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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군의 방어계획
작전명령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1950.3.25),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6․25전쟁 발발 직전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육군 부대는 좌로부터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7연대, 제1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그리고 동해안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제8보병사단 등 4개 사단 및 1개 연대가 맡고 있었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방어중점을 의정부 지역에 두고서 제일선의 전방방어지대에 3개의 방어선을 설정
- 전방사단을 제일선부대와 예비대 등 2개의 방어제대로 편성하여 전방 방어작전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 격퇴
- 38도선을 담당하는 전방 사단은 적의 공격시 38도 선상의 경계진지 전투지대, 주저항선 전투지대, 최후저항선 전투지대 등 3단계로 구분하여 전투를 실시
(제1단계) 초기작전 시 실시하는 경계진지 전투간에는 38도선 경계진지 선에서 적의 진출을 최대한 지연
(제2단계) 주저항선 전투 시 주진지선에서 전 화력의 집중 및 철저한 역습으로 가장 강력한 방어전투로 적을 진지 전방에서 격멸
(제3단계) 최후저항선, 예비진지 전투간에는 전군이 예비진지 방어선에서 전 화력을 집중하고, 역습으로써 적의 전력을 철저히 분쇄 격파하여 이 선을 최후까지 확보
※ 120쪽 분량으로 작성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는 북한군이 공격할 경우를 대비한 국군의 방어계획으로 기본계획, 부대편성, 제일선부대, 후방부대,대공경계, 해안경비, 부록 및 부도로 구성
관련 전투상황
38도선을 담당하는 전방 사단은 적의 공격시 38도 선상의 경계진지 전투지대, 주저항선 전투지대, 최후저항선 전투지대 등 3단계로 구분하여 전투를 실시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계획은 전쟁 발발 불과 3개월 전에 육군본부에서 수립되어 각 사단에 하달되었기 때문에 사단 방어계획의 수립은 전쟁 1개월을 앞두고 수립된 실정이었다. 그 결과 각 전방 사단은 미흡하나마 자체 방어계획은 수립되어 있었으나 이에 대한 지휘소훈련과 기동훈련,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는 한 번도 실시해 보지 못한 채,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각 사단간의 협동작전이나 육군 차원의 작전계획 시행훈련 같은 사단 기동훈련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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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춘천, 홍천 전투(북한군 남침 당일 상황 : 춘천, 홍천방어)
작전명령서-
제6사단 작전명령 제31호(1950.6.25),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여 6일 동안 방어전을 전개, 이 과정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과 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제7연대는 38도선상의 경계진지로부터 철수하여 소양강 북안의 164고지와 우두산62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던 적을 격퇴
- 제2연대는 38도선상의 경계진지로부터 철수하여 어론리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 적의 남진을 1차 저지. 이후 자은리를 거쳐 말고개 일대에 최후저항선을 구축하고 지연전을 펼치면서 홍천으로 철수
- 제3대대는 하답-운니산에 이르는 38도선상의 경계진지에서 교전을 전개한 후 철수를 개시, 안보에서 본대와 합류
관련 전투상황
북한군의 남침 당시 국군 제6사단은 춘천과 홍천 전방에 각각 방어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제7연대는 우측 제7사단과의 협조점으로 설정된 가평 적목리로부터 춘천 동북쪽의 764고지(계명산) 남쪽에 이르는 방어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 화천-춘천 방면에 제3대대를, 조공의 공격로로 예상되는 양구-춘천 방면에 제2대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화천-가평간 접근로에는 제3대대 제10중대를 방어정면에 배치하고 제11중대는 대대예비로 춘천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군 제2사단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화천-춘천과 화천-가평 축선에 투입,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7연대는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던 적을 격퇴하였다. 한편 제6사단 제2연대는 춘천 동북쪽의 764고지(계명산) 남쪽으로부터 우측 제8사단과의 협조점이 설정된 현리 965고지에 이르는 42㎞의 방어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연대는 전투지대 중간지점에 있는 남전리 물앙골 서단 동아실 마을을 전방 양 대대의 협조점으로 정하여 좌일선에 제1대대를, 우일선에 제3대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2대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군 제2군단의 주공사단인 제12보병사단은 2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인제-홍천축선에 투입,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의 기습공격을 받은 제2연대는 적의 남진을 1차 저지하였다. 