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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원 비판 앞장섰던 '공격수'... 기록물 보호 '수비수'로
- 세계일보, 이소연 국가기록원장 취임 1주년 기념 인터뷰 -
프로스포츠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상대편의 핵심 선수를 거액을 주고서라도 데려오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팀의 전력상승과 라이벌 팀의 전력 약화. 적일 때는 가장 두렵지만 우리 편이 되면 든든한 전력은 반드시 영입해야 할 1순위 대상이다.
이명박·박근혜정부 시절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기록학회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창이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의 원인이 됐던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과 무단 파기 사건’, 박근혜정부의 기록물 무단 파쇄 등 기록물이 제대로 생산되고 보존되지 않을 때마다 이 원장은 국가기록원과 정부 비판에 앞장섰다. 그랬던 공격수가 지난해 11월30일 최초의 민간출신 국가기록원장으로 임명됐다. 학계의 최전방 공격수로 감시하고 비판하던 이 원장의 포지션은 국가기록원의 수장이 되면서 상대 팀의 최후방 수비수로 바뀌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상대편 에이스를 영입해야 할 만큼 국가기록원과 공공영역의 기록물 관리 시스템은 그만큼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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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취임 1주년을 앞두고 경기 성남시 서울기록관에서 만난 이 원장은 “국가기록원장으로서는 우선 수비수”라며 “학자로서는 기록물 공개와 활용을 위해 목소리를 냈지만, 원장으로서는 활발한 기록물 생산을 위해서 보호해야 할 기록물을 확실하게 보호해준다는 믿음을 주는 일이 공개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부당한 지시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시키면 안 되는 일을 시킬 수 없게 만드는 제도는 결국 기록”이라며 “공직자가 기록을 남기면 국가기록원이 책임지고 보호해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국가기록원이 지난 10년 동안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에 사과하는 자리였다. 취임 후 만든 국가기록관리혁신 TF에서 봉하마을 이지원 시스템 이관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등 11개 사건의 진상규명을 권고하고 20개 세부 혁신과제를 제시했다. 이를 엄중히 받아들이고 국가기록원이 바뀌겠다는 다짐과 약속을 공식적으로 한 셈이다.”
“이는 비단 국가기록원만의 잘못은 아니다. 정부와 학계, 시민단체 모두가 기록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이 있다. 국가기록원이 잘못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더 지적하고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학자로서의 제 책임도 있다. 다만 기록공동체 안에서 국가기록원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매우 크기 때문에 국가기록원의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서 뜨겁고 매섭게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는 반성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면서 뒤를 되짚어보는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있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지난 10년에 대한 성찰은 1∼2달, 1년 안에 해결될 게 아니다. 지난 3월 성찰백서를 작성해서 연말에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발간은 조금 늦어질 거 같다. 성찰은 명령형으로 성립되지 않는 몇 안 되는 말이다. 사랑하라고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듯이 성찰하라고 성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찰의 주체가 오롯이 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만 가능하다. 외부의 요구와 압력에 떠밀려 하는 것은 거짓이다.”
“국가기록원 내부의 구성원들이 성찰의 주체로서 인식하고 혁신의 원동력을 공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외부의 압력은 높았지만 과연 이걸 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불안과 걱정도 컸을 것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과 공공기록물법 개정 작업을 마무리한 뒤 지난 6월부터는 혁신과제를 놓고 직원들과 학습하고 토의하는 일을 이어왔다. 기록학계와 국가기록원의 소통이 막히면서 현장은 현장대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기계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학계는 관념의 틀 안에서 현실을 쫓아가지 못했다. 현장과 이론이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에 국가기록원장에 지원했다. 이론이 벽에 부딪히면 현장의 귀납적 사례로 구체화해 벽을 넘을 수 있다. 현장의 귀납적 사례로 도전하다가 현실의 한계에 부닥칠 때는 이론의 힘으로 뚫고 가야 한다.”
”공공기록물법은 기존의 합의가 된 내용까지만 담겼다. 국회에서도 큰 쟁점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청와대 문건 파기와 영포빌딩 무단기록물 반출 사건 등으로 문제점이 다수 드러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대폭 개정됐다. 학계에서는 아쉬움도 있겠지만 당장 개선할 수 있는 문제, 개선해야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개정안을 만들었다.”
