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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남침기

북한군 남침 시 상황도

1950.6.25 ~ 1950.9.15

(지도)북한군 남침 시 상황도

(문서)대구를 사수하라, 대통령비서실(1950), AA0000591(0001)

대구를 사수하라, 대통령비서실(1950), AA000059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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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지상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제945육전대와 제766부대를 상륙시켰다.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우선 전방 방어 병력만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후방 주둔 사단을 긴급히 전방으로 이동시키면서 이에 대응하였으나, 북한군은 38도선을 돌파하고 6월 28일 서울과 춘천, 강릉을 점령하였다.

그 후 국군은 한강 이북지역에서 철수한 병력과 이남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병력을 통합하여 임시로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지휘하에 한강방어작전을 수행하였으나, 7월 4일 한강선을 돌파당하면서 평택으로 철수하였다. 이 때 중부전선에서는 7월 2일에 원주가 북한군에 점령되고, 동부전선에서는 7월 4일 삼척이 점령된 후 지연전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유엔군의 파병이 결정되고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미 제24보병사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국군은 7월 4일 평택-제천-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유엔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북한군 T-34탱크가 대전을 향하여

북한군 T-34탱크가 대전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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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북한군이 학살한 양민모습  (1950), CET0048123(7-1)

북한군이 학살한 양민모습 (1950), CET00481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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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여전히 상대적인 전투력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한 채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인 마산-왜관-영덕을 연하는 선까지 물러났다. 그 동안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고 유엔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하는 등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유엔군의 작전지휘체제와 기반이 갖추어졌다. 이 때 국군도 2개 군단 5개 사단으로 재편성되어 전쟁 직전의 병력 수준으로 전력을 회복하였고 최소한의 전투경험도 쌓았다.

반면에 북한군은 그 동안의 계속된 공세행동으로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어 전투력이 감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 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등 전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북한군의 공세작전이 거의 한계점에 이를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을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에 이르는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에 배치하고 비교적 조밀하게 압축된 방어지역에서 전세 만회를 위한 방어태세에 임하였다.

(사진)6.25전쟁 시 북한군이 뿌린 전단(1950), CET0048225(1-1)

6.25전쟁 시 북한군이 뿌린 전단(1950), CET00482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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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UN군 낙동강 방어선 모습 (1950), CET0048218(1-1)

UN군 낙동강 방어선 모습 (1950), CET00482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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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선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총력을 기울여 8월 5일부터 이른바 8월공세와 9월공세를 감행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함안-창녕-왜관-영천-포항 선을 넘지 못하였다. 북한군은 여기에서 많은 손실을 입은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된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전투력에서 상대적 우세를 확보하였다. 북한군은 낙동강 선에 이르러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공격개시 82일 만인 9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