이후 홍천을 점령하기 위해 4차에 걸쳐 총공격을 감행한 적을 저지한 후 지연전을 펼치면서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6사단은 춘천, 홍천방어 전투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여 6일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은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과 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국군은 한강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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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양 전투(지연전 상황 : 단양 방어선)
작전명령서-
제8사단 작전명령 제12호(1950.7.8),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7월 6일 18시에 단양에 남한강 강변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 단양 북쪽의 남한강 남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단양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적은 금명간에 도하를 감행할 것으로 판단
- 사단은 적의 도하를 저지하고 한강선을 계속 고수
- 제21연대는 현진지선에서 적을 저지
- 제10연대는 1개 대대로써 단양-외중방리선을 확보하고 주력은 장림리에서 재편하는 즉시 출동태세를 갖출 것
- 제18포병대대는 신기리에서 사단을 일반 지원. 단 화력의 우선권은 제21연대에 있음
- 공병대대는 주력(2개 중대)을 즉각 출동시켜 제21연대장 지휘하에 동측방을 엄호
- 여하한 경우에도 유무선을 유지하고, 사단지휘소는 23: 00 이후 북상리에 위치
관련 전투상황
2개 연대로 편성된 국군 제8사단은 단양 북쪽의 남한강 남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제10연대 제1대대로 하여금 매포초등학교에 위치한 북한군의 전방지휘소를 기습하도록 하여 이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북한군은 7월 8일 저녁부터 제8사단 진지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가하면서 상진리-덕천리에서 남한강 도하를 준비하였다. 북한군의 도하공격은 7월 8일 23시 30분경부터 도담리 서안과 상진리에서 시작되었다. 북한군 제12사단은 각종 화포와 박격포로 단양 동북방의 국군 진지에 사격을 가한 후 남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제21연대장은 연대에 배속된 공병대대를 제2대대로 급진시켜 동측방을 엄호하게 하였다. 제2대대 지역에서 북한군이 도하할 무렵, 심곡리 부근의 제1대대 지역에서도 적의 도하가 목격되었다. 23시30분경 이미 일단의 북한군이 남안에 거의 도달한 상태였고, 그 뒤를 이어 2개 중대 규모가 도하 중이었다. 제21연대는 박격포와 기관총을 동원해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이어 연대 방어부대는 각각 상리고지와 고음동고지로 이동했다. 이때 야음을 틈타 고음동 계곡으로 침투한 북한군이 하양방리에서 노동리 방면으로 우회 공격하자, 퇴로차단을 우려한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9일 03시까지 슬음산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 제8사단은 단양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지연시키다가, 양방리와 장현리 지역으로 침투한 북한군으로부터 배후를 위협받게 되자 7월 12일 풍기로 철수하여 새로운 저지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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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부동 전투(낙동강방어선 : 다부동 일대)
작전명령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19호(1950.8.11), 국방부 육군본부,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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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군단 작전명령 제12호(1950.8.11),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낙동강 연안에서의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 낙동강 주저항선으로 철수하였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19호- 군은 차기 작전을 위해 8월 12일~13일 야음을 이용하여 'X'선까지 8월 13일~14일 야간에 'Y'선으로 이동
- 제1사단은 8월 12일~13일 야음에 동 지구 'X'선으로 이동한 후 8월 13일~14일 야음을 이용하여 'Y'선으로 이동을 준비
- 제1사단은 1950년 8월 12일 20:00에 철수를 개시하여 상림동~ 다부동을 경유하여 'Y선(주저항선)'을 점령하라
※ 'Y'선은 303고지(작오산, 미제1기병사단 방어지역)-328고지-수암산-유학산-356고지-273고지(국군 제6사단 방어 지역) 위천(제6사단 방어지역)을 연결하는 최후 방어선
관련 전투상황
