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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평양 탈환의 주역, 조선판 잔 다르크 “계월향”

「조선왕조실록」 - 조·명연합군 총공격 앞 두고 적장 목 베 전의 상실

조·명연합군은 1563년 1월 8일 이른 새벽부터 왜적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에 총공세를 퍼부어 그날 밤 늦게 6개월여 만에 성을 되찾았다. 이날 조·명연합군의 승리는 숫적 우위에도 있지만, 왜적의 사기저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 공격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던 1562년 12월말 평양기생 계월향과 그의 연인 김응서 장군은 007영화를 방불케 하는 비밀작전으로 적장의 목을 베 성문 위에 내걸었고, 이를 본 왜적들이 전의를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임진왜란의 영웅하면 3대 대첩의 주역인 이순신, 권율, 김시민 장군을 떠올리는데, 이는 17세기부터 널리 읽히기 시작한 「징비록」의 영향이 크다. 이 기록은 18, 19세기 일본과 청나라로 건너가 임진왜란을 보는 한·중·일의 시각을 비슷하게 했다. 학계에서는 만약 「징비록」을 쓴 유성룡이 남인이 아니라. 서인의 누군가였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른 영웅이 탄생했을 수 있고, 무능한 패장 원균도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적지 않다.

실제로 같은 시대, 같은 전쟁의 영웅이라도 어느 시대, 어떤 지역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과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가 임진왜란의 영웅이지만, 북한에서는 생소한 인물이다. 이를 대신해 적장 고니시 히(小西飛)의 목을 밸 수 있게 한 계월향과 그녀의 연인 김응서 장군이 영웅이다.

  • 계월향 초상화

  •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영웅을 갖게 되었을까. 임진왜란 전후 사회적인 배경이나 역사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 중에 하나는 남북 분단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낮 설지만, 계월향은 논개와 함께 조선의 2대 의기(義妓))이다.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월향의 순절은 전설이 되어 여러 문집을 통해 전해졌고, 200여년이 지난 1815년에는 초상화가 그려져 평양 장향각(藏香閣))에 봉안되었다. 이어 1835년에는 평안감사 정원용이 사당과 비석을 세워 그녀의 공을 기렸다. 국왕의 어진이나 정승의 반열에 오른 사대부들의 전유물이던 영정을 여성을, 그것도 기생을 대상으로 한 것은 당대의 윤리기준에 비추어 일대사건이었다.

    평양 중심의 영웅이던 계월향은 일제강점기 들어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목숨을 던져 적장의 목을 벤 그녀의 충정이 나라를 빼앗기고 분노의 시대를 살던 민중들에게 큰 카타르시스가 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21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는 그녀의 사당인 평양 의열사 제사소식을 보도했고, 일제는 1928년 「계월향전」의 출판을 금지시켰다. ‘계월향이여,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로…’로 시작되는 만해 한용운의 시 「계월향에게」는 그녀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박종화가 「논개와 계월향」이라는 소설을, 1977년 임권택 감독이「임진왜란과 계월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으나,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조금씩 잊혀졌다.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게월향이 배를 갈라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개길을 가루개라는 지명으로 불러왔고, 지난 1955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이 일대를 그녀의 이름을 따 월향동으로 개칭했다. 문화예술분야에서도 1955년 당시 최고의 여배우 리금숙이 주연을 맞았던 「계월향과 김응서」가 큰 인기를 모았으며, 2010년 방송된 드라마 「계월향」은 북한판 「대장금」이라고 할 만큼 대박을 냈다. 이밖에도 북한에서는 평양민속공원에 김응서의 생가를 복원하는 등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자리를 굳혀왔다.

계월향과 김응서 이야기는 몇 가지가 있는데, 임진록을 비롯한 평양일대 구전설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1592년 6월 11일 전투 한번 해보지 않고 평양성을 내주는 바람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계월향은 포로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인척으로 가장 신임 받던 부장 고니시 히의 애첩이 되었다. 그녀는 전쟁 이전부터 평양성 군관이던 김응서(1564~1624)와 연인관계였는데, 평양성 서문 근처에서 만나 적장을 베기로 계획하고, 그를 난리 중에 헤어진 오빠라고 속여 성으로 잠입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조선 군관이 평양성에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은 요즘의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와 같은 완충지역이 있어 가능했다.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잦은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평양성 성곽으로부터 서쪽 10리 까지는 군 병력이 출입하지 않기로 조약을 체결했다. 따라서 민간인들은 성벽 바로 아래까지 접근이 가능했고, 첩보활동을 주된 임무로 했던 김응서가 계월향을 만나 암살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1592년 11월 30일 기사는 김응서의 조약위반을 지적한 내용이다. 이날은 평양성 공격을 앞두고 종합적인 상황을 점검하는 회의였는데, 도원수 종사관인 유희서가 심유경의 근황을 보고하는 대목이 있다. 경계를 정한 뒤에는 왜적이 이를 넘지 않는데도, 김응서가 수철교(水鐵橋)에서 왜적 4명을 격살한 것은 잘못이라며, 심유경이 격노했다는 것.

