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국민청원’ 게시판 원조가 신문고?
「조선왕조실록」 - 1401년 7월 18일 대궐 중문 설치, 백성과 직접 소통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
그러나 이 게시판은 익명성을 보장하고 있어 개설 직후부터 부작용이 우려되어 왔다. 최근에는 어떤 연예인을 사형시켜 달라거나 심지어는 특정 판사의 파면을 요구하는 등 분노와 혐오의 글들이 마구잡이로 올라와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이와 관련, 청와대 관계자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실명제로 얻는 것보다는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이 더 중요한 만큼, 국민의 자정능력을 믿고 이대로 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달 tbs의 의뢰로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국민청원’ 게시판 운영에 대해 전국 19세 이상 남녀 5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회갈등을 조장함으로 전면폐지가 32%, 현행대로 운영이 20.1%, 실명제 도입 등 개선 후 운영이 40.2%로 전체적으로는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60.3%인 것으로 나타났다.
직접 청원의 역사는 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태종 1년인 1401년 7월 18일(이하 음력)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임금이 직접 듣기 위해 설치한 신문고(申聞鼓)가 바로 그것이다.
신문고는 요즘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과 견주어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 제도였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태종실록 1401년 7월 18일 기사는 안성학장(안성향교 교원) 윤조와 전 좌랑 박전이 상소한 송나라 태조 때 운영되던 등문고(登聞鼓)를 우리도 설치한다는 내용이다. 13일이 지난 8월 1일 기사는 설치목적과 간단한 운영지침, 명칭을 등문고에서 신문고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만 보면 단 한 번의 회의도 없이, 심지어는 명칭조차 정하지 않은 채 대궐 문 앞에 북만 덜렁 매달아 놓은 셈이다.
신문고의 첫 주인공은 지금주사(知錦州事) 안속이다. 태종실록 1401년 8월 13일 두 번째 기사인데, 신문고를 친 첫 사례이다. 하급 관원이던 안속이 참찬의정부사(의정부 정2품) 조호에게 노비를 빼앗겼다며 신문고를 쳤다. 사헌부의 조사결과, 안속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조호는 오판이라고 주장하며 사헌부를 맹비난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사헌부는 조호에게 업무방해와 명예훼손을 추가하기는커녕, 당초 판결인 보직박탈과 대기발령조차 집행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간원이 직첩의 회수와 국문을 상소했고, 임금이 직첩은 회수하지 않고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국민청원’ 게시판이 지나친 분노와 욕설로 곤혹을 치른 것처럼, 신문고도 초기에는 그동안 참아왔던 청원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태종실록 1402년 1월 26일 세 번째 기사는 의정부가 신문고 실명제를 요구한 상소이다. 신문고 당직원은 북을 치려는 사람이 오면, 사유를 들어보고 역적모의 등 종사와 관계되면 즉시, 그 외의 사안은 청원내용을 접수한 뒤 북을 치게 하는데, 앞으로는 주소와 성명까지 기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생각은 확고했다. 최근 청와대 관계자가 다소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이대로 갈 것임을 확실히 한 것처럼, 태종도 어떤 사유이든 북을 먼저 치게 할 것을 지시했다. 5년여가 지난 1407년 11월 20일에는 형조에서 상소했다. 형조는 잡송(雜訟)이 너무 많아 본연의 임무를 할 수가 없었다. 형조는 노비 관련소송, 각종 분쟁, 성범죄, 절도사건 등이 본연의 임무인데, 사헌부 항소나 신문고 고발사건까지 도맡아 형사사건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것. 이로 보아 신문고는 이때까지는 전담부서를 따로 두지 않고 사안에 따라 사건을 배정한 것 같다.
신문고가 설치된 지 4개월여가 지난 11월 16일이었다. 실록 이날 기사는 경연을 마친 임금과 영사평부사 하윤, 우정승 이무, 판승추부사 조영무가 한가롭게 담화를 나눈 내용이다.
“신료들이 들어올 때, 나갈 때 허리를 숙이는데, 곧장 나가지 불편하게 왜 그러는가. 원나라 예인가?”
“아닙니다. 원나라는 절하고 꿇어 앉습니다. 당과 송의 예인 걸로 압니다.”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가 중국은 어느 대(代)인가? 그리고 신라는?”
“태조는 진나라에서 고명을 받았고, 신라는 한나라 선제 오봉원년에 개국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설치한 신문고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송나라에서 등문고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가. 그럼 진선(進善)의 정(旌, 요제 때 길가에 기를 세워놓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그 아래 서게 함)과 비슷한 거구만.”
이날 대화내용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임금도, 신료들도 신문고가 백성들의 억울한 속사정을 풀어 줄 얼마나 유용한 소통창구가 될지 몰랐던 것 같다.