육군본부는 낙동강 연안에서의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1950년 8월 11일 낙동강 주저항선으로의 철수를 하달하였다. 이 무렵 국군 제2군단도 적정을 분석하고 이른바 워커라인에 의거하여 방어지대를 축소하는 작전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다. 제2군단은 8월 12일 작전계획에 의거 제1사단에게 주저항선으로의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Y'선에서의 제1사단의 방어정면은 20㎞에 달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예비를 확보할 병력의 여유가 없이 주저항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사단은 8월 12일 20:00시 적과 접촉을 끊고 주저항선으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이때 사단은 25번 도로 접근로를 방어하게 된 제11연대에 제15연대 제2대대를 배속하고 예하 3개 연대에 방어지대를 부여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사단사령부를 다부동 남쪽 9㎞지점에 있는 동석동의 동명초등학교에 설치하였다. 제15연대는 좌전방 부대로 다부동으로의 길목인 328고지를 중심으로 3㎞의 방어정면을 부여받았다. 제12연대는 중앙일선부대로 수암산-유학산-674고지를 중심으로 9.5㎞의 방어정면을 부여받았고, 제11연대는 우전방 부대로 356고지-297고지-석우동을 중심으로 7.5㎞의 방어정면을 부여받았다. 이에 제15연대는 8월 13일 328고지에 2개 대대로서 방어지대를 편성하였으며, 제12연대는 수암산과 유학산 주봉(839고지)에 각각 1개 대대씩 배치하였다. 8월 13일 사단 정면에는 우측 미 제1기병사단을 공격하던 북한군 제13사단이 약목 일대로 이동해 제15연대와 대치하고, 수암산-유학산 정면에는 북한군 제15사단이 진출해 있었다. 그리고 제11연대 방어지역에는 북한군 제13사단이 접근하고 있었다. 양측이 낙동강선을 돌파하느냐 방어하느냐 명운을 건 다부동 일대에서의 격전을 전개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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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동강 방어선
작전명령서-
제1군단 작전명령 제180호(1950.9.13),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안강평야와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안강 남쪽에는 수도사단이, 포항 남쪽에는 제3사단이 북한군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 수도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을 너머 북한군의 저지선을 완전히 돌파하였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제1군단은 제8군사령관에 의하여 잭슨전투부대 지휘하로부터 해제된 후 즉시 각 부대를 전술상 강력히 정리하고 상황이 허용하는 한 배당된 지경 내의 정위치에 각 사단을 이동하라.
- 수도사단은 현 위치를 안정화하고 적 주력과 적극적이고 강력한 접적을 하기 위한 국부적 반격을 계속하고 담당 지역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현재선 침투를 기도하는 적을 배제하라.
- 제3사단은 현 위치를 안정화하고 적 주력과 적극적이고 강력한 접적을 하기 위한 국부적 반격을 계속하고 담당지역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현재선의 침투를 기도하는 적을 배제하라.
관련 전투상황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군단장 김백일 준장)은 9월 15일 안강평야와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안강 남쪽에는 수도사단이, 포항 남쪽에는 제3사단이 경주방면으로 돌파하려는 북한군 제12사단과 제5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이전할 준비 중이었다. 제1군단은 9월 13일 육군본부에서 하달한 작전명령 제180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반격 준비를 갖추었다. 국군 제1군단은 육군본부 작명 제180호에 따라 제1단계 작전목표로 청송-영덕선을 점령하며 도평동-청하선을 그 중간 통제선으로 설정하였다. 동해안의 국군 제3사단(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형산강 남안에 서로부터 제23연대, 제22연대, 제26연대를 전방에 나란히 배치하여 북한군 제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9월 16일 제23연대와 제26연대는 적정 탐색을 위해 각각 1개 소대 규모의 특공대를 형산강 북쪽 500m까지 진출시킨 후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안강의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대령)은 제1연대, 제1기갑연대, 제18연대의 3개 연대로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5사단 제10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수도사단은 안강을 탈환하기 위하여 3개 연대를 예비대 없이 전부 공격제대로 투입하여 안강 서측으로는 제18연대, 동측으로는 제1연대를 기동시켜 좌우측에서 협공하면서 중앙에서는 제1기갑연대로 하여금 강력한 기동력으로 안태봉에서 무릉산과 안강을 연하는 축선을 따라 직접 압박하면서 정면을 돌파하였다. 이로써 수도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을 너머 북한군의 저지선을 완전히 돌파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은 환자들도 철수시키지 못한 채 서북쪽으로 도주하였으며 제5사단 일부 부대는 기계 북방 비학산 방향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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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8선 돌파작전(인구리-양양 돌파)
작전명령서-
제3사단 작전명령 제44호(1950.10.1),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1950년 10월 1일 국군 제3사단의 제23연대 제3대대를 선봉으로 하여 인구리 북쪽에서 38도선을 넘어 양양을 목표로 북진하였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제23연대는 38선을 돌파한 후 주력으로서 일거에 양양을 점령하고, 점령 후에는 초월 공격하여 사단의 선두부대가 되어 계속 북진해 원산을 점령하라.
