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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독립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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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격분한 1905년 11월 기산도(奇山度)와 그의 동지들, 1907년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와 그의 동지들에 의하여 매국 오적(五敵)을 처단하기 위하여 실행된 일련의 의열투쟁. 유림이나 관리들은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순국하는 등 자신들의 반대 의견을 표시하였다. 반면 늑약 체결에 앞장 선 을사오적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의열투쟁 전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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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과정]

1905년 11월 17일 밤 강요된 을사늑약 조인 소식은 이튿날 서울 시내에 퍼졌다. 무관학교 생도이던 기산도는 이에 찬성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오적(五賊)의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동지 박종섭(朴宗燮), 박경하(朴敬夏), 안한주(安漢朱), 이종대(李鍾大), 김석항(金錫恒)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어 권총 3정과 실탄, 비수 네 자루를 구하고, 손성원(孫聖元),박용현(朴鎔鉉),김필현(金弼鉉),이태화(李泰華) 등으로 하여금 오적의 동정을 정탐케 하였다. 의거계획은 일본인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吉)의 부하에게 탐지되어 기산도 등 6명이 체포됨에 따라 1차 거사기도는 실패하였다. 이들은 경무청에서 혹심한 고문을 당한 후 석방되었다. 기산도는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종로에서 박제순, 전동 길거리에서 권중현을 습격하였다. 이어 1906년 2월 16일 밤에 기산도는 동지 이석범(李錫範),이근철(李根哲)과 함께 이근택의 침실에 잠입하여 그의 몸 여러 군데를 칼로 찔렀다. 비명소리에 경비병과 순검(巡檢) 10여 명이 달려오자, 기산도 등은 몸을 피하였다. 10여 곳을 칼에 찔린 이근택은 1개월 여의 치료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기산도와 다른 10명의 의사들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나인영,오기호 등은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동양평화론을 내세운 재야 정객조차도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이들은 을사오적을 직접 공격하기 위하여 1906년 12월부터 준비를 진행하였다. 자신회(自新會) 조직은 이를 실행하는 중심단체였다. 거사일은 1907년 3월 25일 아침으로 결정하였다. 행동대원들 부주의와 5적의 늦은 출타 등으로 박제순,이완용 등에 대한 공격은 실패하였다. 반면 권중현에 대한 습격은 권총을 발사하여 즉살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아침에 울린 총성은 서울 시민들을 긴장시키는 한편 일제 앞잡이들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군인,경찰의 삼엄한 경계와 일부 가담자들이 검속되자, 4월 12일 나인영,오기호,김인식 등은 평리원에 찾아가 자수하였다. 이들은 의거 동기를 밝히는 동시에 재판과정에서도 자신들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베인다”는 변론은 방청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심어 주었다.

[의의]

의거는 을사5적 당사자는 물론이요 일본 침략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을 긴장시키는 동시에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한,일 군경 당국은 5적 대신들의 집을 엄중 파수함과 아울러 인근 통행인들도 수시로 검문하였다. 5적의 출행시에는 언제나 순검과 일본 헌병이 따르고 경계하였다.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국민적 항의와 울분은 여러 형태로 표출되었으나, 가장 적극적인 항쟁의 사례가 기산도 등의 의거였다. 이는 1907년 나인영,오기호의 5적멸살 기도, 1909년 안중근(安重根)의 이토오 포살,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 습격 등의 의거로 이어졌다. 특히 일제강점기 의열단 활동, 윤봉길(尹奉吉)의거 등 일제 침략기관이나 일제 침략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등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정신적인 기반이었다.

글: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