또한 이날 회의에서는 김응서의 체탐(첩보)보고와 명나라 제공정보가 큰 차이를 보인다는 내용도 있다. 김응서는 평양성 내 왜적의 수를 3~4천명이라고 보고했는데. 심유경은 1만3~4천명이라고 주장한 것. 그러나 어느 쪽이 맞든 조·명 연합군이 워낙 많아 대세에는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로 보아 김응서는 적정 파악을 위해 근접 거리까지 접근이 가능한 서문을 중심으로 첩보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계월향은 그런 그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심지어 이날 회의에서는 왜적의 복장(服裝)까지 점검했다. 임금이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왜적들은 바지를 입지 않는다는데, 사실인가?” 이 추운 날씨에 바지를 입지 않고 전투를 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었다. 종사관 유희서가 그들은 눈과 추위에도 바지는 물론, 맨발로 출몰하기도 한다고 보고했다. 임금은 추위가 왜적의 전투력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실제로 평양성전투 그림을 보면 한겨울임에도 왜적은 종아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상의도 반소매차림이다.

    이렇게 평양성전투가 준비되고 있는 동안 김응서는 적장의 애첩이 된 연인을 만나 적진 깊숙이 잠입할 수 있었고, 며칠 후 고니시 히가 깊이 잠들자 김응서를 불러들여 단칼에 목을 베었다.
  • 평양성전투도

여기까지가 여러 기록이 대체로 일치하는 대목이고, 계월향의 죽음과 김응서의 탈출과정은 시대나 저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다.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임진록과 구전설화는 적장의 목을 들고 함께 평양성을 넘으려 했으나, 곧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계월향은 장군은 꼭 탈출해 나라를 구하라며 등을 떼민 뒤 자결했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 선 김응서가 성문 높이 왜장의 목을 내걸어 승전으로 이끌었다는 내용이다.

  • 그녀에 대해 기록한 상단부분

  • 그러나 그녀의 초상화에 쓰여 진 내용은 그렇지 않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 2010년 7월 일본 교토에서 입수돼 국내로 반입된 「계월향초상화」를 특별 공개했다.

    이 초상화는 그녀를 추모할 목적으로 1815년 제작돼 평양 장향각에 봉안되어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림 상단에 그녀의 공적을 상세히 남겼다. 여기서는 둘 다 성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계월향의 청으로 김응서가 벤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긍익(1736~1806)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계월향 이야기를 실었는데, 임진록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김응서와는 연인관계가 아니었고, 계월향을 탈출시켜 주는 조건으로 김응서의 잠입을 도왔고, 그녀의 청이 아니라 자신의 탈출을 위해 그녀를 살해했다는 것. 연려실기술 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경학(經學)부터 실학(實學)까지 자신의 저서를 총망라한 「연경제전집(硏經齊全集)」을 지은 성해응(1769~1839)도 자신의 저서에 소개했는데, 이긍익과 다르지 않다.

계월향은 충절과 지략, 담력까지 겸비한 영웅이었지만, 문학적 소양도 높았다. 그녀는 임을 보내는 안타까운 마음을「송인(送人)」이라는 시에 담았는데, 문체가 수려하고 서정적이다.

대동강 가에서 정든 임을 보내니(大同江上送情人)
천개의 버들가지로도 우리 임 메어두지 못하네(楊柳千絲不繫人)
눈물 머금은 채 서로 마주 보며(含淚眼着含淚眼)
애간장 끊어지는 슬픔을 삼킬 뿐이네(斷腸人對斷腸人)


계월향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지, 김응서가 출세욕에 눈이 멀어 연인을 이용했는지 기록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성장과정과 결과만 놓고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그는 천민신분을 감추고 무과를 거쳐 감찰에 올랐으나 신분이 드러나 파직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었다. 평양탈환에 기여한 공로로 신분의 한계를 떨쳐버리고, 승승장구해 평안도방어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 요직을 두루 지냈기 때문이다.