“생산·관리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기록물의 생산현황 통계를 매년 국민에게 공개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생산된 기록물을 이관 시 누락하거나 은폐하는 시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기록물의 무단파기, 유출 등에 대한 처벌규정을 명확화하고 내용 유출에 대해서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탄핵과 같은 대통령 궐위 시 대통령기록물의 이동, 폐기 등을 금지하고 대통령기록관으로 기록물을 이관하는 방안을 강구해 긴급한 상황에서 대통령기록물이 멸실·유출 되지 않도록 했다. 차기 대통령 선거까지 3년 반이 남았지만 대통령기록물 이관 절차를 생각한다면 결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기록이관은 장기이식수술과 같다. 두 번 시험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청와대에 보존된 기록을 고스란히 대통령기록관으로 옮기려며 기록물 분류와 이관, 진본성 검증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하루빨리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사실 대학에서 기록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 지금 부산대에 있는 설문헌 교수의 제안 덕분에 기록학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2001년 설 교수가 기록물관리의 기술표준을 연구하는 과제의 상근연구원을 찾고 있었다. 월급 120만원에 사무실과 비상근연구원도 붙여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의 연구과제였다. 연봉 56만원짜리 시간강사가 월 120만원 월급의 연구원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동안 내 돈 내면서 공부만 했지 누가 공부하라고 돈 주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웃음). 오히려 연구를 시작하면서 기록학의 가치와 매력을 알게 됐다. 당시 함께 연구하던 비상근연구원을 포함해 9명이 5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세미나를 열었다. 하루에 8∼9시간씩 토론하고 연구했다. 너무 행복하더라. 그래서 기록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기록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적 관심사만 다루기보다는 현장에서 필요한 분야를 닥치는 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1년 전 취임식 동영상을 다시 봤다. 전문성과 독립성을 가장 강조했다. 이건 국가기록원이 존속하는 한 지켜가야 할 가치다. 전문직은 사회가 필요로하는 서비스를 교육받은 소수에게 특권과 함께 사회적 책무를 맞긴 것이다. 복잡한 지식과 고도의 기술을 갖췄다고 무조건 전문직이 되는 건 아니다. 독립성을 잃고 특정 계층이나 기관에 충성하면서 사회적 책무를 망각하면 우리 사회와 전문직이 맺은 사회적 계약은 훼손된다. 비판적 성찰과 윤리적 각성 위에서만 전문직이 올바로 설 수 있다.”
“기록의 의미를 찾고 싶다. 기록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은 기록은 때때로 핵심 정보를 가릴 위험이 있다. 기록학에서 제일 중요한 분야가 바로 선별과 평가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슨 기록을 남겨야 할까. 어떤 기록이 중요할까.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임기 중에 우리가 생산하고 등록해야 할 기록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려고 한다.”
“공공업무의 철저한 기록화. 가장 일상적인 것과 특별한 과제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예산 지출·결산, 업무추진비, 특수활동비 등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일상을 남기는 것은 투명한 행정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국정과제·시책과제, 예산이 100억원이 넘는 사업 등 특별한 과제도 함께 남겨야 한다. 모든 기관이 제각기 기록을 남기는 상황에서 우선 각 기관에 배치된 기록물관리사가 기관의 사명과 역할을 토대로 남겨야 할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들의 역할을 지원하고 체계적인 기록물 보존 제도를 갖추기 위해서 지방기록관 설치와 기몰물관리사 인력 충원을 위한 예산 확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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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국가기록원의 개혁과 공공기록물 관리 제도의 혁신을 바란 이 원장은 끝으로 공공기록물법 개정안에 반영된 두 가지 내용에 주목해달라고 당부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공직자 개인에게는 기록물을 생산할 책임이 강화되고 기관장에게는 조직원의 기록관리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훈련 책임이 부여됩니다. 기록물을 잘못 관리했다고 문책만 하기보다는 충분한 교육으로 생산 단계에서부터 제대로 기록물을 등록해 보호·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공직자 모두는 기록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