- 제26연대는 제22연대가 양양을 점령한 후 초월 공격하여 사단 선두부대가 되어 계속 북진, 주력으로서 원산을 점령하라.
- 제22연대는 제23연대가 양양을 점령한 후 양양에 집결하여 사단 예비가 되라.
- 포병대대는 제1중대가 제23연대를, 제2중대가 제26연대를 각각 지원하고 제3중대가 선두부대에 중점을 두면서 일반 지원하게 하라.
관련 전투상황
1950년 9월 30일 정일권 총장은 강릉의 제1군단사령부를 방문하고, 38도선에 도달한 제3사단 제23연대의 진지에 나가 전선을 들러본 뒤 38도선 돌파를 군단장에게 구두로 명령하였다. 북진명령은 최초 구두명령에서 성문화된 작명으로 작성되어 제1군단 작명 제103호와 제3사단 작명 제44호로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은 1950년 10월 1일을 기하여 역사적인 38도선 돌파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의 주력부대는 10월 2일 14:00시에 38도선 북쪽 20㎞ 지점인 동해안 가도의 양양에 돌입하였다. 같은 시간에 서림리 북쪽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수도사단도 제18연대를 선두로 양양을 점령하였다. 양양을 탈환한 제23연대 주력부대는 북으로 계속 전진하여 17:00시에 양양 북쪽 10㎞지점의 강선리에 도달하였다. 이날 제26연대도 제23연대를 후속해 강선리에 진출하였으며, 강릉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제22연대가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제22연대는 차량편으로 12:00시에 간성을 통과해 거진리에서 제23연대를 초월한 후 18:00시에 거진리 북쪽 4㎞지점의 마달리에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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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평양탈환작전
작전명령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18호(1950.10.17),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1950년 10월 17일 평양탈환이 임박할 무렵 우리 국군이 평양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서쪽으로의 공격을 계속 실시하였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가능한 한 최단시간내 제2군단사령부를 포함한 군단의 전 병력을 강동 서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하여 이용 가능한 모든 도로 및 통로를 사용하여 서쪽으로의 공격을 계속 실시하라.
- 미 제1군단과 협력하여 평양의 동쪽 및 동북쪽으로부터 즉시 평양을 공격하라.
- 6사단은 성천을 공략한 후, 안주를 공격하라.
- 담당 지구내에서 북진을 계속하기 위한 차기작전을 준비하라.
관련 전투상황
북진 이후 평양탈환이 임박할 무렵인 1950년 10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육군본부는 10월 17일 18시부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육본 작전명령 제218호를 국군 제2군단에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2군단 예하 3개 사단 중 제6사단을 제외한 제7사단과 제8사단이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의 우익으로서 율리 북방 초귀동에서 평양 동측방을 향해 공격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제 사단은 종심 8㎞의 산악지대를 돌파하고 낙랑평야로 진출한다면 평양에 선착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율리의 제15연대가 조공으로 하여 삼등-강동 축선을 따라 평양 동북방으로 우회기동할 계획이었다. 연대는 18일 07시에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연대장은 연대직할대(잠정편성)를 좌측방에서 남강을 연하여 진격하게 하고, 연대의 주력을 삼등-화천-삼청리-본평양 축선을 따라 진격하게 하였다. 이로써 제15연대는 이날(18일) 22시경 평양시내에 있는 대동교로부터 서쪽 11㎞지점에 있는 대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쌍강포 상류쪽 남안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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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함흥 국군 철수 작전(중공군의 개입 이후 국군의 38도선으로 철수)
작전명령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42호(1950.12.3), 국방부 육군본부,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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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49호(1950.12.8), 국방부 육군본부,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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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51호(1950.12.15),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1950년 11월 24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총공세를 하였으나 다음날부터 중공군이 제2차 공세를 시작하면서 부득이 청천강과 함흥-흥남 지역에서 철수하여 38도선 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제2군단 평강-김화 선을 방어하기 위해 12월 5일 시변리에 집결(작전명령 제242호)