  • 실록 1592년 9월 4일 기사는 비변사가 김응서의 특진을 건의한 내용이다. 평양의 왜적은 선봉 정예병으로 그들의 수급 하나는 다른 왜적 열 개를 얻는 것과 같은데, 김응서는 기복종군(起復從軍, 스스로 돌아와 종군함)하여 항상 앞장서며 많은 공을 세웠고, 이번에 또 적의 수급을 열 개나 베었으니 특별히 논상할 것을 건의했고, 상은 즉석에서 특진을 명했다. 기록으로만 보면, 그는 1956년 8월 신분이 드러나 파직당한지 6년여 만인 1562년 6월 이전에 복직해 무보직 군관으로 종군했다. 실록 같은 달 13일 기사는 김응서가 대동강 상류에 배치되었다는 보고이고, 같은 해 8월에는 비변사가 왜적 20여명을 참살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실직(實職)을 건의해 윤허를 받은 기록이다.

    이처럼 김응서는 복직 이후 수 없이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는데, 특히 체탐(첩보)에 능했다. 평양성수복 이후 김응서는 항왜(투항한 왜적)를 중심으로 한 탄탄한 인맥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최전선에서 왜적과 교섭을 담당했다. 당시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강화협상을 진행 중이었는데, 조정은 군사정보에 밝은 김응서와 사명대사를 통해 독자적인 강화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조정의 이 같은 방침이 시달되자 즉각 평소 구축해 놓았던 왜적 내 인맥을 가동해 함안에서 회담을 갖기로 했다.

    김응서의 주도로 1594년 11월 함안에서 개최된 협상에서 그가 보여 준 능란한 외교술이 오히려 조·명 양국의 의심을 샀다. 실록 1595년 5월 1일 기사가 김응서의 추국을 명한 내용이다. 이날 임금은 지난번 회의에서 김응서가 적장을 사사로이 만난 것도 문제지만, 일본이 나라의 적인 것을 잊고 적장 소서행장에게 대인이라고 한 것은 심히 경악할 일이다. 이는 적국에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잡아다 추국하라 명했다. 6개월 전 함안협상 본 회담에 앞서 양측 대표가 덕담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김응수가 사용한 외교적 수사를 문제 삼은 것이다.
  • 김응서 초상화

그럼에도 조정은 김응서를 협상 대표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순신과 원균, 모두를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징비록」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신의 정적인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기 위해 해전에 강한 조선이 곧 건거 올 가토를 바다에서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는 정보를 김응서에게 전했고, 이를 조정에 보고한 것으로 기록했다. 조정은 이 정보에 따라 이순신 장군에게 공격을 명했으나. 장군이 이를 믿지 못해 공격을 거부하다 문초를 당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김응서에 대한 불신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숙적인 원균도 김응서를 미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으로 수군을 지휘하게 된 원균이 명나라와 연합해 부산을 총공격하기로 했는데, 김응서가 고니시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떠벌리는 과정에서 실수로 이 작전을 노출시켜 원균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격언처럼, 체탐으로 잔뼈가 굵은 김응서는 체탐으로 생을 마감했다. 조·명연합군으로 강홍립과 함께 참전한 김응서는 전투하는 척 흉내만 내라는 광해의 중립외교지침에 따라 후금과의 두번째 전투에서 자발적 포로가 되었다. 조선군 총지휘관이던 강홍립은 임금의 방침에 충실한 반면, 김응서는 적진에서도 체탐활동을 벌여 중요 정보를 국내로 보내다 발각되어 1624년 처형되었다. 그는 임금의 명에 따라 포로가 되었고, 그 이후로도 군인의 본분을 다했으나, 조정의 신료들은 그를 명을 버리고 오랑캐에 투항한 변절자로 인식했다. 김응서가 영의정에 추증된 것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

김정은 위원장 서울 답방이 당초 기대 보다 다소 늦어지고 있으나, 지난 26일 남북철도 및 도로연결사업 착공식이 개최되는 등 나머지 평양공동선언 실천방안들은 하나둘씩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 멀지 않아 남북철도가 연결되고 한반도 평화체계가 구축되어 진주대첩이 있었던 10월엔 진주 남강유등축제로, 계월향이 순절한 12월엔 평양으로 기차 타고 나들이 가는 그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