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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동양의 양 끝, 한 - 터키 왜 형제의 나라인가?

「삼국사기」 - 투르크족 선조 돌궐과 고구려 당나라에 맞선 동맹

한국전쟁참전 터키군 우표(소장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뮤지엄(http://emuseum.go.kr)

한국전쟁참전 터키군 우표(소장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뮤지엄(http://emuseum.go.kr)

지난 8일은 우리나라와 터키가 수교를 맺은 지 6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터키'하면 대체로 동·서양이 공존하는 나라, 이스탄불, 6.25 전쟁 참전국가, 피로 맺은 형제의 나라 등을 떠올릴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피로 맺은 형제의 나라’는 6.25 전쟁 참전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터키는 전쟁기간 중 4차례에 걸쳐 22,006명을 파병해 그 중 724명이 사망하고 166명이 실종됐다. 이는 유엔군 중 파병규모로는 네 번째, 전사자로는 두 번째여서 그럴 만도 하다는 의견이 많다. 당시 터키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 있었다. 고교생들이 형제의 나라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왜 지원군을 보내지 않느냐며 시위를 벌인 것. 이에 터키정부가 지원병을 모집하자 순식간에 파병인원을 넘어선 것이다. 현재 부산 유엔군 묘지에는 462구의 터키 군인이 잠들어 있는데, 이는 전사하면 24시간 이내에 군복을 입힌 채 전장(戰場)에 묻는 터키 풍습에 따른 것이다.

왜 터키 젊은이들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먼 이국 땅 전쟁에 앞 다투어 지원했을까.

  • 유엔 연합군 파병을 앞둔 터키군(1950)

    유엔 연합군 파병을 앞둔 터키군(1950)

  • 한국전 참전 터키군 부사령관이었던 Pamir 대령의 장례식(1952)

    한국전 참전 터키군 부사령관이었던 Pamir 대령의 장례식(1952)

그들은 한국이 피로 맺은 형제의 나라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터키 역사교과서에는 그들의 조상으로 6~7세기 몽골일대에서 크게 번성했던 돌궐(突厥)과 고구려의 관계, 후() 돌궐제국이 당나라에 패망한 이후 오늘의 터키에 이르기까지를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돌궐은 터키와 전신인 오스만투르크를 세운 투르크족의 한자 음차표기이다. 유목민이던 돌궐은 4~6세기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제패했던 유연(柔然)의 지배를 받았다. 주변국을 위협할 만큼 세력을 키운 돌궐의 강력한 지도자 부민이 유연 공주와 혼인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552년 유연을 무너트리고 스스로를 카간(황제)이라 칭하며 돌궐제국을 세웠다.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차지한 돌궐은 수나라를 위협하는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으나, 부민 카간이 죽자 몽골일대를 지배하는 동돌궐과 중앙아시아부터 카자흐스탄까지를 차지한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결국 동돌궐은 630년 당나라 명장 이정이 이끄는 군대에, 서돌궐은 657년 소정방의 군대에 각각 멸망했다. 8세기 들어 후 돌궐을 세우기도 했으나 얼마가지 못해 멸망했고, 이때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을 거쳐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르는 길고 긴 민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돌궐족(이하 투르크) 중 셀주크가 이끄는 부족이 11세기 중동과 지금의 터키 일부인 소아시아에 세운 나라가 셀주크투르크이다. 이후 이 나라는 십자군과 맞설 만큼 강성했지만,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에는 힘없이 무너졌다. 또 다시 민족 대이동을 해야 했는데, 이때 나타난 걸출한 지도자가 오스만이다. 소아시아 내륙 깊숙이에 자리 잡은 이 지도자가 1299년 세운 국가가 제1차 세계대전이 있기까지 북아프리카부터 중동전역, 북유럽 헝가리 일부까지 3대륙에 걸쳐있던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이며, 1922년 건국된 터키공화국의 전신이다.

지난해 7월 16일부터 10일간 터키에서는 한-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양국의 문화·고고학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프로젝트」를 가졌는데, 양국의 참석자들은 이 같은 터키의 역사에 동의했으며, 우리나라 참석자들은 6세기 이후 투르크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힌 다양한 연구결과를 발표해 현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받기도 했다.

터키 현지에서 열린 수교 60주년 학술·문화심포지움에서 한-터키 관계가 2천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기록으로 입증되는 구체적인 교류는 6세기 중엽부터라는 것이 양국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양원왕 7년인 551년 7월 돌궐이 백암성을 공격해 고흘 장군이 이끄는 1만 명이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56년이 지난 영양왕 8년인 607년에는 돌궐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수나라 양제를 만났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보아 건국 초기에는 유연과 가까웠을 고구려를 의심했으나, 점차 수나라에 대응하기 위한 연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나라 2대 황제로 즉위 3년째인 양제가 계민 카간을 직접 찾아간 것은 북방 이민족들의 이간책과 위력행사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사신은 돌궐과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는데, 양제는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고구려 사신을 보자 이를 눈치채고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다. 이날 고구려 사신과의 만남에 대해 수서(隋書, 636년 장손무기, 위징 편찬 수나라 역사서)가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계민은 고구려 사신과 양제가 만나는 것이 꺼려지기는 했지만, 이 일을 숨겼다가는 더 큰 후환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고구려 사신을 양제에게 데려갔다. 이 자리에서 양제는 버럭 화를 내며 고구려왕이 빠른 시일 내에 입조하지 않으면 군사를 거느리고 순행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고구려는 끝내 이를 거절했고, 훗날 수나라는 이를 빌미로 세 차례나 침략했다.