- 제2군단 다시 화천 동쪽 방어진지를 점령한 후 연천을 경유하여 12월 14일 원주 일대로 철수(작전명령 제249호)
- 제2군단 제7사단을 육본 직할로, 제8사단을 제3군단으로 배속 전환하는 대신 동부전선의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제9사단과 제3사단을 배속(작전명령 제251호)
관련 전투상황
국군 제2군단은 11월 28일 동부전선 강동 일대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후 평양 동측방을 방어하였으나, 12월 14일에 원주 일대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육군본부의 작전명령 제253호에 따라 제9사단이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됨으로써 홍천으로 진출한 제3사단으로 인제 남쪽 부평리-관대리 간을 방어하였다. 한편 1950년 12월 18일 흥남에서 철수한 제1군단은 육본 작전명령 제253호에 따라 묵호에서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 중인 관대리-현리-서림-양양을 연하는 방어선을 인수하였다. 군단의 임무는 38도선 방어진지를 점령한 후 태백산맥 일대에서 준동하는 북한군 유격부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38도선 이남으로 침투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에 제9사단은 서림리-인구리 지역을 수도사단에 인계하고 부평리-관대리 지역을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하여 방어선을 축소하여 관대리-현리-서림 지역만을 방어하게 되었다. 수도사단은 양양과 주문진 간에 방어중심을 유지하였고, 남대천 남쪽 하왕도리, 상광정리 일대, 주문진 남족 방내리에 각각 배치하여 북한군 게릴라의 준동에 대비하였다. 이로써 국군 각 군단 및 사단은 육본 작전명령 제253, 제254호에 따라 유엔군이 방어하고 있는 문산 북쪽과 포천 북쪽을 제외한 38도선상의 전 지역에 방어편성을 완료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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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백마고지 전투(고지전 : 백마고지 전투)
작전명령서-
제9사단 작전명령 제85호(1952.10.4), 국방부 육군본부, (1950)
전투 개요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단의 공격을 받고 1952년 10월 6~15일까지 10일 동안 뺏고 빼앗기는 사투를 벌인 끝에 고지방어에 성공한 전투였다.
작전명령서 주요 내용
- 사단은 명 4일 또는 수일 이내에 적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395의 방어책을 긴급히 보강함으로써 진전에서 격멸하려 한다.
- 제30연대 ㉮연대 예비대(제3대대)의 일부로써 △395의 주진지를 보강하고, 주력으로써 고지전방의 전초진지 공사를 긴급히 완료하라.
- 제29연대는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 제28연대는 사단 역습명령이 하달되면 즉각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라.
- 제51연대는 별명이 있을 시에 2개 대대병력을 부근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
- 제1포병단장은 별첨한 포병부록에 준거하여 다음과 같이 지원에 임하라. 제50포병대 : 제30연대 직접지원, 제51포병대대 : 제29연대 직접지원, 제52포병대대 : 사단 일반지원
- 제53전차중대는 10월 4일 17:00시부로 제30연대장의 작전지휘를 받으라.
- 협조지시 각 부대는 상호 긴밀히 협조하라.
- 사단 OP는 △254에 위치한다.
관련 전투상황
사단은 당시 적의 기도를 백마고지를 탈취하여 철원평야를 제압하는 동시에 차기 대공세를 위한 발판을 구축하며, 철원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중부전선에서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고 아군을 크게 위협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예상한 대로 이날부터 적의 포격도 점차 강화되어 5일 17시~6일 17시의 24시간 동안 2,000발의 포탄이 집중하였다. 이 집중포화는 395고지의 아군 방어진지에 대한 파괴사격으로 간주되었는데, 사단이 현 방어정면을 인수한 이래 가장 치열한 포격이었다. 10월 6일 아침부터 국군 제9사단 정면에 포격을 집중하던 적은 봉래호 제방을 파괴하여 역곡천을 범람시키며 395고지 일대에 대한 아군의 기동을 제한한 다음, 19:00시 경부터 중공군 제114사단이 395고지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작했다. 적은 제340연대가 1개 대대를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직접 투입하였다. 이날 공격은 백마고지 전투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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