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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전 세계인의 축제

< 월드컵과 올림픽 >

01 제22회 카타르 월드컵

11월 28일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이번 대회는 12월 18일까지 카타르 도하와 주변 5개 도시에서 열리며, 월드컵 역사상 아랍권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다. 보통 월드컵은 6~7월에 열렸으나 올해는 카타르 지역의 더운 기후로 인해 좀 더 늦은 시기에 열리게 되었고, 총 32개국 팀들이 본선에 진출해 경기를 치른다. 이번 호에서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지구촌 대축제 월드컵을 맞아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올림픽과 월드컵의 유치과정, 그리고 당시의 영광을 되돌아본다.

02 손에 손 잡고, 서울 올림픽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한민국 서울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열렸다. 개막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당시 김포공항에는 연일 약 1분 간격으로 각국 선수단과 관광객을 실은 비행기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실로 사상 초유의 장관을 연출하면서 우리들의 심장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울올림픽 공식 주제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전 세계를 향해 쏘아 올리는 서울올림픽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한국이란 나라의 이미지가 어떻게 떠오를지 전 세계의 이목(耳目)이 온통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에 쏠려 있었다.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의 문화와 정신, 발전과 변화의 역동성, 투혼을 보여줄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올림픽을 개최하는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국력과 문화와 산업, 경제에 대한 신뢰는 물론 자기네 나라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 든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올림픽 개최를 꿈꾸는 것이다.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우리의 계획은 1979년부터 시작했다. 그때 국민체육진흥심의회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의 서울유치계획을 의결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우리의 결의를 대내외에 발표했다. 이로써 우리는 올림픽 유치경쟁에 뛰어든 것이었다. 후보도시는 대한민국 ‘서울’과 일본 ‘나고야’로 좁혀졌다.

드디어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는 79명의 IOC위원들이 투표에 들어갔다. 모든 국민이 한밤중에 잠을 설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입에서 서툰 발음으로 ‘쎄울’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부둥켜안고 감격의 환호성을 울렸다. 대한민국 서울이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날로부터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 1988년까지 우리는 모든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했다. 당시로는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160개국, 8,391명의 최대 규모의 선수단이 참가했으며, 동서진영의 ‘화합과 전진’을 목표로 인류평화의 대축제가 서울에서 열렸다. 최고 수준의 시설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과학올림픽, 한국적인 멋을 담은 독창적 문화예술, 성숙된 국민의식을 보여주며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특히 개발도상국이자 분단국가로서는 처음 개최하는 올림픽으로 주목 받았다.

23개의 정식종목과 3개 시범종목에서 한국은 종합 4위라는 역사상 최고 성적까지 얻었다. 서울올림픽 기간 중 각종 학술대회와 음악제, 국악제, 무용제, 연극제, 전시회 등의 문화행사가 펼쳐졌고,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관광, 전자, 통신, 스포츠용품 등의 산업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은 지구촌 중심국가로 떠올랐다. 성공적인 국제스포츠대회를 우리가 해낸 것이다.

  • 제24회 서울올림픽 성화
    그리스 헤라신전에서 채화(1988)

  •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최종주자 성화봉송하는 모습(1988)

  •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행사(19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나라들은 직접 또는 영상으로 흘러나오는 대한민국의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분단국가가 어떻게 저런 훌륭한 문화를 간직하고 놀라운 경제적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서울올림픽이 있기 전까지는 한국이란 나라가 지구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잘 몰랐던 나라들도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경의를 표했다. 이 모든 것이 서울올림픽 개최로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때 얻은 자신감과 성취감은 14년 후 2002년 월드컵 개최로 이어졌다.

03 꿈은 이루어진다! 2002 월드컵

우리나라가 월드컵 유치경쟁에 뛰어들기로 결정했을 때는 이미 일본이 훨씬 앞서 표를 다져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아무도 2002년 월드컵의 한국 유치를 낙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본과 유치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1996년 5월 31일 스위스의 국제축구연맹(FIFA) 본부에서 투표를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공식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이었고, 기본이념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로 정해졌다. 월드컵 사상 초유의 2개국 공동개최의 선례를 만들어냈고, 아시아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치러지는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가 되었다.

  •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활동
    계획 보고(1993)

  • 2002년 월드컵축제
    한·일 공동개최(1996)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31일간 한국과 일본에서 또 하나의 지구촌 국제스포츠대회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도 또다시 우리는 전 세계가 놀랄만한 대한민국의 달라진 모습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굶주림에 허덕이던 변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열띤 응원문화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의 주도 아래 남녀노소 모두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열심히 응원전을 펼쳤다. 그때 등장한 키워드가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와 “꿈은 이루어진다.”였다. 국민들은 아리랑을 응원가로 편곡해 목이 터져라 부르고,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엔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거나 얼굴에 색칠하고 거리를 활보했다. 우리 대표팀은 훌륭한 경기력을 보이며 월드컵 4강 신화도 이뤘다.

  • 2002 월드컵 개막식

  • 2002 월드컵 응원 인파
    (한국-이탈리아전)

  • 2002 월드컵 4강전(한국-독일)
    애국가 제창(2002)

그 후로 우리나라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광주 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했고, 굵직한 국제스포츠대회 가운데 마지막 남은 빅게임이라 할 수 있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2018년에 성공적으로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