이날 양제와의 만남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8년인 607년 편에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돌궐과의 동맹이 이때부터 더욱 돈독해져 당나라에 동돌궐이 패망하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북쪽 교외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628년 수나라가 망하고 당이 들어선 이후에도,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1880년대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한 이 궁전은 7세기 중엽 지어졌으며, 실크로드의 동서 문물교류 중심지 중 하나였다. 1965년에는 본궁에서 약 5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별궁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발굴했는데, 3면의 벽면에서 비교적 잘 보존된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중 정면 서쪽 벽면의 벽화가 사절행렬도이다.

  •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지 벽화 외교사절(출처: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지 벽화 외교사절(출처: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

당시 사마르칸트를 지배하던 바르후만 왕이 즉위식에서 외국사절을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사신단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 두 번째가 고구려인이다. 이들은 밝은 황색피부에 검은 머리, 상투와 조우관(鳥羽冠, 깃털을 꽂아 장식한 모자), 옷소매에 양손을 넣은 공수자세, 착용하고 있는 환두대도(環頭大刀) 등이 당시 고구려 복식과 일치한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주장이다.

고구려에서 사마르칸트까지는 약 5,000여 km. 왜 그들은 당나라 군대의 감시를 피해 만리장성 외곽의 거친 산악과 죽음의 고비사막을 넘어 그곳까지 갔을까. 단순한 화친이나 문물교류를 위해 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수와 당에 피로 맞서 온 동맹이었음을 확인하고, 앞으로 더욱 공고히 할 것을 다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지금의 외몽골 오르콘 강기슭에서 발견된 비문도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손꼽힌다. 몽골제국의 옛 수도인 카라호름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이 비석은 후 돌궐을 세운 빌게 카간의 동생 퀼테긴(Kul tegin) 장군의 것이다. 8세기 당 현종이 화친의 의미로 선물한 것인데, 비문에 6세기 돌궐의 역사 일부를 담고 있다. 선조인 부민과 아스테미 카간의 장례식에 해가 뜨는 동쪽에서 배크리, 중국, 티벳, 아비르, 거란 등 10개국에서 사신이 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해가 뜨는 동쪽의 배크리가 고구려이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는 고구려가 배크리 또는 매크리로 통용되었다. 구려(句麗)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계곡이나 마을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살기 좋은 나라임을 강조하기 위해 고()를 붙여 고구려(高句麗)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북방의 여러 민족들은 우리 민족을 예맥이라 불렀다. 여기서 예맥의 맥과 고구려의 구려를 합성해 맥구려가 되었는데, 이를 투르크어로 표기하면 배크리이다. 전한(前漢) 말기 황제를 폐위하고 신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에 오른 왕망이 서북지역의 골칫거리인 흉노를 치기 위해 고구려에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자 왕망이 “고()구려는 무슨… 이제부터는 하구려(下句麗)라 불러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고구려의 어원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지난해 열린 수교 60주년 기념 문화·학술교류행사에서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고구려와 돌궐의 교류를 입증하는 기록으로 돌궐에 세워진 고구려 양식의 비석을 소개했다. 고구려 비석의 특징은 광개토대왕비처럼 4면에 비문을 새기는 것인데, 8세기 초부터 이 같은 양식이 돌궐에서 나타난다는 것. 이때는 당나라에 연이어 패망했던 동돌궐과 서돌궐 부족들을 규합해 후 돌궐을 세운 시기로, 6세기까지 사용되던 중국양식이 고구려식으로 바뀐 것이다. 중국 비석은 앞뒤 양면에만 비문을 새겨, 4면을 사용하는 고구려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관계를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양국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해석이다.

학계에서는 투르크족의 기원을 호시탐탐 만리장성을 넘으려 했던 흉노족이나 훈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흉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때는 고조선과 교류하던 시대여서 우리나라와 터키의 관계가 2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양국의 관계가 좋을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7년 KBS가 방영한 사극 「대조영」에서도 소개되었던 돌궐 출신 장수 퀼테긴의 친형으로 후 돌궐을 세운 빌게 카간의 비석에 구() 돌궐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에 630년 무너진 동돌궐 부족들이 당에 복속되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도 나타난다. 644년 당나라 침공 때 돌궐족도 다수 참여했다는 것이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여서 나라가 망하자 일부가 당에 복속되어 중앙아시아 여러 부족 정벌에 참여한 흔적이 있다. 실크로드를 평정한데 이어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국가 정벌에 나섰던 당나라 고선지 장군이 바로 아버지를 따라 귀화한 고구려인이다.

터기와 한국의 국기

잠시 적군의 일원으로 서로에게 창을 겨누기도 했지만, 이는 피지배 소수민족의 어쩔 수 없는 부역이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하늘 아래 우리나라와 터키만큼 오랫동안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는 없을 것 같다. 국제관계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것이 이미 오래전, 일반화된 국제질서지만, 우리나라와 터키만큼은 지난 1,400여 년을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에게 영원한 우방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