사를 했다. 비양도를 구성하고 있는 현무암을 알곤-알곤법을 이용해 연대를 측정한 결과, 2만7천 년 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기는 빙하기가 정점에 이른 때로 극지방의 얼음이 두꺼워져 전 세계 해수면이 100m 이상 낮아진 상태이어서 비양도와 제주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비양도가 육상화산에 의한 것이면, 2만7천 년 전 탄생했다는 또 다른 증거이고, 수성화산이면, 바다에서 솟아오른 것이어서 고려사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비양도 오름은 제주에서 유일하게 육상화산일 때 생성되는 쇄설물인 송이로 구성되어 있고, 바닷가에도 송이가 널려있다. 2010년 알곤-알곤법 측정결과와 육상화산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화산흔적으로 보아 천 년 전 바다에서 솟아오르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2016년에도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다. 지난 2016년 4월 암석학회지에 실린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 안웅산 학예연구사의 논문이다. 안 연구사는 고려사에 나오는 섬의 크기와 비슷한 송악산, 비양도, 일출봉을 대상으로 방사성 탄소연대측정기와 광여기 루이네선스를 동시에 이용해 연대측정을 했다. 두 방법 모두에서 송악산은 최소 3천8백 년, 비양도는 4천5백 년, 일출봉은 6~7천 년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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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안 연구사는 고려사에서 바다 속에서 솟아나왔다는 산이 바로 송악산이라고 지목했다. 그 근거로 세 개의 화산체 중 송악산이 가장 젊고, 초기 수성화산활동으로 섬이 생겨났고, 후기 마그마 화산활동이 차례대로 일어나면서 만들어진 화산체가 송악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고문헌에서 1차 폭발을 1002년으로 기록한 것은 탐라인들이 제주의 화산활동을 조정에 보고한 시점이며, 1007년은 태학박사 전공지를 제주에 보내 조사한 때일 것으로 해석했다. 문헌상의 화산폭발 시기에 대해서는 당시는 탐라인들의 시간적 개념이나 단위가 거의 없을 때여서 전공지가 시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했고, 이렇게 채집된 정보를 훗날 지리서 편찬자들이 해석하고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실제 화산폭발과 큰 차이를 보이게 된 것으로 추측했다.
물론, 첨단기기를 이용한 과학적인 연대측정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역사시대 이후의 문헌상 기록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무시할 수도 없다. 고려사나 실록의 내용 대부분이 사실에 부합하는데, 유독 1002년과 1007년 화산기록만 사실과 다른 이유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고려사』는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해 편찬했는데, 몇 천 년의 시간차를 표현하지 못해 바로 어제 일처럼 서술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려사』에는 “탐라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솟아 나오는데 … 중략 … 7주야(晝夜)가 지나서야 개었는데,”라는 대목이 있다. 대부분의 설화나 전래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보태지고 신격화되기 마련이지만, 가장 젊은 화산체로 조사된 송악산과 비교해도 2천8백여 년 전 목격담인데, 그때까지 구전될 수 있었을까. 마치 며칠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졌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이어 “석류황 같기도 하여 사람이 다가 갈 수 없다 하였으나, 전공지가…”라는 내용도 있다. 당시 탐라인들이 아무리 화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해도 2천8백 년 된 화산암과 석류황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임금의 명을 받고 제주에 파견된 전공지는 성종 때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며, 목종이 태학박사에 임명한 엘리트 관료로 현종 3년인 1012년 거란이 강동 6주를 요구하자 담판을 벌여 이 땅을 지켰으며, 1014년 사망했는데, 당대 최고의 외교문장가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이런 그가 2천8백 년 전 이야기를 잘못 알아들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산 밑까지 가 그림을 그렸다고 허위·과장 보고를 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두 번의 연대측정 외에도 여러 차례의 지질조사나 지표조사에서 모두 신석기 이전의 화산체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천 년 전 일이다보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고려사와 실록의 화산폭발 시기만큼은 잘못된 기록인 것 같다. 오래 동안 간직해 온 비밀 하나를 잃은 것 같아 연구자들이 야속하긴 하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이제 탄생 천년의 섬 비양도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섬 중 하나로 고쳐져야 할 것 같다.
첫 사랑은 추억으로 남았을 때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비밀은 비밀로 남았을 때 더욱 소중할 수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더 나아가 그 대상이 국가라 할지라도 과거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한다면, 파헤치고 드러내기 보다는 묻어두고 함께 가야 할 때도 있다. 동서고금, 갈등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다. 대립과 화해를 통해 한 시대를 접고, 또 그렇게 한 시대를 열어왔다. 지금이 용서와 화합으로 또 한 시대를 열어야 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