태종이 신문고 설치를 공식 공표한 것은 6개월여가 지난 다음해 1월 26일이다. “부덕한 사람이 대통을 이어받다보니 태평을 기약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백성들의 걱정을 살피고자 옛 법을 상고하여 신문고를 설치한다. 온갖 정치의 득실과 민생의 어려움이 있어 의정부에 호소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즉시 와서 북을 쳐라. 옳은 주장이면 채택하여 들어주고, 틀린 말이라도 용서하여 주리라” 이 교서는 또 사용례와 금지조항(이하 금조)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당부사항도 덧붙였다. “여러 가지 금조(禁條)를 마련한 것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백성들이 범법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니, 대소신료와 군민(軍民)은 더욱 조심하여 다 함께 태평한 즐거움을 누리자”
임금의 전교가 있기까지 6개월여는 당초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범운영기간과 다름없었다. 실록에는 이 기간 동안 북을 친 사람이 노비를 빼앗긴 지금주사 안속뿐이지만, 금조가 다양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보아 많은 부작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조 중 이를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월소(越訴, 소송절차를 밟지 않고 최상급 기관에 직접 호소)와 반좌(反坐, 가해자가 무고하려 했던 내용과 같은 죄를 적용)이다. 당시 경국대전은 1심은 수령, 2심은 감사, 3심은 사헌부가 맡도록 했는데, 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문고를 먼저 치면 처벌한다는 것이 월소금지이다. 또한 원한이나 재산탈취 등을 목적으로 무고하거나 모함을 하면 똑같은 죄를 묻는다는 것이 반좌처벌이다. 예를 들어 김씨가 아랫마을 이씨에게 소 한 마리를 빼앗겼으니 찾아달라고 신문고를 쳤는데, 거짓이면, 김씨가 같은 가격의 소 한 마리를 이씨에게 변상하게 하는 것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은 추천인이 20만 명 이상일 때 청와대 또는 정부 부처가 직접 답변하는데, 신문고는 이 같은 조건을 따로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집단민원이 유행했다. 태종실록 1403년 2월26일 첫 번째 기사는 갑사들의 청원이다. 출입문 근무자인 갑사 양결과 김출이 출근 중인 사헌부 주부 하연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하연은 “낮고 천한 갑사 주제에… 우리 같은 명문가는 시켜주어도 안한다.”며 조롱했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갑사 10여 명이 사헌부로 몰려가 감찰 신계삼을 폭행했다. 사헌부는 즉각 조사를 시작했고, 갑사들은 일방적인 편파수사라며 500여명이 몰려가 신문고를 울렸다. 그러나 임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것도 없이 갑사들의 잘못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판승추부사 이영무가 갑사들이 오죽 억울했으면, 떼를 지어 왔겠느냐며, 사헌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임금은 한 술 더 떠 떼를 지어 몰려 온 것은 협박이니, 관련자를 모두 구속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3년 후에도 조계종 승려 성민이 수백 명의 승려와 몰려와 노비와 전답을 돌려달라며 신문고를 쳤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1411년 1월 11일에도 집단 청원이 있었다. 사직 김득방을 중심으로 군졸 300여명이 신문고를 울리며 군량미 배급을 늘려 달라고 호소했다. 집단 청원에 거부감을 보여 왔던 태종이었지만, 이날은 흔쾌히 그렇게 하라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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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관료들에게 신문고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만큼이나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신문고가 설치된 지 5년여가 지난 1406년 11월 8일 임금은 신문고를 관리하는 순금사에 짧지만, 단호한 명을 내린다. “신문고를 쳐서 호소하려는 자를 방해하지 마라. 만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사헌부는 직접 수사하여 엄벌에 처하라.”이 기록만으로 전후사정을 알 수는 없으나, 백성들의 청원을 막으려는 관료들의 횡포가 여전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세종실록 1428년 5월 24일 두 번째 기사는 사노비 자재가 광화문의 종을 친 사연이다. 한밤중 광화문에서 큰 종소리가 들리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 승정원 승지들이 달려가 사연을 물었다. 억울한 일이 있어 신문고를 치려했으나 의금부 당직원이 이를 막았다는 것. 조사결과 모두 사실로 밝혀져 관련자들이 모두 파면 당했다. 정조 때는 관리들의 웃지 못할 꼼수도 있었다. 한동안 북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를 수상히 여긴 임금이 직접 신문고를 찾아가 살펴보았다. 어이없게도 관리자들이 북을 누구도 칠 수 없는 높은 곳에 메달아 놓은 것이었다. 격노한 정조는 궐 안에도 신문고를 설치해 함부로 옮기거나 방해하지 못하게 한편,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신문고를 칠 수 없을 때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격쟁법을 제정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임금일수록 신문고가 두려웠다. 어린 조카의 왕위찬탈 때문에 자신이 없던 세조가 특히 그랬다. 어느 날 아침 북소리에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깨었다. 눈치 빠른 내관이 신문고가 아니라, 아침 시간을 알리는 누고(漏鼓) 소리라고 보고했지만, 세조는 뛰는 가슴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온갖 이유를 붙여 신문고를 폐지했는데, 훗날 엉뚱한 자리에서 밝혀졌다. 성종 2년인 1471년 12월 15일이었다. 경연을 마친 임금과 신료들이 한담을 나누던 중 임금이 뜬금없이 신문고가 왜 폐지되었는지 물었다. 이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홍윤성이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고, 이 자리서 신문고의 재설치가 결정되었다.
이렇게 부활한 신문고는 연산군 때 다시 폐지되었고, 영조 때 다시 설치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신문고가 점차 사소한 사건으로 넘쳐나자 그 내용을 부자(父子), 적처(嫡妻), 양천(良賤), 형륙(刑戮, 사형) 등 4개 분야로 엄격히 제한하는 사건사(四件事)가 정해졌고, 이를 들어 신문고가 진정한 민의의 소통창구가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백성의 소리를 외면한 군왕은 없었다. 임금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 백성들은 신문고 대신 벽서와 익명서로 항거했고, 세도가들이 언로를 막으면 몸을 던져 행동으로 저항했다. 민심은 천심이다.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